[연재소설] 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52) 인간의 정감 ①
발행일1964-06-07 [제425호, 4면]
그날 저녁 딕슨은 흐린 표정으로 상사 집에 나타났다. 「소파」에 좀 앉았던 그는 잠깐 밖에 나가자고 하길래 따라 나갔더니 낮에 고갯길에서 일으난 이야기를 한다.
『네가 보았느냐?』
『내 친구가 보고 나에게 일러주었다. 그것이 사실이냐?』
『지 아이 둘이 나에게 희롱한 것은 사실이다!』
『어떻게 생긴 놈이더냐?』
『하나는 키가 크고 하나는 꼬만데 키큰 녀석이 그랬다. 코와 눈 사이에 기미가 있고 눈이 크고 우락부락한 인상이더라!』
『……』
딕슨은 성난 얼굴로 생각하더니 잘모르겠는지 고개를 갸웃한다.
『키큰 놈이 너를 껴안았느냐?』
딕슨은 불쾌한 표정으로 묻는다.
『그때 나는 뿌리치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아 주었다!』
『그건 잘했다!』
그는 빙긋이 웃었다.
『그러길래 나 다니지를 말라고 하지않더냐?』
『가깝해서 나갔더랬어-』
『네가 웃는 얼굴을 그들에게 보이지 않았느냐?』
『그렇지 않다!』
『………』
잠시 서먹한 공기가 우리 사이에 흘렀다. 그날밤은 딕슨의 입이 무겁고 별로 말이 없이 앉아 있었기 때문에 나도 우울한 기분이 되었다.
부라운 상사만이 「위스키」를 찔금찔금 마시며 웃읍지도 않은 이야기를 혼자 웃으며 지껄여댔다. 부인은 이따금 맞장구를 치고 웃엇으나 딕슨은 조개 주둥이 모양 입을 꼭다물고 있었다.
『왜 오늘은 말이 없느냐?』
답답해서 물었다.
『좀 생각할 일이 있어 그렇다-』
딕슨은 얼굴표정을 꼼짝않고 나직히 대답한다.
시간이 되자 상사는 엄격한 얼굴이 되어 딕슨을 부대도 쫓아버렸다.
밤에 잠이 안와 첫닭 우는 소리를 듣고서야 눈을 감았으므로 아침에 깨니 해가 창문에 눈부시게 빛이고 있었다.
부라운 상사는 출근하면서 부인에게 무언지 내 얘기를 한참 하는 것 같았다.
식사가 끝나자 부인은 날더러 서울 집에 같이 가보자고 옷을 가라입는다.
『싫어요!』
나는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상사는 자기가 이른데로 안하면 화를 내는 성미니까 그대로 해야해!』
부인은 「빽」을 들고 구두를 신는다.
『우리집까지 안가더라도 내 신분만 알면 되실거 아니야요』
『나순이 말만 들을 수는 없다는거야』
『나는 잘 아는 이웃간이든 아주머니 댁으로 갈테니 거기가서 물어보겠다면 가겠어요!』
『그 아주머니가 누군데?』
『그 아주머니는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와는 친구였고, 우리집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분이야요! 그댁 아저씨는 대학교수구…』
나는 동이 어머니집으로 부인을 데리고 갔다. 내가 들어서니 동이 어머니는 마침 앞뜰 화단의 화초를 가꾸고 있었다. 그간의 일을 간단히 이야기하고 부라운 상사의 부인인 한국아주머니를 데리고 온 것을 말했다. 귀를 기울이고 듣던 동이 어머니는 밖에 섰던 부인을 서근 서근히 맞아들여 대청마루에 같이 앉았다.
동이 어머니는 나를 옆에 앉혀놓고 부드러우면서 차분차분한 어조로 내 얘기를 하였다.
『…얘가 국민학교 이학년 다닐때부터 잘 아는데, 집에서는 공부도 안하면서 늘 일등만 했어요. 그만큼 영리하고 명민한데 아버지가 그애에게 맞도록 유도해야 할텐데 아버지도 성미대로 자기 기분대로 하자니 자연 부자간에도 금이 생겼지요. 어머니가 생존해 계셨으면 사이에 들어 그름을 메꿔주셨을텐데 아버지가 여식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기란 어렵지요. 게다가 생긴것이 서양적이니까, 학교서 아이들이 놀리니 집에서나 학교서나 마음이 붙지 않지요!』
부인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듣고 있었다. 나에게 관한 이해심이 생긴 표정이었다. 나는 이때 이상했다. 내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같이 듣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동이 어머니는 여러모로 내 얘기를 계속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을 맺엇다.
『…나순이는 겉으로는 안그럴지 모르나 속으로는 누구보다도 고독감을 느낄거야요』
그말은 화살끝이 닿은 것 같이 내 가슴을 찌르듯 파고들었다.
나는 지금까지 미처 고독이란 말을 생각할 수도 없게 고독 속에 살았던 내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물에 뜬 기름 같이 언제나 내 혼이 어디론지 떠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고독이란 말 끝에 부라운 상사의 부인도 자기의 고독했던 전날의 신세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사변후 남편을 여의고 어린 것은 죽고 혼자 살길을 찾자니 그리 배운 것도 없어서 할 수 없고, 이장사 저장사 하다가 나중에는 미군 상대로 장사를 하던중 우연히 부라운 상사를 알게되어 나이 사십이 넘도록 독신으로 이선 그와 결혼을 하였었다. 얼굴이 못나서 처음에는 싫었으나 너무 고독하여 친절한 그에게 차츰 맘이 쏠리었었다. 처음에는 말이 통하지 않아 그때문에 생기는 오해와 고독감이 또한 컸는데 「에이 비 씨」부터 배워 이제는 의사 소통은 충분하다는 이야기를 하며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고독의 벽을 뚫고 나온 사람의 환희가 엿보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부인에 대한 인상을 새롭게 했다.
우리는 돌아오는 기차 속에서 갈 적과는 딴판으로 퍽 마음과 마음이 가까워진 정감 속에서 마주 앉아있었다.
그날 저녁 부인의 이야기를 듣고 상사가 나에게 대하는 태도도 전날보다 한결 부드러웠다.
인간은 서로 이야기를 하고 듣고 서로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날저녁 딕슨은 일곱시가 넘어도 나타나지를 않았다.
『이녀석이 웬일일까?』
부라운 상사도 걱정스러이 말하며 부대로 전화를 걸엇다.
『곧 온대!』
상사는 수화기를 놓자 말했다.
마중하기 위해서 문깐에서 삼십분쯤 기다리니, 그가 왔다.
만나자 나는 오늘일을 그에게 이야기했다.
그도 좋아했으나 노상 입에다 손을 대고 말은 조금씩만 한다.
문득 입을 보니 성하던 앞니가 두개나 빠져 있었다.
『아니, 이가 왜 그래요?』
『부러졌어!』
『왜요?』
『키큰 자식하고 격투했지!』
『아니, 아네게 희롱하던 그녀석?』
『음! 오늘 어떤놈인줄을 알았기에 한대 먹였지?』
『당신이 더 다치지 않았어?』
『그놈은 앞니가 세개 아랫니가 하나 네개가 부러졌어!』
『어마!』
나는 새삼스러이 딕슨의 얼굴을 바라모았다. 어딘지 여성적인 그에게 남성적인 반면이 있었던 것이 대건하기도 했다.
『보기싫지?』
딕슨은 웃는 얼굴을 손으로 가린다.
『아니요. 외려 난 당신이 전보다 더 좋아졌어!』
『자꾸 싸우란 말인가?』
『이젠 싸우지 말아요! 격투는 한번만으로 충분해요!』
이빠진 딕슨 옆에 앉아서 나는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