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福者(복자)로 모셔야 할 26위 순교사기] (18) 聖書(성서) 出版(출판) 重任(중임) 맡은 崔炯(최형)
高主敎 모시려 金神父와 上海에도
발행일1963-11-17 [제399호, 3면]
▲崔 베드루 炯(치장)은 경기도 수원 태생으로 서울 남문 밖에서 살았다. 태중 교우이며 기해년 박해(1839) 때 벌써 잡힌 일이 있으나 배교함이 없이 석방되었다. 아주 열심하고 겸손하며 성서를 읽고 교리를 연구하는데 부지런하여 교우들의 칭찬과 존경을 받아 왔다. 안드레아.김신부가 1845년 고주교와 안신부를 모시려 조그마한 조각배를 타고 「샹하이」로 갔을 때 최 치장도 동행하여 바닷길 몇 천리를 성난 풍랑과 싸우며 실로 척하고 위험한 길을 걸은 적도 있다.
장주교의 분부로 성서 출판의 임무를 맡게되자 이 극히 어려운 책임을 많은 재능과 열성으로써 다 하였다. 그는 성서를 박아낼 뿐만 아니라 또 번역과 저술도 했는데 지금 현양회가 귀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그의 친필의 「환난을 위로하는 말이라」는 소저가 그 중 하나인 것이다.
베드루가 체포되기는 병인년 양력 2월 말이다. 먼저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았는데 『서학을 하는지가 몇 해나 되는가 누구의 명령으로 서적을 발간했는가. 혹은 자발적이었는가』라는 물음에 『나는 태중 교우이고 책은 장주교의 명으로 발간하였소』하고 베드루가 대답하니 『그러면 살기 위해서 그것을 했는가. 또는 다른 의도가 있었는가』 이렇게 다시 묻자 베드루는 『살기 위해서였소. 하지만 성교 서적을 널리 보급시켜 외교인을 귀화시킬 생각이었소』라고. 『고약한 놈! 죽을 죄를 짓지 않았어』 『천주께 죄를 진 것은 아니오. 그러나 나라의 법에 어긋난 일을 했다면 법대로 처분하시오』 이렇게 베드루는 죽음의 각오를 표시하였다. 사실 베드루는 성서를 출판했다는 죄목 때문에 다른 순교자들보다 더 악독한 고문과 형벌을 받게 되었다. 포도청에서 이미 다리에 매를 30대나 맞은데다가 의금부로 옮겨진 후엔 주장, 평장, 곤장 등 갖은 태형을 겪었지만 한 말 없이 이 모든 형벌을 용감하게 참아냈던 것이다.
형장은 역시 서소문 밖 네거리로 결정되었다. 이틀 전에 그 곳에서 목을 짤린 남종삼(南鍾三)과 똑같은 모습으로 즉 십자가에 손과 발을 꼭 묶인채 최 베드루는 전 요안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가서 참수 치명하니 때는 3월10일이었고 베드루의 나이 57세였다. 시체는 형장 근처 벌판에 오랫동안 버려져 있었는데 후에 교우들이 남종삼의 시체와 함께 거두어 왯고개에 합장하였더니 1909년에 서울 명동대성당 지하실로 이장되어 오늘까지 많은 교우들의 순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