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26) 고적감 ④
발행일1963-11-17 [제399호, 4면]
나는 걸으면서 내 마음 속에 일어나고 있는 어떤 변화를 살피었다. 옷가방을 들고 지향 없이 걷는 나와, 그것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내가 있었다.
걷고 있는 나는 슬픔에 잠겼다기보다는 허탈 상태에 있는 것 같다. 슬픔도 괴로움도 희망도 그 모두가 형태를 잃고, 보오얀 연기같은 것이 눈앞에 피어오른다.
『너는 슬퍼야 할 것이 아니냐?』
뒤에 따르는 또 하나의 내가 물었다.
『이상하게도 슬픔도 모르겠다.』
『너는 고아이다.』
『고아는 사람 아니냐?』
『어머니의 나라는 일본, 아버지의 나라는 미국, 키워준 양부모는 한국, 너의 국적은 어디냐?』
『나도 모르겠다』
『장차 너는 어떻게 할테냐?』
『모른다』
『강숙이네 집에 가서 오늘밤은 잘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부터 어디로가며 어디서 잘 것이며 어디서 먹을 것이냐?』
『바람부는대로 맡기겠다!』
이렇게 분열된 내 반쪽들이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에 강숙이네 집앞까지 왔다.
강숙이를 찾으니 학교서 돌아왔다가 어디 나가다고 한다. 문전에서 기다리고 섰기도 을씨년스러워서 오던 길을 다시 걸었다.
『이대로 다시 아버지 있는데로 갈까?』
앞서 가는 내가 묻는다.
『그는 너의 친아버지가 아니지 않느냐?』
『그래도 15년간 길러준 사람이다. 뭐니뭐니 해도 실지로 아버지 노릇을 한 것은 그다.』
『그는 위선자고, 너를 학대하고 있지 않느냐?』
『이 가방은 그가 나에게 주신거다. 이 가방은 값진 것이며 아직도 새 거다.』
『밥과, 잘 곳을 주고 학교에 보내주는 이익이 있으니, 그 집에 다시 들어가는 것도 타산적이다.』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책상 위에 써논 편지가 아버지의 눈에 뜨이지 않기를 바라는구나?』
『그렇다. 그 편지를 찢어버리고 시침을 떼고, 내 방에 가서 앉아있을 생각이다.』
어느듯, 거리는 땅거미가 짙어왔고 집 문전에 이르니, 대문이 닫혀져 있다.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조용하다.
아버지가 돌아왔다가 내 편지를 보고 찾으러 나간 기미도 같고 아직 들어오지 않은 기미도 같다.
안방문이 열리며 식모 복순이가 나온다. 문을 여닫는 태도가 덜조심스러운걸 보면 안방에는 아버지가 있지 않는 모양이다.
복순이를 부르려고 하던 참에 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골목 어구에 들린다. 나는 급한대로 골목 안으로 뛰어 옆으로 다시 굽어지는 막바지 골목 모퉁이에 몸을 숨기었다.
과연 기침의 주인공은 아버지였다.
골목에 들어서는 구두 발자국 소리는 우리집 문전에서 멎고,
『얘, 문 열어라!』
하고 아버지가 소리친다.
복순이가 대답하고 나오는 소리가 난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미루어 보니 방금 퇴근해 온 길인 것 같다.
대문이 절거덕 닫히고 아버지는 안으로 사라졌다. 안방 문을 여는 기미가 내 오관을 저리게 흔든다.
이때 분열된 나는 한 덩어리가 되어 골목에서 한길로 뛰었다.
속도를 내어 강숙이네 집이 있는 방향으로 걸었다.
『진작 대문을 열라하고 들어갔으면 아버지와 부딪히지 않았을걸!』
『나는 왜 다시 도망쳐 왔을까?』
앞에 가는 내가 물었다.
『너는 편지를 보이기 싫었던 것이다』
『맞았다.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선 꼴을 보이기가 싫었다』
『지금이라도 들어갈 생각은 없느냐?』
『싫다.』
『용서해 줄지도 모른다』
『싫다』
『매가 무서우냐?』
『이대로 되는대로 타락해 버릴테다』
『좋은 체격과, 고운 얼굴을 진흙 속에 던지다니, 생각 다시 해라!』
『부잣집 청년이 나를 사랑한다면 좋겠다』
『김진호는 어떠냐?』
『그는 부자가 아니다』
『사람은 진실하지 않느냐?』
『나프타링 냄새가 난다』
『이제 너는 자유의 몸이니 김진호하고 연애할 수도 있지 않느냐?』
『그의 마음을 아직 알 수 없다.』
『한 번 네 사정을 얘기해 보아라!』
『싫다-』
『왜?』
『도리어 그가 나를 경멸하고 멸시하면 어떡허냐?』
『김진호만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설사 그가 나를 이해한다고 하자, 그래서 어떻게 내 문제가 해결이 되느냐?』
『그의 집에 살며, 그 집에서 학교를 보내줄 지 아느냐?』
『어림도 없는 소리다. 김진호 혼자 학교에 다니기도 벅찬 생활인가 보더라!』
다시 눈 앞에는 강숙이네 집이 보인다.
『강숙아!』
내 목소리는 의외에도 명랑했다.
『누구니? 어마 나순이구나?』
강숙은 반색하며 내 손을 붙든다.
『오늘 왜 결석했니?』
『오늘밤 너의 집에서 좀 재워다오?』
『아버지한테 꾸중듣고 나왔니?』
강숙의 눈은 묵직한 손가방 위로 스친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했다.
아주 나왔다는 말은 안 할 생각을 했다.
바깥채로 아담한 사랑이 강숙의 공부방이다. 강숙은 그 방에서 혼자 자므로 내가 하룻밤쯤 끼어자기는 수월했다.
방 안에 들어서자 나는 두 다리를 쭉 뻗고 벽에 기대 앉았다. 넓은 거리에서 몸둘 데가 없더니 그 방에 들어서니 기를 펼자리가 생긴다.
『가방 속에 든 건 뭐니?』
『몰라 뭔지!』
나는 남의 일같이 웃었다. 강숙은 가방을 열어본다. 나는 내버려두었다.
『아주 집을 나온거 아니니?』
『아니, 시골 어머니 친정에 좀 갈라구?』
『왜?』
『그저!』
나는 벽에 걸린 복사판 그림, 미래의 만종(晩種)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학교는 어떡허구』
『학교에 흥미 없어!』
『……』
강숙의 유심한 시선을 느끼며 나는 농부 남녀가 밖에서 일 손을 멈추고 저녁 종소리에 기도드리고 있는 그림을 바라보며 저 사람들의 기도는 무엇인가 하고 생각해 본다.
『나한테 숨길거야 있니, 얘기해라. 무슨 일이 있었니?』
『아무 일도 없었지… 그저 어디론지 멀리 멀리 갈 생각이 들었어… 저 농부들이 서 있는 지평선 너머는 어딜까?』
『당분간 우리 집에서 학교에 다녀라』
강숙은 내 무릎에 손을 대고 언니같이 말한다. 나는 강숙을 바라보았다.
『어머니한테 얘기할테니까』
『……』
나는 생각해 보았다. 학교에 나가면 곧 아버지에게 발각될 것이다. 도망친 돼지모양 끌려갈 내 꼴이 눈에 보인다.
『학교 안 갈테야』
『그럼 어떻게 할 작정이니?』
『내 걱정은 말구. 오늘 밤만 재워줘! 아니, 한 며칠만!.』
그날 밤 이불 하나 속에 강숙과 나란히 붙어 누우니, 자연 이야기의 실머리가 풀리고 말았다. 엎지러지는 물과같이 나도 모르게 자초지종 이야기가 다 튀어나왔다.
어머니가 일본사람이고 아버지가 미국사람이란 것만은 말을 안 할려다가… 그만 다 나오고 말았다.
시원하기도 하고, 벌거벗은 꼴로 남 앞에, 보인 것같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나 강숙의 우정은 변하지가 않았다.
『어떠냐 실망할 것 없어. 너만큼 예뻤으면 나는 고아라도 좋고 아무래도 좋겠다』
『강숙이 너같으면 그런 양부 집에 다시 들어가겠니?』
『나같으면 주는 밥 먹구 다니라는 학교에 다니고 아버지 비위 맞춰 줄테야!』
『나도 그래볼까?』
『학교 졸업 할때까지만 참아!』
나도 은근히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 이튿날 책가방을 들고 강숙과 같이 나섰지만 도중에서 버스를 내려버렸다.
『어디 가니?』
웃으며 나는 음악감상실을 찾아갔다. 그날은 토요일이며 딕슨이 만나자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