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福者(복자)로 모셔야 할 26위 순교사기] (19) 요안 全長雲(전장운)
聖書 板刻 지키다가 己亥군란 때는 背敎 했으나
발행일1963-11-24 [제400호, 3면]
▲요안 全長雲(승연)은 병인년에 순교한 근 1만명이나 될 것이라는 순교자들 가운데 미구에 시복될 영광을 갖게된 26위에 대하여 가장 많은 증언을 남긴 베드루.박순집에 의하면 전 요안은 서울의 「애오개」에서 나서 남문 밖 「이목」에 살았다고 한다. 태중 교우이던 그는 이미 기해(1839)군란 때 잡힌 일이 있으나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그 후 실망한 끝에 교회를 떠나 냉담생활을 계속하더니 병오년(1845) 안드레아 김신부의 귀국을 계기로 회개하여 전 죄과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다시 열심 수계하기 시작하였다. 전 요안은 장주교로부터 성서 출판의 중임을 받은 후 최 베드루와 같이 부지런히 이 어려운 일을 맡아 보았다. 특히 그는 성서 판각(板刻)을 장만하고 사들이는데 열중하였다.
하루는 임 요셉이라는 교우 집에서 판각을 구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요셉은 요안에게 판각을 팔고서는 그 길로 박해를 피해 달아나버리니 요안이 홀로 남아서 그 귀중한 목판 책판들을 지키게 되었다.
피신을 권하는 교우들에게 『천주께서 부르신다면 어디로 가도 나는 붙들릴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이 물건들은 교회를 위해 중요한 것이니 어떠한 욕을 보게 되던 나는 여기 남아 있겠다』 이렇게 요안은 판각을 사수할 뜻을 보였다. 포졸들에게 『너희가 올 줄은 벌써 알고 있었다. 가자!』 하면서 솔선 포도청으로 간 것이 병인년 3월1일이었다.
의금부 감옥에서 다리에 매 30대를 맞은데다 어깨워 다리와 발가락에 동시에 형을 가하는 소위 「채장」이라는 악독한 형을 받았지만 그의 철석같이 굳은 신앙을 굽힐 수는 없었다.
교우들을 대라고 위협하는 말에 『교회법이 금하는 것이니 댈 수 없소. 거처를 대면 그들 역시 나 모양 형벌을 받을 것이니 만 번 죽어도 대지 못하겠오』 대답한 요안은 예수 마리아의 성명을 뇌는 것이었다.
3월10일 요안은 사형 선고문에 묵묵히 서명한 다음 최 베드루와 같이 수레 위에 세운 십자가에 두 손발을 묶인채 형장인 서소문 밖 네거리까지 끌려나가 휘광이의 칼아래 순교의 승리를 거두니 때에 그의 나이 58세였다. 시체는 얼마동안 이리저리 들판에 굴러 다니던 것을 후에 교우들이 「청파배다리」에서 발견하여 노고산에 안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