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프」에서 거행되는 미사는 「스카욷」의 종교교육에 현저한 역할을 한다.
그 영향은 참석자의 개인 인격양성을 훨씬 초월한다. 그것은 자연의 고요를 도우는 침묵의 향수 못지않게 형제적 공동체의 뜻을 그들의 생활에 갖다주는 전례자가 되게한다.
이것은 「알피니스트」의 교황이라 이름이 있는 비오 11세께서 「스카욷」에게 두가지 은사를 베푸신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즉 「캠프」에 동반한 신부에게 고해하고 노천미사에 참여하는 「스카욷」에게 은사를 베푸신 것이다. 이것은 「캠프」의 제대를 둘러싸고 미사가 더 가까이 거행되는 것을 보고 대화 미사로 전례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매우 알맞는 짧은 강론을 듣고 영성체 하는 소년들을 위해 예외적인 발견이 아닐 수 없다.
불란서 「스카욷」회원의 사제 성소를 택한 5천명에 대한 「앙께뜨」에 보면 많은 단원이 「스카욷」
의 미사에서 느낀 바 있어 신학교의문을 두드렸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주시할 수 있다.
한말로 친구와의 생활 가운데 사제를 발견한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고 축성을 하는 거룩한 역할 속에서 그를 발견한다.
「캠프」에서의 종교생활, 특히 미사에 적극적으로 참예하면 전례적 사목의 갱신과 「스카욷」
사이에 자매결연을 해주고 또 그들을 전례 속에 감격적으로 들어가게 한다. 전례운동의 시작은 무엇인가? 정확히 말하기 어렵다. 그럴지라도 그것을 가톨릭 「악숀」에 다소 관계있는 젊은이 운동 가운데 발견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 관계 지도신부들이 「캠프」의 미사를 준비하는데 도와줄 필요가 잇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곳이 능동적인 교육학의 제원칙(諸原則)을 발견하게 하는 장소이다. 사랑과 기쁨의 분위기 속에서 환경과 「제스츄어」와 태도에 많은 관심을 주도록 해야한다.
「캠프」 미사를 통하여 우리는 볼 수 없는 이에게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전례의 정신이다.
그러므로 고요로 둘러싸인 공동체적 「캠프」미사에서 소년들을 신앙의 내적 방향에 도달하도록 해야한다. 평신자들에게 대하여 특히 아이들에게 대하여 그들이 신학적 생활을 할 줄 모르는 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성직자들에게 있다.
자꾸만 말을 하고 노래를 시키지 않으면 그들이 권태를 느낀다고 항상 생각한다. 능동적이요 동시에 내적인 미사 거행의 실현을 위한 큰 원칙은 미사거행하는 동안 너무 많은 해설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비 속에 인도하는 것이란 그것을 명백히 하는 것이 아니요 신앙으로 거기 관통하게 하는 것이다.
신앙으로 건너가는 빛의 방향을 꺼버리는 가장 큰 장애물은 정신을 잠들게 하는 끊임없는 말로 미사 거행을 덮어버리는 것이다.
「캠프」에서 해설은 미사 박에서 줄 수 있다. 첫날밤 지도신부는 종도행전 제2장에 묘사한 초대교회 신자 공동체를 상기시키고 아이들에게 그와같은 공동체를 형성할 것을 말해야 한다.
형제적 사랑이 「캠프」에 환기를 주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성스러운 잔치인 미사가 이 형제애의 최고의 「모멘트」요 영성체는 그 원천이 될 것이라는 것을 그들이 파악하도록 해주어야 할 것이다. 내적 자유를 존경하기 위하여 미사전에 마련된 성합에 제병을 손수 담다두었다가 제현시에 주례자에게 바치는 것이 더 좋다. 독서를 준비해 두었다가 미사중 복사 옷을 입은 자로 하여금 읽도록 하는 것도 좋다.
「제스츄어」에 관한 뜻도 몇마디 해줄 수 있다. 엄위하신 천주앞에서는 자세는 부활자의 「스타일」이다.
「캠프」의 미사는 창조에 대한 감사의 「센티멘트」를 낳게 한다. 지도신부는 이 「테마」에 대하여 알려주기를 좋아할 것이다.
환경이 그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기계적인 세계의 인간이 자연과의 접촉으로 느끼는바 있고 자연이 종교적인 감정을 열어주도록 인간을 도우고 감사의 정을 일이키게 할 때 그것은 현대인의 영혼 속에 종교적인 어떤 서정미를 발견하는 자들에게 놀라움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스카욷」이 미사 끝에 잘 노래하는 피조물의 노래 속에 「캠프」하는 자의 정신을 굳이 결합케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