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政權(정권)에 같은 抗爭(항쟁)한 속셈은?
純粹(순수)한 宗敎紛爭(종교분쟁)?
베트남 政變(정변), 誤報(오보) 많았었다
(編輯者 註=이 글은 6·25동란때 한국전선을 다녀간 일이 있는 NC통신원 오코너 신부의 「사이공」발 기사를 초역한 것이다.
미국 가톨릭신문협회는 기 이사를 포함한 오코너 신부의 「사이공」정변(政變)기사를 가장 확실하고 우수한 것이었다고 칭찬하고 금년도 보도상을 수여했다.)
세계 자유진영의 일익으로서 우리가 대치하고 있는 주요한 상대방이 중공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베트남의 정변이 표면상 종교 분쟁으로서만 「크로즈업」된지 1년만에 그 내면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이번 당 시소령에 대한 혁명재판의 태도와 지난번 석가탄일에 뿌려진 전단(傳單)의 내용 및 그 서명단체의 명목에 세인의 재고를 촉구하는 「포인트」가 뚜렷하다.
교회나 사원을 막론하고 외부에 국기 이외의 종교기 게양을 금하는 금기령(琴旗令)은 공포된 이래 2년간 각 종교가 다같이 준수해 오다가 작년 불탄일(佛誕日) 전날 「후에」시에서 각 사원에 불교기가 게양되었다. 지방당국은 불탄일 경축이 끝날때까지 묵인했음에도 불구하고 5월 8일(음력 4월 8일) 아침에 불승(佛僧) 탁 트리 쾅은 금기령을 불교탄압의 구실로 정부탄핵을 선동했다.
그날밤 흥분한 수천명의 「데모」군중을 거느린 틱 트리 쾅은 방송국을 포위하고 자기 반정부 연설 「테이프」의 방송을 강요하다가 거절되자 군중은 난동의 기세를 울렸다.
도지사의 명령으로 특경대가 출동하여 공포 발사의 위협과 소방차의 사수(射水)와 경장갑차(輕裝甲車)의 배치로 「데모」가 해산되었다. 그러는 동안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두어방 들렸었고 8명의 사망자가 났는데 대부분이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그 폭탄을 던진 인물은 아직까지도 확실히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8명은 탁 트리 쾅이 NC통신원에게 밝힌 숫자이다.
한 미군장교가 검사한 시체 다섯은 뇌진탕 치사였고 정부편이 아닌 독일인 카우프만 의사는 자기가 검사한 시체들은 총탄을 맞아 치사했다고 확언할 수 없다고 NC통신원에게 말했다. 그 당시 특경대 책임자 중 비그리스도교 장교는 하나도 고발되지 않았고 고발된 유일한 가톨릭 장교로서 이번에 종신징역으로 판결된 당 시 소령을 「후에」시의 도부(屠夫)라고 부르는 선동 전단을 뿌렸는데 불교도로만 구성된 현 정부마저 반불교적이라고 고발했으며 「잔인한 미(美)-칸 정권」이라는 낙인을 찍었고 서명단체를 「해방전선」이라고 서슴없이 밝혔다.
작년 불상사가 발생했을 당시 「후에」에는 외국인 통신원은 하나도 없었고 한명의 외국통신원이 그 다음날 「후에」에 갔다가 당일 떠났다. NC통신원은 5월 하순에 「후에」에 가서 수일동안 시내와 시외에서 월남인들과 외국인들을 만나 조사한 진상과는 판이한 다른 보도원들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불탄(佛誕)일에 불교기 게양을 그한 고 딘 디엠 정권에 항의하는 불교도 「데모」에서 12명이 피살됐다.』(뉴스위크 1963년 5월 27일, 7월 15일, 9월 2일, 11월 11일)
『「후에」에서 불교 「데모」 중 정부군은 불교도를 참살했다』는 사설.(뉴욕타임스 1963년 6월 17일)
UPI통신 및 「뉴욕타임스」는 희생자의 수를 9명이라고 수개월동안 주장했다.
『불탄일을 축하하는 「데모」대원 9명을 정부군은 미련하게도 사살했다.』(타임 8월 9일)
AP는 최근에 희생자의 수를 11명이라고 말했다.
『고 딘 툭 대주교 서품 제25주년 기념에는 성당밖에 「바티깐」기의 게양이 허락되었으나 3일후의 불탄일에는 불교기의 게양이 금지되었다.』(타임 6월 14일)
『5월 6일밤 「후에」 시내에 아직도 툭이 초상과 「바티깐」기가 남아있는 동안 종교행사에 국기만을 게양하라는 대통령 지령이 전달되었다. 향교(香橋)의 다리에 가톨릭 장식이 남아있었고… 불교도들은 도전적인 깃발을 들고 삼판으로 강을 건넜다.』(리포터 9월 12일) 위와 같은 보도들은 단순히 사실이 아니었다.
툭 대주교는 6월 28일-29일에야 서품 제25주년을 기념했다. 그는 5월 1일은 「다낭」에, 5월 3일-5일은 「달라트」에, 5월 5일-6일은 「사이공」에 있었다. 1962년 8월 이래 「후에」에서 「바티깐」기가 게양된 일이 없었다. 그리고 그 다리에 가톨릭 장식도 없었다.
이러한 일류 통신원들의 오보 때문에 UN에서 당시의 베트남 정부는 인권선언 제18조 위반으로 비난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한국의 신문들도 그와 비슷한 논조를 띠웠고 특히 가톨릭에 대한 불교도의 반감은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국내의 사건들도 「메스콤」만을 통한 판단은 흔히 정확할 수 없음과 같이 베트남의 소위 「종교분쟁」만은 외국통신만으로의 판단이 그릋졌음을 이제야 알겠다.
최근 당 시 소령의 증거와 상부되지 아니한 판결 직후에 가톨릭 평신도의 「데모」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분열된 분자가 섞여 들어 가톨릭 「데모」의 취지와는 정반대되는 「슬로간」을 걸고 행렬을 따라가다가 격투끝에 물리쳤다는 보도가 왔다.
틱 트리 쾅은 불교 각 종파 연합위원회를 조직하여 그 총장이 되어 작년 4개조항의 요구 가운데 금기령만이 해결 되었다고 불평하면서 최근에 다시 7개 조항의 항의를 내걸었다. 『고원지대의 피난민 정착촌에서 불교도 박해가 아직도 남아있음은 무슨 이유인가?』 『무슨 이유로 불교도 대학생들은 투망작업식으로 군대에 징용하는가?』 등등.
그러나 불교의 일파인 「코 손 몬」종(宗)만은 작년의 사건에 가담하지 않았고 초연했던바 틱 트리 쾅은 동종(同宗)의 「성황」을 반대하고 있다. 현 베트남 정부의 요인은 비그리스도교신자들이며 국가원수 동 반 민 중장 및 국무총리 「구에」 칸 중장은 불교도들이다.
지난 4월 26일 국가원수와 국무총리는 건축비 1백만 「달라」의 「국가」 사원의 정초식에 참여하였고 그 대지는 정부가 기증한 것이었다.
현 정권은 불교만이 희사를 받을 수 있고 다른 종교는 기부받는데 국가의 허가가 필요하다. 그런데 불구하고 틱 트리 쾅의 현정부를 전 정권이나 다름없이 반대하는 저의가 무엇일까? 그가 자기의 추종자로서 선동하는 대상은 불교도인 것만은 뚜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