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平信神學(평신신학)] (58) 聖典禮(성전례) ③ 그리스도교의 제사 미사 (上)
발행일1964-06-21 [제427호, 2면]
『멜키세덱의 계차(階次)에 따라 영원한 사제인 주 그리스도게서는 그가 배반을 당하던 저역 최후의 만찬에서 세상에 살고 있던 그의 친척들과 제자들을 사랑함에서 그리고 그의 사랑하는 배우(配偶)인 교회에게 사람들의 본성이 요구하는 가견(可見)의 제사 즉 십자가 위에서 한번 제헌된 유혈(流血)의 제사를 대신할 수 있고 또 세상의 종말까지 이(유혈의 제사)의 기억을 계속하고 우리가 매일 범하는 죄를 사하는데 이(유혈의 제사)의 유익한 효능이 적용되기를 원하며… 천주 성부께 떡과 포도주의 형상 아래 그의 살과 피를 제물로 바쳤으며, 그때에 신약의 사제로 선정하신 종도들에게 이(유혈의 제사)에 참여하기를 허락하셨으니 그는 이들과 사제직에 있어서의 이들의 후계자들에게 동일한 제물을 바칠 것을 명령하셨다.』(성전례에 대한 회칙 67).
■ 해설
사랑하는 자녀들로서 우리는 천주성부께 선물을 올리기를 원한다. 그러나 전능의 천주께 올리기에 적합한 것을 어디서 구할 것인가? 우리들이 먹는 음식물, 우리들이 입고 있는 의복, 우리들이 소유하는 것 중 가장 보배로운 것, 우리들의 생명 자체까지도 이미 그의 것들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우리는 타락한 민족이며, 천주의 폐적(廢嫡)된 자녀들로서 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성부로부터 소원(疏遠)되었었다. 그리스도의 이전에 사람들은 천주께 선물을 올리기를 원했었다. 그러나 그들이 바칠 수 있는 선물은 오직 땅에서 나는 과실과 산야의 짐승들이었다. 이러한 것들이 어떻게 속죄할 수 있었으랴! 백성들의 이름으로 이러한 선물을 올렸던 제관들 역시 타락한 민족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천주께 선물을 올리기에 합당한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천주께 선물로 올릴 만한 가치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께서는 구약에 있어서 그의 백성들이 올린 선물을 받았었다. 그 이유는 이 선물을 통해 그는 장래에 완전한 사제에 의해 올려질 완전한 선물을 보셨기 때문이었다.
완전한 선물은그리스도 자신으로서 천주의 성자가 십자가 위에서 그에게 제헌할 것이었다.
그리스도게서는 한번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그의 성부께 제헌하셨다. 그는 간단없이 우리들이 지금 참여하는 미사 성제에서 즉 「갈바리아」의 그의 제사의 재봉헌(再奉獻)에서 자신을 계속 봉헌하고 계신다.
①제사는 무엇인가?
제사는 천주께 공식으로 선물을 올림이다. 제사에는 선물을 봉헌하는 사제와 희생이라고도 하는 선물이 있어야 한다. 제사에닌 가끔 제사에 참여하는 표와 봉헌하는 자들의 일치의 표로 제물을 먹는 것도 한 요소로 포함된다.
②왜 우리가 천주께 선물을 올리는가?
우리들 자신을 천주께 바치는 뜻으로 그에게 선물을 올린다. 그러므로 선물은 우리들 자신을 대신하는 것이다. 우리가 천주께 우리들 자신을 바치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천주를 우리와 모든 것의 최고의 소유자이심을 승복하는 것이다.
③인류는 언제나 천주께 선물을 바쳐왔는가?
그렇다. 아담과 에와의 아들들이었던 가인과 아벨이 천주께 선물을 올렸다. 노아가 홍수 끝에 배에서 내려와 제사를 올렸다. 구약의 유태인들은 천주께서 그들에게 명하신대로 여러가지 제사를 올렸었다.
④그리스도 이전에 천주께 올렸던 제사에 부족한 것이 있었던가?
구약의 사람들은 짐승 곡물 과실 유향가 같은 조물에 속하는 보통 것 밖에 천주께 봉헌할 수 없었다. 그들은 제사에서 자신들을 천주께 봉헌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제사를 올리던 사제들 역시 죄있는 보통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제사는 속죄하는 힘이 없었다. 천주의 무한한 정의를 거스린 죄를 기워갚기 위해서는 무한한 가치가 있는 제사가 요구되는 것이다.
『나는 너의 집에서 오는 송아지도 네 양떼 중의 수염소들도 받지 않겠노라. 실상 수풀의 맹수들이 모두 나의 것이요, 천가지 짐승들이 나의 산들에 있도다. 나는 하늘의 온갖 날짐승을 알며, 들에서 움직이는 것도 나의 아는바로다. 세상과 그를 채우는 것이 내것이고 보니, 내가 시장하다 손치더라도 너에게 말하지 않겠노라.내가 황소들의 살고기를 먹을 것이뇨? 또는 수염소의 피를 마실 것이뇨?』(성영 4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