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27) 고적감 ⑤
발행일1963-11-24 [제400호, 4면]
아침의 밝은 광선, 그것이 싫다. 나는 「뮤직」홀의 컴컴으레한 속에 몸과 혼을 자리잡고 싶었다. 강숙이한테서 입장료 값은 얻어둔 것이 있다. 버스에서 내려서 충무로로 가는 길은 학교로 직장으로 가는 남녀의 대열이 물결치고 있다. 나만은 그 대열에서 떨어진 존재이다. 「뮤직홀」에 가니 시간이 일러 아직 문을 열지 않아 충무로 상가를 한바퀴 돌다가 들어갔다.
파랑과 붉은 「라이트」가 양벽에 교차로 켜진 홀 안의 인위적인 저녁 분위기 속에서 내 존재와 내 인생을 그 속에 눕히듯이 의자에 몸을 던졌다.
『너는 박쥐같이 어둠을 찾아왔구나?』
비판적인 내 반신(半身)이 이렇게 비웃는다.
『밝은 햇빛은 나를 찌른다.!』
약한 내 반신이 자기 변명을 한다.
『어둠이 좋다는건 핑계고, 정말은 딕슨인가 그 양키를 만나러 온 거지?』
짓궂은 반신은 다른 반신을 잡아 흔든다.
『「뮤직홀」이기에 온거야』
『다른 장소라면 그를 만나러 안왔을 거란 말이냐?』
『물론!』
『침발린 거짓말 그만 둬라, 네 컴컴한 속을 내가 안다. 양키가 만나자고 하니 온 거지 뭐냐?』
『……』
가을철 수숫대 꼭지모양 나의 반쪽 분신(分身)은 수그러든다. 이윽고 가냘픈 그 반신이 강철모양 반발을 한다.
『그래. 딕슨 땜에 왔다. 그러니 어쩌란 말이냐?』
그 바람에 비판하던 분신(分身)의 그림자는 멀리 달아난다. 그리고 침묵에 잠긴다.
약한 분신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그가 나를 어디엔지 멀리 데리고 가 주었으면 좋겠다. 손가락질을 안 받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좋아 무인도도 좋고 산상봉도 좋고 뱀이 나오는 밀림지대라도 좋아…』
고막으로 흘러들어오는 「심포니」의 화음은 유수한 골짜구니로 나의 혼을 이끌고 간다. 거기에는 국민학교에 다니던 철없던 시절의 「이매지」가 떠오른다. 그리움으로 나는 그 시절을 바라본다. 학교 숙제 걱정이나 하고, 동리 아이들과 고뭇줄 넘기에 이길 궁리를 하고 양부모를 친부모로 믿고 지내던 그 시절이 그립다. 어느덧 나는 반수반각(半睡半覺) 어스름한 꿈길을 헤매고 있었다. 간ㄴ밤에 늦게까지 자지 않고 얘기했으므로 졸렸다.
문득 눈을 떠보니, 바른편벽에 걸린 보름달형 전기시계가 열두시를 가리키고 있다. 딕슨이 약속한 시간은 두시인 것 같이 기억된다.
『딕슨이 「데이트」를 청할 때 너는 속으로는 「노」하지 않았느냐?』 비판적인 반신이 다시 나타난다.
『정말, 그 때는 장난삼아 그와 얘기했을 뿐이었어!』
『잘못하다가 뭇놈 양키한테 노리게감이나 되면 어떡할테냐?』
『그런 눈치가 보이면 안 만나면 그만이지!』
『약간의 친절과 약간의 돈으로 너를 달콤하게 꾀일지 모르니, 정신을 차려야 한다! 잘못하다가는 너도 아름답지 못한 양공주라는 대명사를 뒤집어쓰게 된다.』
『그따위 자식 믿지는 않을테야. 적당히 이용하는 거야. 나 편리한대로!』
『어떻게?』
『양키촌에 취직이라도 시켜달래 볼까? 그것도 안되면 말이나 좀 배우고, 점심이나 얻어 먹는거야…』
『거지냐, 점심을 바라고 이런데까지 오게?』
『…………………』
나는 몹시 우울해졌다. 시간을 보니 어느덧 한시간반이다. 그가 오기 전에 나가버릴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생각은 몸을 일으키려고 하나, 몸은 의자에 눌어붙어있다. 아침을 먹었건만, 배 안은 영화가 끝난 극장 안 모양 텅 빈 것 각ㅌ다.
가방 속에 도시락이 들었을 때는 웬만큼 배고픈 것은 잊어버렸었는데 배도 수중에 돈 없는 걸 아는 눈치다.
내 몸은 두 시가 되도록 그대로 앉아있었다. 두 시 오분이 되니 딕슨같은 호리호리한 군복 그림자 하나가 입구에서 머뭇거리다가 이쪽으로 온다.
나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고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자세로 있었다.
『네가 미스양 아닌가?』
하는 소리가 영어로 들린다. 나는 비로소 안 척을 하고 그에게 미소를 보냈다.
『언제 왔느냐?』
내 옆에 앉으면서 그가 묻는다.
『조금 전에…』
딕슨은 단정히 앉아서 음악에 귀를 기울인다.
『밖으로 나갈까?』
내가 말했다.
『내가 원한다면?』
나는 일어나서 먼저 나갔다.
『어디로 가겠느냐?』
한길에 나오자 그는 상냥한 표정으로 묻는다.
『네가 원하는대로 가자!』
『남산 위에 아직 못 올라가 보았는데 거기 올라가는 것이 어떠냐?』
『좋다!』
하면서 그를 따라가기는 했으나 남산 비탈을 올라갈 생각을 하니 따분하다.
(자식 저는 밥을 쳐먹었나 보지!)
그가 남산 중턱에서 큰 건물들을 가리키며 저건 뭐구 이건 뭐냐고 일일이 물을적에 나는 대답은 하면서 속으로는 배고픈 생각만 하고 있었다.
내가 왼쪽 차도 옆으로서면, 그는 얼핏 와서 나를 바른쪽으로 바꿔 세운다. 그것은 충무로 쪽에서 남산으로 오는 도중에서도 늘 그랬다.
『내가 자동차에 치일가바 그러느냐?』
『이것은 여자에 대한 하나의 「에치켙」이다! 우리는 「하이스쿨」에서 배웠다!』
『「하이스쿨」에서 그런것까지 가르치냐?』
『물론 「하이스쿨」에서는 실생활의 예절에 관해서 많이 가르친다!』
이밖에도 딕슨은 약수터 근방에서 팔각정 있는 산상봉을 올라가는 급한 비탈을 오를 때에 반드시 위험한 곳은 자기가 앞서 올라서 손을 내밀었다. 나를 끌고다니는 것이 아니고 나를 보호하면서 다니는 자세였다. 나는 올라올 때의 배고픈 것도 잊고 어쩐지 흐뭇한 기분이 생긴다. 머리채를 잡아 끌던 양부의 손길에 비해 얼마나 부드러운 손길이였으랴.
내려올 적에는 장춘공원으로 빠지는 한적한 「드라이브」 「코스」를 천천히 걸어 내렸다.
『저녁 때까지 나는 시간이 있는데 계속해서 나와 함께 놀 수 있겠느냐?』
자색 어린 파랑 눈에 미소를 담고 묻는다.
『좋다』
『책가방을 들어서 불편하지 않겠느냐?』
『책가방은 집에 갖다두고 올 수도 있다』
『그럼 택시를 잡을테니, 타고가는 것이 어떠냐?』
『좋다…』
마침 팔각정에서 빈 택시가 한 대 내려오는 것을 붙들었다.
『괜찮겠느냐?』
양키를 경계하는 분신이 이렇게 속사긴다.
『나는 차츰 그가 좋아진다….』
차가 한길을 지날 때 힐긋보는 눈들이 있다. 남자 학생의 눈도 있고 여자 학생의 눈도 있다.
나는 얼굴을 일부러 감추려고 안 했다. 선생님이 보아도 그만이라는 체념이 생긴다.
강숙이네집 근방에 차를 세워놓고 들어가서 책보를 놓고 투렁크 속에서 「세타」와 「스카트」를 꺼내 가라입고 「넷카치후」로 머리와 볼을 싸고 나왔다.
동리 어른과 아이들의 시선이 양키와 같이 택시를 타고 가는 것을 유심히 쏘아본다.
아무래도 좋았다. 택시는 미아리 고개를 넘어 교외로 달렸다.
교외로 가자고 한 것은 나였다.
차가 도봉산 근ㄴ방에 왔을 때 운전사가 어디 가느냐고 묻는다.
『자꾸 자꾸 더 갑시다…』
나는 말했다.
『어디간다고 그랬느냐』
딕슨이 묻는다.
『곧장 자꾸 가자구 그랬다! 택시 값은 충분하냐?』
『염려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