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신앙의 광명인 마음 불태우고
발행일1964-06-21 [제427호, 4면]
쓸쓸함과 어두움이 사방에 휘몰아치는 늦가을, 들판에 서게되면 영혼은 고요하게 죽어가는 공간과 아울러 고독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순간 영혼은 은신하고 의지할 곳을 사방에 찾지만 막상 이런 곳은 있을 상 싶지도 않다. 벌거벗은 나무, 차디찬 언덕, 텅빈 들과 살풍경 밖에는 만나는 것이 없다.
그래도 이런 광야에 홀로 살아 있는 것은 불꽃뿐이다. 고갯길을 넘어서면서부터 불빛이 비치기 시작하고 찾아헤맨 보람 있어 생기를 되찾은 희열에 잠기기도 한다.
또 어떤 땐 방에 혼자 있으면서 쓸쓸하게 지내게 되는 때도 있다. 이런 때는 흔히 벽은 재빛으로 죽어있고 가구들만이 묵묵히 지켜보는 가운데 쓸쓸하고 한적하게 늘어지는 초저녁이다. 이러다가도 갑작스레 동부의 발자국 소리가 나면 재빨리 불을 돔구고 빛을 내서 훈훈한 열기가 방언을 감돌게 만든다. 모든 것이 환하게 변하며 마치 혈색을 잃었던 얼굴에 생기가 돌며 붉은 빛이 되살아나듯이 한 영혼을 맞아들이기에 적절한 분위기로 화한다.
불은 생물과 두터운 인연을 맺고 있다. 붗꽃은 우리 영혼의 가장 순수한 상징이다. 뜨겁고 밝으며 항상 움직이고 항상 높이 뛰어 오르고 있다.
어떤 땐 바람을 만나 옆으로 흔들릴 망정 뛰어 오르고자 하는 열망에나 열을 발산하는데 있어서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
볼꽃과 우리 안에 끊임없이 타오르는 신앙의 광명 사이에는 크나 큰 유사점을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 마음 속 깊이 불타는 신앙도 원수들의 공격을 받아 불굴하는 그의 상승 경향에도 불구하고 쪽쪽 곧게 피어 오르지 못하고 구불구불 구부러지고 있지 않은가? 또 모든 사물을 비추며 생기 있게 하고 변모하는 불꽃은 모든 이의 시선을 끌고 있다. 우리 마음 속에 타는 신비로운 불꽃도 우리에게 생기를 주며 세상을 개조해서 새로운 의의를 깨닫게 만든다.
불꽃은 한마디로 우리 정신뿐 아니라 우리 신앙의 빛이나 힘의 모상인 것이다. 또 불꽃은 성체불로도 되어 우리가 조금도 떠날 수 없는 그분 앞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타면서 그 불의 현존 앞에 우리는 갖은 힘과 정성을 모아 지키고 서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천주님은 한시도 우리를 떠나시지 않으시며 우리를 굽어 보시는데 우리가 그를 떠난대야 말이 되는가? 이상(理想)은 이렇지만 그러나 우리 생활 안에서는 이상과 현실이 너무도 까마득하게 떨어져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 생명의 상징이요 모상인 불꽃은 제대 앞에서 항상 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이런 이상은 얼마간이라도 실현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따금 제대 앞에 타고 있는 등잔불은 우리 자신의 모상이란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 불은 우리 각자의 영혼을 대신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명심해야 하겠다.
우리 영혼이 성체불과 함께 감실 앞에서 타고 반짝여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영혼은 참으로 행복한 영혼이다. 이런 영혼은 묵묵히 타고만 있는 성체불을 바라보고서 마음의 깊은 정서를 천주님께 바치기도 한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우리도 노력해 보자! 이따금씩 제대 앞에 나와 눈을 익히보고 깊은 침묵에 잠긴 다음 일터로 돌아오기로 하자.
성체불을 가리키며 속으로 『주여 이는 내 영혼이로 소이다. 내 영혼이 당신을 떠나지 말게 하여주소서』하고 외쳐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