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우리가 그의 4백주년을 경축하는 윌리암 셱스피어는 무신론자로 혹은 적어도 회의주의자로 또는 청교도로 「앙그리칸」(성공회신자)으로 그리고 로마가톨릭 신자로 생각되어 왔다. 이 일의 진상은 무엇인가?
그처럼 광범하게 다르고 모순된 가설에로 이끈 원인들을 우리는 간단히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자주 사용한 이교적인 그리시아 및 로마의 신화 - 그리고 그 자료가 포함하는 교훈을 중시하는 일부인 사는 그가 사상적으로 이교도였다고 주장해왔다.
많은 작품들이 이교도적인 인생관을 보여준다고 생갇되는 것이 사실인 동시에 바로 그 동일한 작품들을 게밀히 검토하면 많은 그리스도교적 요소들이 내포되었음을 볼 수 있다.
보이는 그대로 괴상하게도, 청교도였다고 증명하려는 시도가 더러 있었다. 청교도에게 파문이 되는 가톨릭 교리에 대한 그의 계속적인 언급을 들지 않아도 그의 작품들 안에서 청교도들에 관한 여러가지 풍자적인 비판으로 보아 이 이론은 유명한 학자들에게 진지하게 다루어진 적이 없었다.
그가 「앙그리칸」이었다는 견해가 최근까지 대다수 학자들의 견해였다. 유리한 증거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와 동시대의 기록에 그가 국교를 기피하는 가톨릭신자로서(CATHOLIC RECUSANT) 기록된 데가 하나도 없다. 둘째로는 그는 「앙그리칸」교회의 허가로 결혼하였고, 「앙그리칸」교회 안에 묻혔다.
당시 확대중인 박해 아래서는 자녀의 출생과 영세를 공식으로 등록하며 교회 당국과이 시비를 피하는 유일한 길은 국법에 순응하여 출생신고와 영세 등록을 국가 교회 안에서 해야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상기해야 한겠다. 결혼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가톨릭과 「앙그리칸」 쌍방이 다같이 그 당시의 교회 뜰 안에 묻혔던 만큼 이것은 그의 종교를 표시하는 것도 아니다. 마지막으로 셱스피어는 「프로테스탄」 강론의 설교를 위하여 유언으로 돈을 남기는, 영국교회의 교구위원으로서의 행위 등 자기의 「프로테스타니즘」을 결정적으로 기록에 두었을 여러가지 수속들 가운데 어느 한가지도 밟지 아니했다는 사실은 주의를 끌만하다. 그는 자기 유언에 어떠한 「프로테스탄」의 감상도 나타내지 않았다.
어떠한 가정(假定)을 위한 것보다 셱스피어가 「가토리시즘」을 지지한데 더 많은 증거가 있다. 그러나 끝까지 로마의 교회에 대하여 충실했던 그의 모친과 부친의 좋은 표양에도 불구하고, 셱스피어 자신은 이네들과 같은 부모가 의심없이 그를 교회안에서 엄격하게 길렀을지라도 자기 부친의 운명을 나누지 않기로 결심했던 것 같이 보인다.
그는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따라갔던 쉬운 길을 택하여 적어도 비검하게 국가가 명하는 「앙그리칸이즘」에 순응했다. 「런던」서 그는 아직도 가톨릭 신자들과 내왕했다. 그의 문학적 보호자는 「사잠프톤」의 가톨릭 영주였고 그의 가장 친밀한 직업상 친구요 동료인 연극가 벤 죤슨은 가톨릭 신문교우였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는 자기 작품 안에서 옛 신앙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 이 모든 견줄 데가 없는 시적 창작 안에 그의 가톨릭적 사상이 거듭 거듭 그 자체를 나타내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하여 어느 평론가는 이렇게 썼다.
『그는 교파적 논쟁을 무대 위에 옮겨 다 심기에는 멀다. 바깥으로 나타나는 외관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어디서나 사건의 심장에로 갔던 그와같은 시인은 종교적 진리를 들기를 피할 수가 없었다. 무수한 귀절 안에 그는 종교와 양심, 신앙과 기도, 전례와 성사에 닿았다. 자료와 인물의 선택에 있어 그리고 그 시적 안배에 있어 그가 다방면인 것과 똑같이 그는 세계의 인류와, 그 운영에 대한 그의 이상주의적인 견해에 있어서도 결정적이며 조화적이었다. 그가 하는 말은 서로 착잡하지 아니하나, 우리가 의심없이 그의 고유한 신념의 기본적 「아우트라인」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독립자족한 체계를 형성한다. 그는 자기 자신이 친히 말하는 일이 없는 것이 사실이나 그는 자기의 극적 창작 안에 완전히 동화되어 있다. 이러한 일들이 그의 고유한 내심적 태도를 반영함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미리 생각하는 일이 없이 그는 자기작품 안에 어떠한 불순물이나 보류가 없이 자기 자신을 그려낸다.』
이 자기 계시가 자기의 「가토리시즘」을 솔직하게 가리킨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가톨릭 신자들과의 우의와 더불어 자기 생애의 마지막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가토리시즘」을 터놓고 고백하지 않았다. 안그랬더라면 지금 살아 남은 이론(異論)이 많고 국교를 반대하는 기록들 안에 있는 그에게 어떠한 언급이 있었을 것이다.
죤 번부로크(영문학 전공 철학박사, 서강대학 영문학교수, 예수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