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요안 23세가 서거한지도 어언 일년이 지났다. 당시 전세계는 무한한 애통에 잠겨있었다. 동시에 베드루의 후계로서 새로이 선출되실 교황은 과연 이 작고하신 분의 거대한 세계교회운동의 정신유산을 계승할 것일지 아닐지 하는 여러가지 모양의 억측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지난초순 돌아가신 요안 23세의 일주기를 맞아 짧은 세월이었음에도 새로운 세기(世紀)를 만들었던 이분을 위한 추도는 「로마」 「성베드루」성전을 위시하여 전세계 방방곡곡의 가톨릭교회에서 바쳐졌던 것이다. 교황의 고향 북이태리 「벨가모」에서는 5만의 주민이 이분의 시복(諡福)을 위한 진정서에 서명날인했다 하며 기타의 이태리 각 교구에서도 유사한 진정이 제출되었다 한다. 뿐만 아니라 금년 9월에 「바티깐」 공의회 제3회기가 소집되면 전교부들의 공식선언으로써 이분을 시성하도록까지 제의되었다 한다.
교회가 이분을 가까운 장래에 성인품에 올릴지의 여부는 우리로서는 아직 단언키 어렵다 할지라도 이 소박하면서도 아버지 같이 어질고 만민을 사랑으로써 포옹하였던 요안 교황은 가톨릭신자들의 마음안에서는 이미 성인품에 오르신거나 다름없다. 이와함께 또한 확실한 것은 이 교황의 대를 이은 바오로 6세도 그 성품이나 경력에 있어 선임자와 크게 대조적임에도 불구하고 그 정신과 생활에 있어서는 아주 가깝다는 것이다.
요안 교황이 선출되었을 때는 그는 이미 76세의 고령이었다. 그때문에 많은이가 그를 과도기(過渡期) 교황으로만 보았다. 그러나 이와같은 인상은 미구에 살아질 수 밖에 없었으니 그는 교회의 문을 참신하고도 희망에 부풀어 오르는 새로운 세기를 향해 열어 제쳤던 것이다 요안 교황이 4년 7개월 6일이라는 짧은 세월에 이룩한 업적과 특히 분리된 교회들과이 관계에 있어, 한 카나다 신교지도자는 그를 가리켜 『「프로테스탄」신자들이 지금까지 가질 수 있었던 가장 좋은 교황이었다.』고 평하였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바티깐」 공의회에 「프로테스탄」 각 교파와 정교회들을 「옵서버」로서 초대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일치국을 설치함에서였다.
「어머니와 교사」, 「지상의 평화」, 일찌기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만큼 전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 두 큰 회칙을 통하여 노(老) 교황은 먼 장래에까지 미칠 정치적 경제적 개선을 위한 의롭고 타당한 사회질서를 세상에 수립할 수 있는 지침을 남겼다.
그의 서거 일년후인 오늘, 요안 교황은 아직도 두가지 모양으로 세상에 살아있다.
그의 후계자인 바오로 6세를 통하여, 또한가지는 그의 생활의 영감과 교회통일을 찾는 길에 있어서의 그리스도교 안에 이러우진 우호적 분위기를 장만함으로써이다.
요안 교황이 운명한 다음날 오늘의 바오로 6세, 당시의 몬띠니 추기경은 『요안 23세』의 무덤은 그의 유업을 함께 유폐(幽閉) 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과연 바오로 6세는 등극한지 불과 수일에 제2차 바티깐 공의회를 계속할 것을 언명함과 동시에 『이는 가톨릭 교회의 구속활동에 있어서 새로운 진로를 향해 문을 연 것이다.』고 선언함으로써 일체의 기우를 씻게 하였다. 많은 이가 요안 교황을 일러 『천주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 요안 세자와 흡사하다고 한다. 여러가지 기회에서 말한 것을 미루어 보다 바오로 6세는 그러한 선임자의 꿈과 포부를 충분히 현실에 옮기려고 의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서슴치 않고 비가톨릭 그리스도교파들을, 통일을 위한 대화에 초대하였다. 그에게서도 역시 그의 선임자에게 볼 수 있었던 것과 같은 건설적이요 적극적인 의견과 복음의 말씀을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옮기고자 하는 같은 원의를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비그리스도교국(局)을 설치함으로써 요안 교황에 의해 밝혀진 세계교회운동의 불꽃은 더욱 확대되어가고 있다.
이 새로운 기구를 설치함에 있어 그는 교회의 보편성을 강조하면서 『모든 민족은 세계공동체의 복지를 위해 합치되어야 하며 어떠한 형식의 민족주의든지 용납할 수 없고 어떠한 체재의 전체주의도 그의 비인간성이 폭로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바티깐」 공의회 제2회기 마감에서는 성전례(聖典禮)에 대한 규범이 선포되었다. 이로써 요안 교황이 공의회의 제일의 목표로 바라보았던 교회 혁신의 첫 단계가 이루어졌다.
그는 또한 그의 선임자도 원하긴 했으나 감히 그 뜻을 이룰 수 없었던 성지순례를 실행하였다. 그당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희랍정교회 아데나고라스 총주교와의 회견은 그것이 5백년만에 처음 있었다는 역사적인 의미로써만도 가장 큰 세계교회운동의 하나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요안 교황은 진취적 인물이었다. 그이 후계자 또한 이에 못지 않는 진취성을 가졌다. 그 비근한 예로써 우리는 화장(火葬)에 대한 금지령 제거와 영성체에 있어서의 새로운 경문 양식을 규정한 것은 그만두더라도, 교황에게 대한 존칭의 간소화, 동방교회성성 기구 확장, 평신도대표의 공의회 참여 등 여러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앞서 작년 7월에는 러시아 정교회 알렉시 총주교의 은경축엔 주교일명을 대표로 파견하는데 동의하였고 또한 미국 및 카나다에서 개최되었던 「프로테스탄」 교회의 중요한 국제회합에 가톨릭대표를 참가시키는데 인준하였다.
바오로 교황의 부드러우면서도 견실한 성품은 「바티깐」 공의회 제3회기에 있어서 더욱 잘 드러나게 되리라고 기대되고 있다.
공의회에 있어 지금까지 가장 많이 논의된 주교들의 합동성(COLLEGIALITY)에 대하여 그가 분명 지시할 것은 여러면에서 예측되고 있다.
세계는 이제 공의회가 종교의 자유를 지지하는 선언과 반유태인 사상을 배격하는 선언을 공식으로 내릴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이와같은 선은들은 확실히 전세계적인 반향과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바오로 6세는 본래 변호사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또 학자적인 자질과 성품을 타고난 인물이다. 이점에 있어 그는 비오 12세와 흡사하다. 그러나 그는 그의 선임 요안 교황을 본받아 비록 그의 본성으로서는 온종일을 연학에 몰두함이 쉽다할지라도 모든 민족과 모든 종교와 모든 계급이 누구와도 만나기를 더 원하고 있고 또 그렇게 살고있다. 그는 요안 교황 모양 병원과 감옥을 방문하고 있다. 그의 귀족적이요 학자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다 그에게서 따뜻한 자부적 사랑을 감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참으로 오늘의 세계와 오늘의 인간을 이해하고 있다. 그는 역시 요안 교황처럼 세계의 주임신부로서 살기를 무엇보다 간절히 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가장 큰 사명은 이 지상에 있어서 우리 그리스도의 대리자되는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RNS 通信 編輯室서 要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