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福者(복자)로 모셔야 할 26위 순교사기] (20) 서울 會長(회장) 지낸 말구 丁義培(정의배)
산 聖人으로 追仰받아
발행일1963-12-01 [제401호, 3면]
말구.정의배 「丁義培」는 본시 경기도 용인의 외인 부모한테서 나서 영세 입교하기는 그의 나이 40세를 훨씬 넘은 1840년 무렵의 일이다. 고주교로부터 서울회장으로 임명된 이래 죽을 때까지 그는 말과 표양으로써 가장 모범적인 회장의 책임을 다하였다.
『그는 산 성인이야!』 『벌써 천당 갈 준비가 잘 되어 있어!』 이렇게 경향 각지의 교우들 뿐만 아니라 주교님과 신부들까지도 그의 성덕을 감탄하여 마지 않았고 그를 깊이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지나친 겸손에서 하루는 미사에 참례하러, 감히 방에도 못 들어가고 문전에서 크게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만 있는 정회장에게 『이게 무슨 짓이오, 어서 미사에 참례하시오.』 주교는 그를 꾸짖은 적도 있었다. 여하트 그의 겸손은 이렇듯 놀라운 것이었다. 그에겐 자식이 없었으니 결혼 중에서도 동정을 지킨 것이 아닐까? 그는 서울 남대문 밖 신동이란 곳에 살고 있었다. 1865년 새로 입국한 젊은 백신부를 모시는 한편 모여드는 교우들을 친절히 가르치며 그들에게 늘 치명자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는 것이었다. 마침 반가운 박해의 소식이 들리자 그는 옷을 차려 입고 신까지 신고 매일같이 포졸이 오기를 고대했다. 병인년 2월25일 포졸들이 그의 집을 습격 그를 쉽게 체포하여 먼저 구륫간에 가두었다. 의금부로 구륫간으로 끌려다니며 교우의 두목이라고 해서 남달리 혹형을 받았고 다른 교우들을 대라는데 응하지 않으므로 더욱 혹형을 가했으나 그는 용맹히 참아 이겨 냈다. 정회장은 신신부, 박신부, 우 아릭수와 더불어 군문효수의 선고를 받고 선고문에 아무 말 없이 수결하였다. 사형장은 물론 새남터로 지정되었다. 3월11일 이윽고 사형장에 이르러 군문효수의 관습을 따라 군사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양편 귀에 화살을 꿰뚫어 꽂고 얼굴에 물을 뿌리고 회칠을 한 후 에워싸고 도는 군사들의 칼을 네 번 받고 참수치명하였다.
그는 늘 순교를 몹시도 원했고 만반 준비를 갖추고 있던 그는 이렇게 숙원의 순교의 영예를 차지하고만 것이다. 때에 그의 나이 약 71세였으니 금번 시복될 26위 중에서 뿐만 아니라 새남터에서 사학(邪學) 괴수의 극형을 받은 이들 중에서도 최고령자가 되는 것이다. 그의 시체는 이영식이란 교우가 임시로 묻었던 것을 추후에 교우들이 찾아 노고산에 다시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