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28) 주린 사랑 ①
발행일1963-12-01 [제401호, 4면]
도봉산을 지난지도 근 한 시간은 되었을 것이다. 잘 닦인 아스팔트 도로를 차는 질주한다.
『어디까지 가느냐?』
흘러가는 농촌 풍경을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딕슨이 묻는다.
『금곡이란 곳에 임금님의 무덤이 있다. 글루 가는 것이다.』
나는 얼마 안 가면 금곡능에 닿을 것을 생각하고 이렇게 대답했다.
『너의 나라는 그 전에 임금님이 있었느냐?』
『그렇다. 일본 식민지가 되기 이전에는 군주제의 나라였다. 나라가 망하기 전의 마지막 임금님의 묘가 거기 있다』
『너는 애국자이구나?』
『……』
나는 속으로 웃었다. 그는 내가 처음부터 그곳에 목표를 두고, 지나간 세월의 임금님을 추앙하기 위해서 가는 줄로 아는 모양이다. 금곡은 국민학교 오학년적에 학교서 소풍간 일이 있었다. 그 때 능이라는 것을 처음 보았다. 집더미보다 큰 묘시설과 그 앞에 문관 무관들의 석신상(石人像)이며, 동물 석상(石像)들이 있고 삼면으로 부드러운 경사면에 쫙 깔린 잔디가 우아, 고담하기 그지 없었다. 그것보다는 한적한 그 능잔디 비탈에 앉아서 조용한 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능을 본 딕슨은 매우 좋아했다.
그는 좋은 구경을 자기에게 시켜 주었다고 입가에 미소를 담았다. 마침 그날은 노는 날도 아니고 날씨가 쌀쌀한지라 능을 찾는 소풍객도 없었고 광활한 능 안에도 우리 두 사람과 또 한 쌍의 남녀가 있었을 뿐이었다. 양장한 20세 가량되어 보이는 처녀와 키가 후리후리한 신사복을 입은 청년인데 그들의 오손도손한 회화로 미루어 아마도 사랑하는 사이인 것 같았다.
우리는 이쪽 비탈에 앉았고, 그들은 저쪽 비탈에 앉았다. 그들은 미리 이곳에 올 목적으로 준비를 해 온양 남자가 메고 온 노랑빽 속에는 과일과 과자들이 있었고 그것들을 펴놓고 먹는다. 그들의 음식도 부러웠고 그들의 사랑도 부러웠다. 나ㅔ게는 두 가지가 다 없었다. 나도 문득 딕슨의 얼굴을 바라보왔다.
갸름한 얼굴, 말쑥한 피부, 어딘지 여자같은 데도 있다.
『너의 나이는 몇 살이냐?』
나는 웃으며 물었다.
『스물 한 살! 너는?』
『열다섯…』
『한국 사람들 _서 너만한 키와 체격이면 열여덟살은 된다고 나는 들었다. 너는 우리나라 「껄」하고 같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곧 군대에 왔느냐?』
『그렇다. 2년간 군대 복무가 끝나면 고향에 돌아가서 대학에 진학할 생각이다』
『고향에 애인이 있느냐?』
『없다』
『너의 고향에는 미인들이 많지?』
『미인은 드물다. 너만한 얼굴은 우리 고향서는 매우 찾기 힘들다』
그의 말이 진실인가 아닌가, 나는 그의 얼굴을 말끔히 바라보았다. 별로 농담이나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영화에 보니 미국 여자들 대단히 예쁘던데?』
『영화에는 예쁜 여자들만 뽑아서 내니까 그렇다』
이렇게 얘기하는 동안에도 시장한 뱃속은 구멍 뚫린 고무공모양 점점 홀죽해 들어간다.
(이 자식한테 뭐 나 좀 사달라고 할까?)
이런 생각을 하였으나 그 말이 좀철머 입밖에 나오지 않는다.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하는 걸까?)
나는 내 마음을 다져 보았다.
(그는 나에게 친절했다. 그 친절 속에 사랑이 들었을까? 그저 친절 그것 뿐인가?)
마침 싸늘한 바람이 일고 있다. 기울어지는 햇빛을 찾아 우리는 자리를 옮겼다.
『나는 너를 안 것을 행복으로 생각한다. 한국에 온 밤을 느낀다』
딕슨이 말한다.
『정말은 내가 점심을 안 먹었다 뭘 좀 먹구 싶다!』
이 순간 불쑥 내 입에서 말이 나왔다.
『이 근방에 식당이 있느냐?』
『없다. 요 앞에 가게가 있다. 아마 비스켙이나 빵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같이 가서 비닐 종이에 싼 십원짜리 카스테라와 5원짜리 비스켙을 둘, 그리고 사이다를 한 병 샀다.
우리는 다시 능 안에 돌아와서 사온 것을 펴놓고 먹었다. 딕슨은 비스켙을 몇쪽 먹었을 뿐 나혼자 다 먹었다. 사이다도 그는 한목음밖에 안 마시고, 배고파 먹는 내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가 기울자 능을 나섰는데 택시가 없어서 시골을 내왕하는 버스를 탔다. 까마작한 시골 얼굴들이 버스 속에는 많았다. 그들은 제비새끼 모양 반쯤 입을 벌리고 나와 딕슨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들은 관객이고 우리는 무대에 나선 배우들 같았다.
시내에 들어서니 벌써 땅거미가 짙고, 저녘 불빛이 반짝었다.
우리는 명동까지 택시를 달려서 중국집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그리고 또 다방에 들어가서 한참 얘기를 했다.
그는 마치 나의 애인인듯한 기분이 든다.
(그가 만약, 호텔로 가자면 어떻거나?)
나는 그 때의 내 대답을 생각해 보았다. 몇 파센트는 「에스」라고 하고 싶다. 그러나 내 몸의 많은 부분이 거절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어설픈 꼬임에 내가 넘어갈 줄 알구? 만약 그 따위 소리를 한다면 이 자식하고는 다시 만나지 말아야지!)
다방의 시끄러운 음악을 들으면서 혼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열시다. 너는 집에 돌아가야 하지 않겠느냐?』
딕슨이 묻는다.
『…나는 돌아갈 집이 없다.』
『정말이냐?』
『아냐. 지금 말은 농담이야. 나 가야해…』
나는 벌떡 일어섰다.
『집까지 바라다 줄까?』
『바라다 다오…』
강숙이네 집까지 걸어가기가 싫어서 이렇게 대답했다. 또 그가 돈을 내는 택시를 타고 강숙이네집 골목 어구까지 가서 내렸다.
『저것이 너의 집이냐?』
딕슨은 강숙네 집을 눈여겨보며 가리킨다.
『그렇다!』
『다음 토요일에 뮤직홀에서 또 만날 수 있겠느냐?』
『몇시?』
『정오…』
『좋다…』
강숙의 방은 문깐채이기 때문에 창문을 똑똑 두들겼다.
강숙이는 곧 나와서 문을 열어 주었다.
『어디 갔다 이제 오니?』
『취직하러 다녔어…』
『너의 아버지가 학교에 다녀간 모양이더라…』
『어떻게 아니?』
『오늘 담임 선생님이 너희들 집에 나순이가 찾아가지 않았느냐, 묻지 않겠니?』
『그래서?… 너 말했니?』
『아니, 가만히 있었어. 누구든지 나순이를 보면, 선생한테 알려달래』
『너 절대 말 하지 말아!』
『아주 집에 안 들어갈 작정이니?』
『그건 집이 아니라, 감옥이야…』
나는 이렇게 말하고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딕슨과 오늘 하루 지난 일을 처음부터 훑어보았다.
(고향에 가도 너만큼 예쁜 「껄」은 만나기 어렵다…)
하든 말이 제일 인상에 남는다.
(그는 진정 나를 좋아하는 걸까?)
나는 어쩐지 흐뭇한 감정에 드쌔인다. 따뜻해 오는 솜이불의 감촉 속에 딕슨의 따듯한 친절이 쓸쓸하던 내 마음을 포근히 싸주는 것만 같다.
『강숙아, 나 오늘은 조금 행복했어…』
『뭐가?』
『차차 얘기 하께』
나는 말문을 닫고, 웃으며 눈을 감았다.
『얘기 해라…』
『지금은 안 돼…』
『「보이 후렌드」라도 생겼니?』
『지금은 말 안 한다니까…』
나는 벌써 일주일 후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