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열
사랑 · 直觀(직관) 통해 영원한 幸福(행복)을
발행일1964-06-28 [제428호, 4면]
우리는 천주님과 결합하기를 원하고 있으며 원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있다. 천주님을 원하는 길은 두 갈래가 있지만 다 같이 가 닿는 곳은 하나다.
첫째 길은 인식과 사랑을 통한 길이다. 사람은 인식을 통해 사물과 하나가 된다. 인식을 통해 사물을 파고들며 우리 안으로 이끌어들인다. 우리와 사물은 한 몸이 되고 사물은 우리 자신의 한 부분으로 있게 된다.
사랑한다는 말도 진정한 결합으로 합친다는 뜻이고 한 대상을 향해 나아간다는 뜻만은 아닌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사랑하면 할수록 사물은 우리의 것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랑은 아무 사랑이나 말고 영신적인 사랑이다. 영신적 사랑에도 두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받는 사랑이고 또 하나는 통털어 바치는 사랑이다. 즉 사랑하는 이를 내가 점유하는 사랑과 사랑하는 그에게 내 자신을 전부 바치는 사랑이다. 이 세상에는 이런 사랑의 길을 표시하고 상징할 만한 것이 없을까?
빛과 열은 이 길을 아주 적절하고도 훌륭하게 상징하고 있다. 예를들면 빛나는 불꽃을 내며 타는 초가 좋은 상징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눈은 그의 빛을 바라보며 우리 안에 받아들여 그와 하나가 된다.
이럴지라도 눈은 초를 건드리는 법이 없다. 불꽃은 불꽃대로 남아있고 눈도 역시 그대로 남아있지만 사실은 서로 융합해서 하나로 된 것이다. 불꽃과 눈은 서로 섞이거나 닿지 않고서라도 내밀한 결합을 성취햇으며 이른바 정결하고 경건한 결합을 이룩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바로 인식을 통해 영혼이 천주님과 싶이 결합하는 좋은 상징이다. 「천주님은 진리」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진리를 아는 것은 진리를 정신안에 점유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천주님은 당신을 아는 정신 안에 계시며 당신을 생각하는 정신 안에 그는 참으로 살고 계신다. 천주님을 안다는 것은 결국 가서는 그와 결합함이다.
빛나는 그곳에도 역시 결합은 생겨나게 마련이다. 빛나는 가정을 갖는 사람들의 손이나 얼굴에는 열정을 느낄 수 잇음도 사실이다.
빛과 열을 보는 사람은 감동하지만 그러나 빛과 열은 언제나 깨끗하게 남아있다. 열은 또 사랑을 상징한다. 불같으신 천주님은 그의 뜨거운 열로 우리의 마음을 사맞 뚫으시며 우리를 당신께 화합하시지만 그러나 우리는 천주님을 만질 수는 없는 것이다. 천주님은 또 선이시며 선을 사랑하는 이는 벌써 천주님을 그 정신 안에 갖고 있다.
내가 선을 사랑하면 선은 그 즉시로 내 안에 있게 되며 선에 대한 내 사랑의 도(度)는 바로 내 안에 있는 선의 도(度)인 것이다. 선은 내가 만지지 못한다 하더라도 선은 내 마음 속에 살고 있다. 『천주님은 사랑이시고 사랑 안에 거하는 이는 천주님 안에 거하며 천주님은 그안에 거하신다』고 요왕 종도께서는 말씀하신다.
한 마디로 천주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은 그와 결합하는 것이다. 영원한 행복도 천주님을 사랑하고 직관하는 바로 그것이다. 이 두가지로 말미암아 우리의 행복은 완전히 이룩되며 우리의 원의는 충만히 채워지고 우리는 극히 만족한다. 불꽃은 우리 영혼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어두움이 조금도 없고 빛나기만 하시는 생활하신 천주님의 상징이다. 불꽃은 빛을 발산하고 천주님은 진리를 발산하신다. 그러므로 진리를 받아들이는 영혼은 천주님과 결합한다.
또 불꽃은 열을 발산하지만 천주님은 자선(慈善)을 발산하신다. 그러므로 천주님을 사랑하는 영혼은 마치 손이나 얼굴이 불의 열을 느끼면서 불과 가까와지듯이 천주님과 결합해서 하나가 된다.
무구하고 순수하며 숭고하게 하늘로 치솟는 불꽃은 우리가 근접할 수 조차 없는 광명 안에 살고 계신 천주님을 곧잘 상징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성 토요일날 성당 문 앞에 불을 놓고 부활 초로써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이유를 알았다. 부제는 이 촛불을 높이 치켜들고 지대 앞으로 걸어 나오며 광명과 열을 온 성당 안에 골고루 나누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