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55) 작별 ①
발행일1964-06-28 [제428호, 4면]
『딕슨도 알아요?』
나는 물었다.
『알아, 그때 와 있었으니까!』
상사 부인은 내 기색을 살피는 표정이다.
딕슨에 대한 부끄러운 감정을 감추고 일부러 태연한 태도로 책장에서 손 닿는데로 아무 책이고 꺼내서 폈다. 눈은 활자를 따라갔지만, 내 몸값으로 천「달라」를 요구한 아버지의 말이 고막에서 사라지지를 않았다.
활자 속의 「이메지」와 현실이 뒤범벅이 되어 어떤 환상(幻想) 속에 내 자신을 맡기기 시작했다. 소설의 이야기는 무고하게도 살인범의 혐의를 받은 남자가 그의 애인과 함께 경찰의 추격을 피하여 자동차를 훔쳐타고 정처없이 내빼고 있었는데 나와 딕슨이 그 두 인물로 변하고 있었다.
남자주인공은 본래 소심한 「셀스맨」이었는데 막다른 지점으로 생명이 몰리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먹을 것을 훔치고 드디어는 강도질까지 한다. 죄없이 쓴 죄에 저항하기 위하여 그는 짐짓 악인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여자는 사랑하기 때문에 남자의 운명을 따라가고 있었다. 주인공의 「셀스맨」은 나고, 여자는 딕슨으로 비해 보였다. 딕슨은 나를 따라 울까? 때묻은 나를 그래도 좋아할 것인가? 그 해답을 소설 속의 여주인공의 마음에서 찾았다. 남자는 경찰의 시격에서 여자의 목숨을 구하려고 헤어지자고 할 때 여자는 듣지 않고 남자를 따르다가 드디어는 둘이서 부둥켜 안고 경찰이 쏘는 기관총 사격에 죽고만다.
그들의 처참하고도 아름다운 사랑이 조각 구름이라도 되어 하늘에 떠 있을 건만 같았다. 기와 지붕 추녀 끝으로 보이는 푸른 하늘에는 명주포대기 같은 구름이 찢어지며 흘러가고 있다.
나는 적어도 다섯시간 이상을 말한마디 없이 책을 들여다 보고 있었던 자신을 문득 발견했다. 시간은 이미 여섯시에 가까왔고, 해는 기울었다.
소설책을 접어 제자리에 꽂아 놓고 안방에서 돌아앉아 무엇인가 상자의 물건을 챙기고 있는 상사부인에게는 아무말도 않고 대문으로 나섰다. 딕슨도 만나지 않고 갈 생각이었다. 천 「달라」의 상품같은 얼굴로 딕슨을 대하기가 싫었다.
역있는 방향으로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걷고있었다. 우선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집으로 갈 생각은 없었고 그렇다고 딴데를 정한 곳도 없었다. 아뭏게나 되라하는 자포자기한 생각이 나에게 어떤 안정된 마음을 주었다.
이때
『나순 나순…』
하고 딕슨의 부르는 소리가 뒤에서 들린다. 멀리서 보고 뛰어온듯 딕슨은 숨을 몰아쉰다.
『어디로 지금 가는거야?』
『역으로!』
『왜!』
『나도 몰라!』
나는 태연히 대답했다. 그에게 아버지의 추한 말을 사과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변명할 기분도 나지 않았다.
『아침에 왔더랬다면서?』
『음』
『너의 기분은 알겠다…. 나는 나순이 너를 좋아하면 되는거야. 너의 아버지가 어떠한 사람이든 간에 그건 나의 관심 밖이다.』
딕슨은 이렇게 말하며 나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오던 길로 나를 인도한다.
나는 기계적으로 그가 하는데로 발길을 돌렸다.
『나는 천「달라」의 정가가 붙은 상품이니 네가 원하거든 사가거라!』
별로 자조하지도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한국에도 딸을 팔아먹는 풍습이 있느냐?』
딕슨은 나를 응시하며 이렇게 묻는다.
『노오!』
강하게 그의 말을 물리쳤다.
『그건 다만 나의 양부의 풍습이다…』
내가 국적을 가지고 내가 자란 땅을 나는 변호하고 싶었다.
『나에게 천 「달라」라는 돈이 있다면 당장 너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다. 좀더 일찌기 너를 알았더라면 좋았었다. 나는 백오십 「달라」씩 받는 월급을 오십「달라」는 쓰고, 백「달라」는 쓸데가 없어서 다달이 어머니에게 부쳤었다.
내가 떠날날은 이미 이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너를 위해서 비용이 많이 드는 비행기편으로 떠나지 않고 배 편으로 떠나겠다. 그러면 나는 너에게 백「달라」는 주고 갈 수가 있다.』
딕슨의 이말은 물러진 내 마음의 껍질을 벗겨준다.
『아버지는 요즘 생활난에 부딪쳐 몹시 돈이 필요하다. 너는 궁한 사람의 입장을 이해해야 한다.』
나는 한시간 전 까지 증오하던 나의 양부를 두둔했다.
그날 저녁 부라운 상사집에서 우리는 열시가 넘도록 이야기를 하며 지내다가 딕슨은 가고 나는 그 집에 다시 신세를 졌다.
부라운 상사는 『너의 아버지는 싫지만 너는 좋다…』
하면서 전과 다름 없이 우스운 소리를 곧잘 했다.
그 이튿날 오후 아버지가 부평에 나타낫다.
상사는 없고, 딕슨도 근무중이며 부인과 나뿐인데 그는 가자고 내팔을 거칠게 끌었다.
딕슨에게는 내일 또 오겠다는 편지를 쓰고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아버지가 내 자유를 너무 속박하면 난 죽어 버릴테야요!』
역으로 오는 길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그 말에 질렸는지 잠잠했다. 나는 그 잠잠한 얼굴을 바라보지도 않고, 속으로는 효과가 있구나 하고 기뻤다. 과연 집에 돌아와서도 그는 나를 때리지는 않았다.
물론 나는 죽을 생각은 없었다. 죽고 싶은 마음은 있었으나, 막상 죽을 생각은 없었다. 딕슨이 곧 본국으로 가는 것을 안 아버니는 그후 내가 부평에 찾아가고 또 딕슨이 찾아오는 것을 탓하지는 않았다.
나는 한열흘 동안 내 주변에 자유를 느꼈다. 그러나 드디어 이별하는 전날이 왔다. 딕슨은 준비에 바빴으므로 서울에 나올 시간이 없어, 오후에 내가 부평으로 찾아갔다. 이상하게도 내 마음은 조용했고 애상적인 기분이 조금도 오지가 않았다.
『나는 딕슨을 좋아하지 않았던가?』
내 자신의 마음이 의심스럽기도 했다.
아버지에 대한 저항이 나로 하여금 딕슨에게로 몰아친 것 뿐인지도 몰랐다.
그날 저녁 딕슨은 나보는데서, 그간의 식비를 상사 부인에게 계산해서 갚고, 백「달라」를 따로 맡기며,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찾아쓰라고 하였다.
이때까지도 나는 딕슨과의 이별에 별다른 동요를 마음 속에 느끼지를 않았다. 그가 육개월 후에는 다시 돌아오겠다고 굳게 약속한 까닭인지도 몰랐다.
그날밤은 상사 집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 열시에 「헤리콥터」로 부산으로 가는 딕슨을 전송하기 위해서 부대앞으로 상사 부인과 함께 갔다.
저편 광장에는 십여대의 「헤리콥터」가 대기하고 있고, 약 백명 가령 되어 보이는 제대 군인들이 이리 뭉치고 저리 뭉쳐서 서있었다. 한국 여자와 이별을 나누는 군인들이 몇 보였다.
딕슨은 묵직한 가방주머니를 친구에게 맡기고는 내 옆으로 왔다.
나는 그를 향하여 웃기만 했다.
그도 웃었으나, 어쩌니 얼굴이 침울해 보였다. 이윽고 그는 손수건을 꺼내더니 코를 푼다. 숙인 두 눈에서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그 눈물은 아름다왔다.
지금까지 눈물을 이겨내려고 버티고 온 나에게는 아름다운 눈물이란 하나의 발견이었다. 어느듯 내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딕슨은 내 어깨에 이마를 대고 들먹거리며 운다. 나도 같이 울면서 그 모양이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내 자신이 문득 어른이 된듯한 기분이 들었다.
『육개월 후에 꼭 와야 해요!』
나는 누님같은 기분으로 딕슨이 팔을 붙들며 말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오고 말구!』
딕슨은 고개를 들고 웃으며 말했으나 금방 다시 또 울기 시작했다.
『정말 사랑했던가봐! 저렇게 우는걸 보니…』
상사 부인이 보고 웃고있다.
드디어, 떠날 시간이 되어 「헤리콥터」 앞으로 몰려들어 갈 때, 딕슨은 걸음마다 눈물 어린 얼굴을 돌이키며 손짓을 하였다.
딕슨을 태운 「헤리콥터」는 잠시후에 공중으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