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 수도자들이 최근 신공대신 「바이오린」이나 「기타」에 실은 민요 가락으로 듣는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있다는 이야기가 화제를 모르고 있다.
「로만칼라」가 멀정한 신부님이 「기타」를 안고 「빠리」의 「올림삐아」 음악당 무대에서 불러넘기는 가요가락에 도취되었다가 박수소리에 깨어나 음악회가 파하자 극장 뒷문으로 찾아다는 회두자를 맞기가 바쁘다는 듀발 신부님의 사실은 이미 너무 알려진 이야기다.
이제 미국서는 「데트로이트」에 「반죠」 가락으로 유명한 가수 요셉 더스틴 신부님이 있고 최근에는 스위스에도 한 신부님이 나타났다. 그러나 대중곡은 성직자와 특히 수녀의 모습을 값싸게 한다고 성가와 애란민요만을 부르는 스코트란드의 시드니 마크이웬 신부님의 경우도 있다.
그런데도 벨기서는 수도복에 「기타」를 안고 TV에까지 나타난 「도밍고」회 수녀님이 있고 「뉴욕」의 「뉴버그」에는 성모산대학의 「도밍고」회 수녀님들로 구성된 합창단이 있고 그외에 「성모성심」회의 수녀님들의 삼중현악단 「예수 마리아」회이 수녀님들의 합창단이 있다. 아프리카의 백의회 수녀님들은 콩고이 북장단에 맞추어 부르는 아프리카 민요로 유명하다.
그들이 세속무대에 출연하여 직업적 흥행과 맞서고 있는데 그 효과가 있으나 역사적으로 따지면 멀리 「아씨지」의 프란치스꼬 성인과 그 제자 파치피코 수사의 사실에까지 소급되느니 만큼 구태여 현대적으로 신기할 것은 없다.
그러나 벨기의 루까-가별 수녀님의 이야기만은 그대로 지나갈 수가 없다.
1959년 여름, 입가에 미소를 띤 한 날씬한 벨기소녀가 수녀원을 찾아와서 「기타」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기쁨이 「도밍고」회의 전통이라 원장수녀는 『예스』하고 응했다. 오늘날 이 수녀와 그의 「기타」는 「빠리」로부터 「헐리우드」에 이르기까지 알려져 있다.
그의 가요는 대중음악을 당황케 하고 가는 곳마다 「레코드」 애호자들을 즐겁게 할 뿐더러 우리나라 「레코드」계에서도 「팬」들을 얻기 시작했다. 「레코드」회사에서 프랑스의 아이들에게 문의한 끝에 이구동성으로 채택된 「빙긋 수녀님」이 그의 유명한 별명이다.
『나는 1분간 33, 3분지1회전(回轉)으로 노래하고 1분간 78회전으로 말합니다.』라고 말할만큼 그의 노래는 따라 듣기에도 바쁘다. 『몇살 되셨읍니까?』고 물었더니 몇백년이나 살아오는 늙은 할머니 모양으로 머리를 끄덕이면서 『난 늙었어요』라고 말하고 나서 한참만에 『난 1933년생이올시다』라고 대답했다. 『수녀님은 돈 벌이가 많으실 걸』하고 어느 손이 애모없이 물으니 『「레코드」회사도 돈벌이가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냉냉하게 대답했다.
그의 「히트 송」은 『우리를 언제나 명랑케 하사, 생명과 진리를 형제들에게 가져다 주게 하옵소서』라고 도밍고 성인에게 청하는 기구를 부른 「도미니그」다. 그의 목청에는 재미소가 자재(自在)하고 그의 말마디에는 산곡간에 흐르는 시내의 신선한 물결이 치고 있다.
『선교사 노릇에는 많은 방법이 있어요. 나의 노래로 천주님의 인자하신 소식을 남에게 갖다줍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레코드」회사로부터 받아들이는 수입만해도 10만「달라」에 달하고 있다. 이 돈으로 칠리와 베트남에 새 전교구를 시작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 「빙긋 수녀님」의 전례없는 성공이 아니었더라면 그들은 전교사업을 확장할 수 없었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의 국제적 성공은 그의 생활에 무슨 변동을 가져왔던가? 그런 일은 조금도 없다고 그는 당장에 굳게 대답한다. 그리고 나서 미소가 되돌아 온다.
『다만 한가지 다른 것이 있지요』라고 말하는 그의 어조는 장난꾸러기 같다. 『가끈 신문기자들이 와서 나를 귀찮게 합니다. 』라고.
그느 작년에 「루벵」대학에서 종교학을 배웟고 현재 「부룻셀」의 청년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그의 본원은 나포레옹이 망한 「워털루」 근방에 있는 벽돌집 인데 콩고에 선교사를 파견하기로, 1920년에 창립되었고 그가 정식으로 들어간 것은 1959년 9월이었다. 그는 학교에서 도안을 전공했다. 수녀원에 들어가기 1년전에 그가 고문이된 하기 야영(野營)대회를 명랑하게 하려고 「기타」를 가지고 갔던 것이다. 그 「기타」에다 「아델레」라는 이름까지 붙였다.
『결국 「아델레」가 나와 같이 수녀원에 들어 왔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하루는 수녀원의 휴양시간에 그가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불렀던 것이 오늘날 전세계에서 유명하게 된 계기였다. 그의 첫 「레코드」는 그들의 대주교 세낭 추기경에게 증정되었고 이어서 요안 교종님께도 한벌 진상되었다. 『수도원 안에서 나는 내심(內心) 생활의 기끔과 이 기쁨을 남에게 전달하려는 강력한 소원을 발견했읍니다. 』라고 그는 말한다.
■ 도미니고
이 노래는 누가 가별 수녀가 부른 노래중 유명한 것의 하나 申相祚 神父 譯
도미니그 니그 니그는
초라한 길을 훗훗이 가버렸네.
거리마다 이르는 곳곳마다
노래하며 천주만을 전했네.
쟌이 영국 왕이었을 때
우리 아버지 도미니그는
알비인과 싸웠다네.
어떤날 한 이단자
그를 괴롭혔을 때
우리 아버지 도미니그는
기쁨주고 그를 회두시켰네
낙타도 없이 마차도 없이
맨발로 유롭을 돌아다녔네
스간디나비아 쁘로방스 그 어디나
성스러운 청빈으로만 살았네
넘치는 정열로 소년 소녀들에게
온 학교에 불을 질렀네
천주의 말씀을 심으려
설교하는 형제들을 찾아다녔네
도미니그 수녀원과 형제들에게
빵이 떨어지려할 때
두개의 황금 빵을 든 천사 둘이 나타났네
도미니그는 꿈에 보았네
정녀의 만또 속에 가득히 모인 왼 세계의 설교가들을
도미니그 우리 착하신 아버지 우리를 그저 기쁘게만 하사
우리 형제들에게
생명과 진리를 전하게 해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