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신부는 놀랄만큼 오늘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하나의 사회적 도전(挑戰)을 예측했고 이 도전을 어떻게 대항해서 싸와야 할지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실천함으로써 우리에게 전투태세를 미리 제시해 주었다.
오늘 우리사회는 빈곤이란 말할 수 없는 큰 문제에 부닥치고 있다. 이것을 해결치 않고서는 구령사업이 진행되지 않는다. 완전한 인간은 육체와 영신이 결합해 있어야 인간성이란 전 기능을 발휘하게 되고 그 궁극적 목적을 발견하여 추구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동포의 영혼을 구하는데 당장 해결해야 할 선결문제는 굶주린 자에게 밥을 주고 헐벗은 이에게 옷을 주어야 한다는 결론이다. 이것을 해결치 않으면 실존하는 인간을 상상할 수 없고 인간이 없으면 구령을 목적으로 하는 사제직의 필요성이 없어진다.
김대건 신부는 수령사업에 그 시대가 가로 막은 장애물을 해결하려고 희생이 되었고 그 피의 댓가(代價)를 우리가 거두고 있다.
이점 사회적 문제는 좀 다르다고 할 수 있지만 같은 목적달성을 위해 제거(除去)해야 할 장해물 때문에 사제로서 제물이 된다는 것은 모든 사제들의 생활원칙임을 추리할 수 있다.
김대건 신부가 그 시대의 구령사업의 지장물을 제거했다면, 혹은 제거하려고 노력했다면 오늘의 한국신부는 현대의 구령성업의 장해들을 제거해야 한다.
현 한국의 시급한 문제인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서 사제는 제물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현실은 너무나 「파라독시칼」하다. 비록 당위(當爲)는 언제나 먼 이상에 그칠 수 있다 할지라도 참된 희생이 제물로 바쳐지지 않을 때 쓸데없는 피를 많이 흘리게 된다는 것은 역사가 명백히 가르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안다.
오늘 동포의 대부분이 물질적 빈곤에 처(處)해 있다. 이들의 영혼을 구하려는 임무를 오늘 한국의 신부들이 맡고 있다. 빈곤하고 권력이 없으면 사회에서는 약자(弱者)다. 약자가 어디에 의존하려면 그들을 이해해주고 정이 통하는 같은 유(類)의 인간이 있어야 한다.
사제가 약자의 영혼을 구하려면 그들을 사제의 사상에 흠뻑 지도록 만들려면 자기 자신이 먼저 그들의 것이 되어 주어야 하고 이해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동일(同一)감을 주어야 한다. 이것만으로서 그들의 생활, 정신, 영혼에까지 파고들어 갈 수 있다. 약자의 벗이 되려면 필연적으로 존경을 받고 권세가 있고 희희락락하는 특권층에 못을 박고 그 층에서 떠나야 한다. 가난하고 불운한 인간을 구하려면 내가 먼저 가난하고 불운함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제가 소수 특권층과 통하고 그들과 하나가 되기 보다는 배고프고 헐벗은 대중과 통하고 그들과 하나가 될 때 그리스도의 모습이 사제를 통해서 더욱더 나타날 것이다. 그리스도의 친구들은 사회의 약자들이었다.
오늘의 한국사제는 과연 그 전생활을 통해 가난한 대중의 벗이라는 인상을 주는지, 그렇지 않고 그들과 다른 특권층이란 인상을 주고 있는지, 오늘의 한국신부들로서는 대답하기 쉬운 문제가 아니다.
현재 한국인의 대부분은 가난하다. 굶는 이들이 많다. 현재 한국신부들의 임무는 이들에게 먹을 것을 줄 수 있도록 특별한 관심을 갖는 것이다. 신부가 같이 굶지는 못할지언정 그들을 이해하고 소박한 생활을 영위함으로써 오는 불편을 참아받을 용기와 기쁨을 가져야 할 것이다.
「김대건」 그 이름은 그 누구에게 보다도 한국 신부들에게는 유달리 깊은 동조적 친밀과 감명을 주는 선구적 사제이다. 그는 동포에게 가자 좋은 선물을 주려는 과업에서 자기를 제물로 바쳤다.
한국신부들이 이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신부의 생활 전체가 물질가치와 어떤 현세적 명성에 좌우되고 좋은 본당에만 배치되기를 원하고, 또 시에서 시골로 전임되면 간혹 좌천이라고 생각하고 기분 역시 시기 상응하게 돌리는 것을 종종 목격하는 수가 있다. 본당 옆에서는 많은 이들이 하루 세끼를 술지게미로 연명해 가는 참상을 보면서도 본명축일이니 무슨 축일이니 하는 피치 못할 기회에 너무 지나치게 오랜 시간과 재력을 쓰는 것도 현실의 한 장면이다. 죽을 순간까지 일초라도 아끼지 않고, 모든 정력을 다 쓰더라도 만족치 못하는 성직자, 남을 위해 실존하는 사제라면 할 일이 없어 낚시질, 산양, 장기, 기타 오락으로 하루의 대부분을 허비해 버리는 것도 있을 수 있는 한 토막의 현실일 것이다.
이래서야 어찌 머리둘 곳 없이 남을 위해 분주히 일하신 스승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거리낌 없이 긍지할 수 있으랴.
동포애와 조국애에 불타 수륙 험로를 몇차례 겪으며 수채구멍을 기어서까지, 준엄한 국경선을 뚫으려고 행상인이 모는 송아지배에 매달렸고 기아와 추위로 눈위에 쓰러졌고 사랑하는 어머니를 만나고 싶은 육정마저 포기하면서 그리스도를 이땅에 뫼신 김신부님의 직계 후계자임을 자부할 수 있겠는가.
한국은 지금 많은 김대건 신부를 요구하고 있고, 또 절대로 있어야 한다. 진정한 혁명가가 있어야 되겠다. 총칼을 든 혁명가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남에게 대한 사랑으로 출발하여 영원에 까지 연결시켜 주는 사랑의 혁명가(革命家)를 부르고 있다.
인간개인과 인류전체의 참된 혁명은 그리스도로서 시작됐고 이 나라 이 겨레 위에 이 혁명의 불꽃이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로써 번지게 되고 타올랐다.
한국민족의 진정한 개혁은 김신부의 혁명 과업을 이어받아 계속해야만 된다. 이 「바톤」을 한국 신부가 받지 않으면 지정한 개혁은 중단되고 말 것이다.
論說委員 R 神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