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를 기다림은 사람을 기다린다는 것과는 판이합니다. 옛 친구를 만난다던가 애쓰던 일이 됐을 때에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만족감을 느낍니다. 허나 이것들은 얼마 계속되지 않고 날이 갈수록 시시해집니다.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던 때처럼 가슴도 뛰지 않고 때로는 염증까지 납니다.
사람이란 언제나 계속되는 기쁨을 풀 수가 없고 만족을 느끼는 것도 잠간이기 때문입니다. 경사를 맞이할 때에는 그렇게 좋다가도 막상 당한 후면 그것도 그렇고 좋은 추억 속에 남으나 그것도 나중에는 없어지고 맙니다. 심지어는 후회하는 때도 있읍니다.
헌데 천주를 기다림이란 아주 다릅니다. 처음에는 느끼는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좋은 것도 모릅니다. 도리어 기다리기가 지루하고 때로는 실증이 납니다. 그러나 한 번 만나면 그 이상 더 좋을 수 없고 그 기쁨이 배가되고 커집니다. 예를 들면 구세주를 고대하던 비리버와 나타나엘이 그를 만났을 대 너무나 좋아서 그의 제자가 되고 말았읍시다. (요왕 1.43-51)
예수께 불린 비리버가 제 친구 나타나엘을 만나서 『모이서와 교법책과 및 선지자들이 기록한 자를 우리가 만나 뵈았으니 곧 예수 나자레노요 요셉의 아들이니라』(동·45)하니 나타나엘은 그럴수가 없다는듯이 『나자렡에 무슨 좋은 것이 능히 날 수 있나뇨?』(동·46절)하고 대꾸했읍니다. 예수를 보자 그는 황홀해지고 기뻐서 『스승은 천주의 성자시요 이스라엘의 왕이로소이다』(동 49절)하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허나 그는 예수 말씀하신대로 나중에 『이에서 더한 것을 보게될』 것입니다. (동50절) 『이 더한 것』이란 바로 천주의 영광입니다. 이 이야기는 천주를 기다리고 만났을 때에 그 기쁨이 어떻다는 것을 잘 설명해 줍니다. 사실이지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속의 그것과 판이하게 다릅니다. (요왕 14·27)
위의 이야기에서 보는 것처럼 예수를 만나면 언제나 어떤 변화가 생깁니다. 그가 다른 이들보다는 좀 다르시다는 것 뿐 아니라 생활하신 천주의 아들이요 주시며 이스라엘의 왕이라 고백하게 됩니다. 마리아.막달레나, 사마리아 부인, 기적적 고기잡이, 후에 베드루, 태생 소경, 골고타에서의 백부장 등 예수를 만나보고 접촉한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면 확실히 사람을 기다렸다가 만났을 때와는 얼마나 다른지 잘 알 수 있읍니다.
그러나 천주를 찾아 만나기가 그리 수월하지는 않읍니다. 만날만한 준비를 해야하고 이러기 위해 먼저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다음에 할 일은 요안 세자가 한 말입니다. 광야의 소리인 그는 우리에게 곧 오실 주 예수를 맞기 위해 마음 준비를 합당하게 할 것을 호소합니다. 『주의 길을 닦으며 그 지름길을 바르게하고 모든 골짝이를 메우며…』(루가 3.4-6)
진정한 회심으로 지름길인 우리 죄악의 길을 바르게하고 죄지은 우리 영혼의 길을 반듯하게 닦아야 합니다. 움푹 들어간 골짝이인 해태와 인색처럼 부족함(혹은 궐함)으로써 범한 죄를 덕행과 선업으로 메우고 우뚝 솟은 산과 고개인 교만과 허영 분노와 탐도같은 과오와 결점으로 높이 쌓인 것을 겸손과 천주 경의에 복종함으로써 무너뜨려야 합니다.
굽던 것은 선의와 바른 지향 판단과 남과의 교제하는데 가져야 할 의리도 곧게 하여야 하고 죄로써 험하게 된 것을 내적 외적 극기와 선을 실천하는 습성을 갖게하는 신심행사로 평탄하게 해야 합는다. 이렇게 하면 천주의 구세주를 뵈옵게 될 것입니다. 『천주시여 내 마음은 든든하나이다. 천주시여 하늘 위에 드높이 구원ㄴ되도록 당신 오른팔로 도우시고 또 우리의 청을 들어주소서』(성영 108.2와 6-7) 이처럼 준비된 우리를 보시면 그 즉시로 구세주는 문을 열자 들어오는 공기처럼 곧 오실 것입니다. 아니 그는 벌써 우리 마음 문앞에 와 계십니다. 『보라 나 문전에 서서 두드리노라』(묵시 3.20) 그 목소리와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 드리면 자케오의 집에 들어가시듯 기쁘게 들어오실 것이고 들어 오셔서는 『오늘날 이 집안에(즉 우리 마음 속에) 구원핢이 이르렀다』(루가 19.9)는 말씀을 들려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왔다갔다 복사도 해주시고(루가 12.37) 같이 잔치도 할 것입니다. 『나 그 안에 들어가 저와 더불어 잔치를 베풀 것이며 저도 또한 나로 더불어 잔치하리라』(묵시 3.20) 이것이 구원이 아니고 무엇이겠읍니까?
광야의 소리가 잠잠해야 할 것인가? 그 소리는 들으라고 울리는 것이 아니겠읍니까?
崔益喆 神父(서울 里門洞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