巴里外邦傳敎會(파리외방전교회), 韓國敎會(한국교회)의 開拓使徒(개척사도)
발행일1963-12-08 [제402호, 4면]
■ 빠리 外邦傳敎會와 韓國敎會 / 史學博士 崔奭祐 神父(순교자현양회 위원장)
신대륙의 발견을 계기로 교회는 16세기에 들어서서 포교사상 획기적인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16세기가 포교의 세계적 활동시대라면 17세기는 선교사들의 보다 효율적인 활동을 위한 대규모적 조직의 시대인 것이다. 첫째 1622년의 포교성성, 둘째 포교지방에서 선출된 젊은이들의 성직자 양성을 위한 「울바노」대학, 세째 최초의 재속(在俗) 신부의 전교 단체인 「빠리외방전교회」의 창립 등이 현저한 조직체이다. 16세기에 포도아와 서반아 양국이 서로 활동한 반면 17세기는 불란서가 포교의 영도권을 잡은 시대이다. 그것은 불란서가 포교지방을 위한 인적 물적 원조에 있어서 첫 자리를 차지하였다는 점이고 또한 교황 대목구(敎皇 代牧區)라는 고유한 교계제도와 「빠리」외방전교회의 신학교 창립이란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은 불란서에 의해서 획책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史實)이 포교집아 특히 극동에서 불란서의 우위를 초래하는 한편 외방전교회는 대목구란 새로운 제도로써 극동에서 포도아의 소위 포교상의 보호권의 남용 내지 독점권을 점차 제지, 구축함으로써 포교성(布敎省)의 자유로운 활동의 길을 열고 마침내는 재속신부를 처음으로 포교 전에 등장시켜 당시의 선교사의 부족을 보충하고 포교를 전교회의 관심사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방인 성직자 양성이란 중대한 과업에도 큰 공헌을 남기게 된 것이다.
12월11·12일 「빠리외방전교회」가 동 회 신학교 창립 기념일을 맞아 회 창립 제3백주년 기념도 함께 지나게 되었다. 한국 천주교회 하면, 바로 그것은 「빠리외방전교회」서 시작한_다. 그리스도께서 한국 구세사업을 동 회에 맡기셨고 그들을 한국에의 종도로 간택한 것이기에. 우리는 그들이 비단 피를 흘리고 살을 찢어 세운 공로에 감사한다는 인사치레로써만으로도 영영 그 이름 「빠리외방전교회」를 우리 각자의 신앙생활 속에 항상 아로새겨야 할 것이다. (편집자 註)
한국교회의 초대 신자들은 입국의 난관을 고려하여 당초부터 수명의 선교사의 일시적인 잠입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항구적인 전국의 신교의 자유를 꾀하고자 외교적 방법을 늘 생각하였다.
그것은 또한 마테오.릿치와 그의 후계자들이 중국교회를 위해서 추진 중이던 바로 그 방법이었다. 한국의 첫 선교사인 주(周) 신부는 포도아나 서양의 그리스교국이 한국 왕에게 수학자와 의학자를 동반한 사절을 파견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임을 지지하고 「페낑」(北京) 주교에게 그 교섭을 의뢰하였었다. 16세기 초부터 동지사(冬至使)편에 간 한국 사절들이 「페낑」의 예수회 신부들을 찾게된 것은 서양의 신학문에 대한 호기심에서이고 또 이 학문 때문에 중국 조정이 그들을 등용하고 그들에게 포교의 자유를 허락한 사실을 볼 때 한국을 위해서도 같은 생각을 갖게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기에 소현세자(昭顯世子)는 귀국에 앞서 수학자인 예수회원을 동반할 것을 청하였고 이승훈(李承薰)이 「페낑」 북당(北堂)의 예수회 신부를 방문하게 된 것도 수학을 배워보고자 하는 것이 그 동기였었다. 황사영(黃嗣永)이 그 백서(帛書)에서 무력적 방법을 제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절을 통한 평화적 방법이 실현 못 되는 경우를 전제했었다. 이어 1811년과 1825년 교황에게 사절의 파견을 간청해 마지 않았지만 포도아국 자신 한국과의 통상을 적극 추진시킬 마음이 없었고 또 포교성성으로서도 한국 교구를 어떤 수도회에 일임하기로 결정, 에수회를 비롯하여 여러 수도회에 교섭을 하였으나 한국 입국의 곤란과 포도아의 포교 독점권을 침해할가 두려워하여 선뜻 지원하는 수도회가 없었다. 이렇게 거듭되는 한국 교회의 간청에 동정을 금하지 못하면서도 속수무책, 이런 포교성에게 한국교구 설정의 용단을 내리게 한 것은 당시 태국의 부주교이던 외방전교회의 브룻기에르 소(蘇) 주교의 영웅적 「이니시어팁」인 것이다.
소주교는 1829년 「빠리」본부에서 온 편지를 받았다. 그것은 한국 교구를 맡는데 대한 각 주교들의 의견을 청하는 회람이었다. 주저하고 있는 「빠리」 본부에 한국에 위선 회원신부 하나 둘을 파견하자는 임시적 방법을 제안하고 자신이 솔선 지원하는 한편 교황청에 자기의 지원을 지지해 줄 것을 청했던 것이다. 1831년 마침내 「로마」는 한국 교구를 설정, 「페낑」에서 완전히 독립시키는 동시 그 초대 교구장에 소주교를 임명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한국 교구의 책임자가 외방전교회냐 또는 포교성 자체이냐의 근본적 문제를 미결로 남긴채 소주교의 입국과 정착을 기다려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여기에 그의 수난의 길이 시작되는 것이니 첫째 외방전교회는 이미 그를 회원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둘째 「페낑」 교구의 관리 주교는 한국 교구가 여전히 자기의 영역임을 고집하여 소주교를 횡령자로 모는가 하면 세째 주교의 입국을 준비차 먼저 한국에 들어간 중국인 유(劉)신부는 자기의 어마어마한 죄악이 폭로될 우려에서인지 「페낑」 주교의 주장을 지지, 소주교를 자기의 직속 상관으로 인정하지 않는 한편 한국신자들을 기만하여 소주교의 입국을 지연 방해하였던 것이다. 다행히 이 모든 장애가 제거되자 급거히 한국으로 향하던 도중 불행하게도 소주교는 1835년 10월 만주에서 병사하게 되었다. 그가 비록 한국 땅을 밟지는 못했을만정 그는 한국 교구를 그 위기에서 구출한 은인이요 투사이다. 백절불굴의 투쟁으로써 바야흐로 탄생된 한국 교구의 겹친 갖은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특히 만약의 경우를 고려하여 모방 나(羅) 신부를 부주교로 미리 임명하고 그에게 모든 권한을 부여하기를 잊지 않았다는 그의 현명함이다. 1836년 나신부가 입국에 성공하고 같은 해 12월 유신부를 축출하는 동시에 「마카오」로 세 신학생을 보내게 되니 여기에 비로소 외방전교회는 한국 땅에 견고한 기초를 세우고 장래 발전할 터전을 마련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김대건 신부가 『제가 죽은 후에도 또 마땅히 신부와 주교들이 나올 것이니 이러할 때는 영영(성교를) 금하지 못할 것이니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라고 판관 앞에 예언하였듯이 욉아전교회의 주교 신부들은 이후 50년이란 긴 세월을 거쳐 간단 없는 모진 박해 가운데서 진리를 증거하고 복음의 씨를 뿌렸으며 또 어떠한 폭군 앞에서도 피의 투쟁을 통하여 마침내 「신교의 자유」란 비싸고 귀한 선물을 남겨놓은 것이다. 그들은 또한 자유 없고 불편한 환경에서도 이 나라의 숨은 보배를, 역사, 지리, 언어, 과학 등 모든 면에서 찾아내고 연구하는데 소중한 시간의 일부를 바쳤던 것이니 한국의 개화와 진보를 위한 공헌은 한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19세기 말엽부터 오늘날까지 가톨릭교회 발전에 커다란 암영이 되고 앞으로도 위험성을 지닌 하나는 「프레스탄티즘」일 것이다. 한 세기나 뒤늦게 들어왔지만 얼마 안 가서 가톨릭을 쫓아왔을 뿐더러 모든 면에 우리를 능가하게 되었다. 특히 자선과 교육사업에서 그러하다. 그들은 복음 전파를 제일 목표로 삼는 이상주의자이면서도 사실은 교육지상(至上)을 실천한 실천주의자들이며 모든 방면의 인재를 양성함으로써 앞날의 틀림없는 발전을 준비한 것이다. 한편 가톨릭은 복음 전파란 순종교적 사명을 첫째로 알고 또 의당 그 사명을 실천했어야함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문화적 사명에 너무나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나 하는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즐겨 초사회적(超社會的) 초문화적 태도를 취한 것이 아닐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리외방전교회」가 그 신학교 창립 3백주년의 경사를 맞는 오늘 우리 한국 교회는 복음의 사도로서 자유의 투사로서 문화의 공헌자로서 그들에게 최대의 존경과 사의를 표하는 동시 지난날의 업적이 더욱 드러나고 외방전교회가 힘차게 발전하기 바라며 우리도 그들의 유업을 빛내기 위하여 가일층의 노력을 다짐하여야 할 것이다.
■ 3百周 맞는 빠리 外邦傳敎會 / 韓國 支部長 할레 神父(빠리외방교회 한국지부장)
「빠리」외방전교회는 오는 12월11일 12일 양일 포교성성장관 아가지아니안 추기경과 「빠리」 대주교 펠땡 추기경을 모시고 불란서와 아세아의 주교 밑 성직자들이 「바크」 거리에 있는 낡은 신학교에서 형제답게 모이는 축제로써 그 창설 3백주년을 기념할 것이다.
한국의 교회는 백년 이상이나 순교자의 피 속에까지 이 전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있다. 그러므로 아세아에 있어서의 3세기 동안의 사도직의 기발(奇拔)적인 몇 가지 사실을 여기 상기시키는 것도 뜻이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 아세아의 호소
17세기 중엽 인조(仁祖)의 치세하, 우리나라가 청(淸)나라의 설립을 북경에 가져온 병자호란으로 약탈되었을 때 교회 중심부는 아_아의 호소를 들었다. 지리적 신발견이 『가서 만민을 가르치라』고 하신 주 예수의 며령에 순종하기 위해 해야 할 속넓은 일을 교회에 드러냈다.
새로운 사도적 운동의 선두에 서기로 결심한 교황은 1622년에 포교성성을 창립하였다. 그러나 그는 산발적인 전교여행이 아니요 서반아와 포도아의 정복자들을 뒤따르고자함도 아니요 오직 교회를 심는자 아세아에 방인 성직자와 함께 방인교회를 굳건히 세울 참 창설자로서 그당시 이렇듯이 어려운 여행을 무릅쓸 각오를 한 선교사들을 발견해야만 하였다.
▲감목대리들
성처의 이 호소는 젊은 신부들이 이미 신심회를 조직하여 신앙의 전파에 생명을 바치기에 불타고 있던 「빠리」 「솔본느」 대학을 둘러싸고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교황은 그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빨_ 남벨덜라 모뜨 등을 선택하여 주교위에 올린 후 그들을 아세아 먼나라에 보냈다. 그들의 사도적 노력을 지지하고 연장시키기 위해 1663년 10월27일에 외방전교신학교가 창설되었다.
1664년 8월11일 성청으로부터 인가되어 이 신학교가 선교사 지원자들을 모집하였고 그것이 「빠리외방전교회」의 「센타」가 되었다. 토의기와 이란과 인도를 횡단하여 2·3년이 걸리는 긴 여행 끝에 이 「감목대리들」은-그 때부터 이 창설자 주교들을 이렇게 불렀다- 태국 방콕 부근 「아쥬띠아」에 근거지를 두고 또 「빠리」로부터 새로운 협력자들이 도착함에 따라 감보자, 베트남 그리고 중국 깊숙한 곳까지 복음을 전하였다.
얼마후에 먼저 「뽄디세리」 그 다음에 북경과 말레아에 자기 본나라에서 교육받을 수 없었던 아세아의 모든 나라의 장래 신부들을 받아들이기로 지정된 신학교인 대학을 세웠다. 참 신앙은 수많은 장애를 다하는 것이다. 그래서 박해는 피해야 한다. 따라서 사도직은 오랫동안 비밀리에 이행되었고 또 가끔 선교사들의 피는 형벌 가운데 신앙을 고백하는 그들의 신자들의 피를 동반하였다.
18세기 말에는 구라파에서 개선한 혁명을 우리 외방전교회의 존재조차 위협하였다. 그러나 19세기는 선교의 새로운 약진이 시작되었다. 즉 만주 한국 일본에 「빠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이 도착함을 보았다.
▲쇄국주의
나라를 폐쇄하는 것이 이렇듯이 엄했기 때문에 우리 한국은 세상에서 쇄국주의란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831년 성청이 「빠리외방전교회」에게 완전히 고립된 젊은 한국 신자를 맡을 것을 명하였을 때 이 선교사들을 위해 가장 어려운 문제는 입국하는 일이었다. 첫 감목대리로 임명된 소주교는 압록강을 건너기 전 몽고에서 애석하게도 별세하였다. 범주교와 나신부와 정신부는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무릅쓰고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한 일은 한강 백사장에서 순교함으로 끝마쳤다.
이것은 한국에 첫 복자들을 낸 1839년의 박해 때였다. 다행히도 그들로부터 중국에서 서품된 첫 사제인 용감한 김 안드레아는 한국에 새 보갖들을 마련하기 위해 갖은 희생을 다하여 헌신하였다. 종교는 항상 엄히 금지되어 장주교는 서울 태평동에 있는 작은 집에 숨어 살으시고 한편 자기 보좌 안주교는 남쪽 지방을 동분서주하였다. 박신부와 신신부는 제천 부근 배론(오늘의 구학)마을에 비밀 신학교를 만들었다.
1866년에 병인양요가 일어나 무서운 새로운 시련을 겪었다. 즉 두 분 주교와 일곱분 신부가 매우 많은 신자들과 함께 순교하였고 신자들은 흩어졌다. 그러나 새 선교사들은 벌써 그들을 다시 일으키기를 꿈꾸고 이주교와 배주교를 이어 그들은 금지된 나라에 들어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허사였다.
때를 기다리면서 그들은 상해에서 언어학의 일로 여가를 채웠다. 귀향살이 한 한국신자의 협력으로 문법책과 사전이 발간되었다.
마침내 1877년 가을 이주교는 정신부와 김신부와 함께 약속된 땅에 도착하기에 성공하였다. 미구에 박해의 종말을 볼 이 선교사 가운데 위대한 민주교가 있다. 그의 표어는 『순교자들의 꽃을 피워라』이고 20세기 초엽의 한국 교회의 훌륭한 발전의 증인이 될 것이다. 마침내 나라는 문호를 개방하였다.
많은 젊은 한국소년들이 오늘의 성직자의 모자리가 될 용산신학교(1892)가 건설되기를 기다리면서 사제직을 준비하기 위해 「빼낭」대학에 유학갔다. 서울 주교좌대성당 송현언덕 위에 세워졌다. 젊은 교회에 시련이 없지는 아니했다. 그러나 나무는 심어졌고 그것은 생기가 있었다. 오늘 한국에서는 아세아의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선교회들이 「바크」의 거리(빠리외방전교회)의 일을 나누고 증가시키기 위해 왔다. 방인성직자는 차차 완전히 조직된 교구 안에 설립되고 있다. 성청의 원의에 따라 현재 9백명을 헤아리는 「빠리외방교회」는 인도에서 일본에 이르기까지 발전도상에 있는 젊은 교회를 계속 도우고 있다.
한국에서는 34명이 대전교구와 대구대교구 안동감목대리구에서 일하고 있다. 총창 께귀네신부는 지난달 「로마」에 세워진 재속신부 선교학원의 상설의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굳건한 손으로 그는 이 늙은 선교회가 천주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착수하기로 호소한 내일의 공의회에 새로운 노력을 향하여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