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29) 주린 사랑 ②
발행일1963-12-08 [제402호, 4면]
그 이튿날은 일요일인지라 강숙과 방에서 하루를 보내면서 심심치가 않았다.
월요일 아침이 되자 강숙은 책가방을 들고 학교로 가고 나는 그대로 방에 남아 있었다.
강숙 어머니는 강숙에게서 내 사정 얘기를 들은 모양, 동정하는 기색으로 방에 들어오드니 묻는다.
『우리 집에 잠시 있는 것은 상관없지만 아버지가 걱정하시며 찾으실지 아냐? 학교도 안 가고 이리구 있으면 되겠서?』
나는 대답하지 않고 보던 소설책을 옆에 놓고 방바닥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집에 들어가요 남이 뭐라든지 못 들은척 하고 공부만 잘 하면 되지 뭐?』
내 귀에는 그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춘자들의 눈초리가 그렇게 무서운 것도 아니다. 싫긴 하지만 그만한 것은 참을 수도 있다. 집에서만이라도 따뜻한 사랑의 분위기가 그리웠다. 가나 오나 나에게는 맘을 녹일 자리가 없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집도 학교도 싫었다.
강숙이하고 얘기할 때의 시간이 나에게는 자유가 있었다.
그리고 어제 딕슨이라는 그 미군 청년과의 몇 시간의 소풍 갔던 시간이 마음의 억매인 밧줄을 풀어준 듯 했다.
어딘지 혼자 날으고 싶은 조롱에 갇힌 새와 같은 기분이 든다. 강숙이 집에는 무슨 샌지 이름은 모르나 주둥이가 분홍색이고 날개가 파란 예쁘장한 새가 한 마리 조롱에 들었다.
새는 주둥이를 모으고 눈을 말뚱거리며 웅크리고 앉아 있다.
하늘을 날으지 못하는 새! 그의 앞에는 좁쌀이며 야채며, 그밖의 먹이가 그릇에 잔뜩 놓여있었으나, 새는 눈도 걷더보지 않고 있다.
『새도 먹을 것만으로는 만족 못 한다. 하물며 사람이 삼시 밥만으로 돼지같이 우리 안에 갇혀 살 수도 없는 일이다.』
강숙 어머니는 어딘지 나가고 강숙이네 집에는 이십세 가량 되는 식모 뿐이다.
식모도 주인 없는 틈을 타서 입에서 노래소리가 나오고 매우 명랑하다. 식모도 해방되고 싶은, 기를 펴지 못한 한 마리의 샌지 모르겠다.
『이봐요 나 잠깐 요기 다녀올 동안에 집 좀 봐주어요.』
식모는 이렇게 말하며 나간다. 마실이라도가는 눈치다. 집안은 나 혼자 뿐이다. 나는 새장을 들여다보며 새의 거동을 살폈다. 그는 이 집주인들이 나간 것도 모르고 아까모양 그대로 멀건 눈동자로 앉아있을 뿐이다.
『새장을 열어 날려 보내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누가 새를 날렸느냐고 하면 어떡허나?)
뒷일이 걱정은 되었으나 내 손은 새장 철사문을 반쯤 열었다. 새는 나갈만한 구멍이 난 것도 모르고 조금 놀란 기색으로 목깃을 까특한다.
나는 삼분의 이쯤 열린 문을 활짝 치켰다. 이 순간 새의 눈은 그가 나갈 공간을 발견한듯, 고개가 활발하게 움직이며 눈알에 빛이 감돈다. 새는 얼사하고 가로질린 막대기 위에서 문 있는 아래로 내려온다. 그는 잠시 열린 문을 바라다 보더니 조심조심 두 발을 옮겨 놓는다. 드디어 새는 열린 문턱에 고개를 내밀고 살핀다. 이윽고 새는 푸드득 소리를 내며, 바깥 공간을 향하여 날랐다.
오랫동안 갇혀 있는 날개는 힘을 다하여 추녀 위로 날은다. 지붕 위에서 한숨을 돌리는양, 잠시 앉았다가 넓은 하늘로 날라가 버렸다.
새가 빠져 나간 새장은 아무 가치 없는 물건같이 보였다.
나는 모르는 척하고 방에 다시 들어와서 읽던 소설책을 읽었다.
식모가 돌아온 것은 한 시간쯤 후였다.
나는 강숙에게 간단히 떠난다는 판지를 써놓고 가방을 들고는 그 집을 나섰다.
『아주 가세요?』
식모가 딸아오며 묻는다.
『집으로 간다고 그러세요?』
밖에 나온 나는 집으로는 안 가고 「뮤직·홀」로 갔다.
아침에 강숙이가 얼마간의 용돈을 나에게 준 것이 있었다. 혹시 하도 하는 생각에 「홀」 안을 두루 살펴보았으나, 딕슨같은 모습은 안 보였다.
음악에 귀를 기울이며 나는 깊은 바다속을 헤매듯이 공상에, 잠겼다. 나에게 없는 것들을 공상에서 하나하나 줏어 모은다.
현실에서는 찾지 못하는 것들을 찾아서 가져 본다.
첫째는 나를 낳고 일본으로 가 버린 생모(生母)를 만난다. 그는 내 생각이 나서 누구에게 나를 찾아 달라고 했다. 나는 그 찾는 사람을 만난다. 비행기로 일본에 건너가니, 어머니의 반가움! 우리 모녀는 잠시 눈물 어린 얼굴로 껴안는다. 그 생모의 얼굴은 죽은 양모의 모습으로도 나타나고 동이 엄마 비슷한 얼굴로도 비친다. 어머니는 미국에 있는 전날의 애인에게 내 사진을 보내니 아버지는 태평양을 건너 일본에 날라온다. 전날의 장교는 지금 실업가가 되어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 나는 부모를 따라 일류 백화점에 가서 내 몸에 꼭맞는 좋은 옷을 여러번 해 입는다. 그리고 말숙하게 「유니폼」을 입은 보이들이 둘러서서 시종하는 호화로운 「호텔」에서 세 식구는 단란한 식사를 한다. 아버지는 자기가 아끼는 유능한 청년이 있는데 「후렌드」가 되라 하며 장거리 전화로 그를 부른다.
나타난 청년은 미남인데 신사복을 산듯하게 입고 이쪽으로 오다가 나를 보며 기겁을 하고 놀란다. 나도 놀랐다. 그는 바로 딕슨이었다.
「뮤직홀」의 시계를 보니 어느듯 두 시를 가리키고 있다. 전축 스피카에서는 「아베마리아」가 고요히 흘러 나온다. 검은 그림자들이 제각금의 자세로 장엄한 「소푸라노」 「솔로」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나는 고개를 다시 떨어뜨리고 끊어진 공상의 심해(深海) 속에 자신을 잠구었다. 어느듯 나는 뉴욕의 유명한 「하이스쿨」의 학생이 되어 있었다. 많은 남녀 친구들과 함께 교정에서 뛰어놀고 있는데 그 속에는 강숙의 얼굴도 보였다. 그리고 저편 교사 모퉁이에는 춘자가 우리들이 노는 것을 부러운듯이 외롭게 바라보고 섰다.
『춘자야 이리온! 우리하고 같이 놀자!』
『나도 끼어 주니?』
춘자는 얼굴을 붉히며 계면적어 한다.
『여기서는 네 얼굴이 동떨어져 보이지만, 나는 그런거 상관 안 한다. 우리하고 어울려서 같이 놀자…』
춘자는 내 품에 얼굴을 숙이며, 눈물어린 얼굴로 감사해 한다. 나는 춘자의 손을 붙들고 강숙이들이 있는대로 뛰어 간다.
시간을 보니 벌써 다섯시가 넘었다. 한 시간 쯤 다시 달콤한 공상에 잠겼다가 가방을 들고 「뮤직·홀」을 나왔다. 거기에 나오니, 을시년스런 현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어디로 갈까?)
이제는 강숙이네 집에도 갈 수가 없다. 걸음의 타성이 내 몸을 싣고 간다. 동이네 집이 생각났으나, 아버지의 수색이 거기에 뻗혀있을 것 같아서, 정처 없이 걸으면서 생각을 한다. 나는 어느듯 서울역 금방에 와 있었다.
남단의 항구 부산으로 가볼까하는 마음이 든다. 수중에는 차표 살 돈도 없었지만….
아뭏든 나는 기차 타러 나온 사람같이 역대합실에 들어가서 기차 시간표를 쳐다 보았다.
내가 탈 기차는 아직 멀었다는 표정으로 빈 「벤취」에 가서 걸터 앉았다.
(가까운 역의 표를 사서 부산행 열차를 타버릴까?)
이런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실행할 용기도 없었고 낯선 부산에 돈 없이 가서 어떻게 지낼까 하는 부안감도 들어 한 30분 후에는 대합실을 나왔다.
마침 저편 출찰구에서는 방금 기차가 도착하여 손에 「트렁크」를 든 승객들이 까맣게 풀려 나오는 중이었다. 역 앞에서 어물어물 걷고 있던 나는 기차에서 내린 손님의 물결 속으로 뒤섞이었다. 택시 운전수가 차를 타라고 부르기도 하고 여관을 안내하겠다는 소년도 덤벼든다.
어디로 갈까, 하고 잠시 역 앞 광장에서 명멸하는 네온싸인을 바라보았을 때,
『색시!』
하고 가까이 온 입김이 있다.
돌아보니 팔짱을 낀 중년 여인이 빙긋이 웃고 있었다.
『어디서 왔소? 어디 가는 길이지?』
『… 그건 왜 물어요?』
『여관으로 갈라가든 우리 집으로 갑시다. 하숙비도 싸고 돈이 모자라면 한 달 후도 좋아!』
『………』
마치 아는 사이 같이 친절한 말투다.
『아즈머니 댁에 하숙 치나요!』
『음. 내가 잘해줄태니 가요!』
『하숙은 하고 싶지만 지금 당장은 돈이 없는데』
『괜찮다니까 내가 봐 주지… 가. 갑시다』
그는 냉큼 「트렁크」를 받아들고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