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56) 작별 ②
발행일1964-07-05 [제429호, 4면]
딕슨이 떠난 후 나의 생활에는 변화가 왔다.
첫째 내 마음은 하나의 안정을 얻었다. 아버지를 적대시 하지 않고 될 수 있으면 그와 융화하고 싶었다.
딕슨이 두고간 백「달라」가 있었으므로 그 돈을 가지고 어디든지 자유롭게 떠날 수가 있었지만 한화로 바꾸어 5천원은 아버지에게 주었다.
『딕슨이 얼마를 주고 가더냐?』
아버지는 돈을 받고 기뻐하면서 한편으로는 내 수중에 남은 액수를 궁금해한다.
『우리 돈으로 만원 주고갔는데 오천원은 내가 쓸데가 있어요…』
그 당시의 환율에 의하면 7·8천원이 더 있었으나 감추었다.
『어디다 쓰려느냐?』
『…부라운 상사가 영문 「타이프」를 할 줄 알면 부대에 취직을 시켜 주겠다고 하였거든요. 그래서 「타이프」를 배워야 해요. 또 회화 공부도 하러 다녀야 겠어요. 좀 더 영어를 알아야 해요.』
『……』
아버지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이미 어제의 어린 소녀가 아님을 내 자신도 느꼈지만 아버지도 그것을 느끼고 있는듯 했다.
『「타이프」만 칠 줄 알면 너를 취직시켜 준다고 하더냐?』
『그렇다고 지금 얘기하지 않았어요』
같은 말을 되풀이해서 묻기에 무심코 툳쏘는 어조가 되었다.
『월급은 얼마나 준다더냐?』
『그건 안물어 보았지만, 아무리 적게 주어도 오천원은 줄거고… 아마도 돈 만원은 되나봐요!』
『어떻게 아니?』
『부라운 상사 말이 너는 머리가 좋으니까 두달이면 「타이프」를 마스터 할 것이다. 두달 후면 딕슨이 보조하기로 한 돈을 네 자신이 벌 수 있게 될 것이다 라고 하였거든요.』
『…그럼 부지런히 「타이프」 를 배워라-』
나보다 더 바쁜듯이 말한다.
『…학교는 어떻게 하지?』
『그까짓 졸업장이 문젠가요? 다 아는걸…』
『그래도 고등학교에 들어 가려면 졸업장이 필요하지 않니?』
『고교입시자격 검정시험이 있으니 걱정 없어요.』
아버지는 그 이상 아무 말도 안했다. 나는 교복에서 해당이 되어 평소에 입고 싶던 「후레아 스카트」도 사고 「브라우스」도 사고 「세타」도 샀다.
아침 아홉시부터 저녁 다섯시까지는 「타이프라이타」강습소에 다니고 저녁에 돌아와서는 이른 저녁을 먹고 일곱시부터 아홉시까지 두시간을 영어 공부하러 다녔다. 고급 영어라 대학생이 많았고, 성인들도 더러 있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열두시까지 자습을 했다.
일주일쯤 지나니 신에 안차서 새벽여섯시부터 한시간 동안 미인 여자가 직접 가르치는 회화 강습소에도 다녔다.
나의 하루의 생활은 멀거니 잡념을 둘 틈이 없을만큼 꽉 차 있었다. 그리고 내일을 향하여 한걸음 한걸음 전진하는 것을 스스로 느꼈다. 열두시에 자고 아침 여섯시에 일어나면 어떤때는 고단했으나, 나는 조름을 박차고 찬물에 세수를 하고는 정신을 차였다. 서투른 노래가 내 입에서 수시로 나왔다. 아버지도 처음 며칠은 나를 감시하듯이 「타이프」 강습소에도 와보고 영어 강습소에도 삐죽 얼굴을 내밀었으나 얼마후부터는 특별히 볼일이 있기 전에는 오지도 않았다.
그간 딕슨한테서는 일본 「고배」(神戶)에 기항했을 때에 엽서가 왔고 「호노루루」에 도착했을 때는 긴 편지가 왔다.
엽서나 피봉편지나 다 「아이러브유」로 가득차 있었다.
그의 고향인 「오하이오」주에서 편지가 온 것은 내가 새로운 생활로 들어선지 오주일이 되던 비가 몹시 쏟아지는 날이었다. 비닐우산을 사서 받쳤지만 워낙 굵은 빗줄기가 내리닥쳐서 아랫 도리는 탑삭 젖어서 저녁에 집에 들어서니 아버지가 편지를 내준다.
편지 내용은 여전니 「아이러브유」에 가득차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군에 다시 복무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나,
드디어 설복을 시키고 한국에 갈 수속을 밟는 중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부라운 상사 편으로 백 「달라」를 송금했다고 했었다.
백「달라」 부친말은 빼고, 그대로 아버지에게도 옮겼다.
그 이튿날도 새벽부터 댓족 같은 굵은 빗줄이 내리쳤으나 일과대로 다섯시 반에는 눈을 떴다.
한번쯤 쉬라는 아버지의 말은 듣지도 않고, 여섯시 회화공부에 갔다.
수강자가 이십명 가량 되었는데 온 사람은 불과 다섯명 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미인교사가 가르치는 「인트내이숀」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였다.
옷이 젖어 아랫도리가 축축했으나, 나에게는 즐겁고 보람있는 시간이엇다.
「타이프」 강습이 노는 일요일, 혼자서 몰래 부평에 가서 딕슨이 부친 돈을 한화로 바꿔 만원만 찾아왔다. 지난달 모양 오천원은 아버지에게 주고 남은 것은 원사금들을 내고 나의 용돈으로 간직했다.
한달반쯤 되니 나의 「타이프」 솜씨는 오개월 배웠다는 여자와 맞섰다. 두달이 가까와 질 무렵에는 능히 그를 뒤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후 딕슨한테서 서신이 끊어진 것이 궁금하고 조금씩 불안이 설레었다.
「아이러브유」에 가득찼던 전날의 편지를 생각하고는 걱정을 밀어 던졌다.
하루는 밤 열시가 지나 영어강습을 마치고 종로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공장 직공 비슷하게 헌 작업복을 입은 진호와 마주쳤다.
『어딜 갔다가 이렇게 늦게 돌아가요』
진호는 오빠같은 어조로 말한다.
『영어 공부하고 오는 길이야요!』
『밤에 영어공부 하러 다니나?』
『네에』
진호는 내 옷 모습을 내려다본다. 나도 그의 학생답지 않은 모습을 살폈다.
『왜 그런 복색을 하고 있죠?』
나는 물었다.
『밤에는 직공이야요.』
진호는 조금도 자신을 비하하는 기색이 없었다.
『나순이는 요즘 학교에 잘 다녀요?』
『나요? … 낮에는 「타이프」학교에 다녀요!』
『타이프?』
진호도 놀란다. 이때 버스가 와서 나는 먼저 올라탔다. 진호는 무언지 나에게 하고싶은 말이 남은 얼굴이었으나, 이때 버스는 달리고 말았다.
『딕슨의 얘기를 해버릴걸 그랬나!』
나는 이런 생각을 하였다. 진호가 아직도 자기와 나 사이에 어느 밧줄이 이어져 있는 줄 알면 곤란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는데 딕슨에게서는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이제는 영어공부나 「타이프」에도 정신이 통일되지 않을만큼 초조해진다. 그날도 두시간 동안의 밤 공부시간을 절반은 막연한 불안감에 싸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데 전날과 같이 버스 정유장에서 진호를 만났다. 진호는 전에 입엇던 작업복을 그져 입고 있었다. 마침 그때 진호가 타야할 버스가 왔는데도 그는 타지를 않았다.
『다방에 가서 차라도 마십시다!』
목도 마르기에 따라갔다.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을 미리 막는 의미에서 디슨과의 사이를 사실대로 얘기했다.
성난듯한 얼굴로 듣고 있던 진호는 바닥에 조금 남은 커피를 훌쩍 마시더니
『이땅에는 나순이를 그만큼 애끼는 사람이 없어서 하필 딕슨과 결혼약속을 했나요?』
하며 쏘아본다.
『딕슨 이상의 애정을 나는 보지 못했어요!』
성난듯이 나도 댓구를 했다.
더이상 진호와 얘기하는 것이 딕슨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내가 차값을 내고 먼저 다방을 나섰다.
진호는 쫓아와서 차값을 나의 손에 억지로 쥐어주는걸 뿌리치고 버스에 탔다.
그러나 이날밤 나는 의외의 소식을 딕슨에게서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