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議會(공의회) 2會期(회기)의 決算(결산)
議案 「데·에끌레시아」 가지고 始終
重要 고비 다 넘겨
完成年度에 큰 期待
발행일1963-12-15 [제403호, 1면]
12월4일로서 제2차 바티깐공의회 두 번째 회기를 종료했다. 이번 회기를 합쳐서 그간 대략의 과정을 중점적으로 적기해보겠다.
그러니까 지난 9월30일 의안 「교회의 성질」을 상저해서 그 각장을 토의하면서 토의 종결을 본 것은 넘겨가다가 11월18일에 와서는 그리스도교도의 통합을 전제로 하는 「교회일치」 의제로 들어가서 제2회기 끝날에 도달했었다.
공의회 진행 과정을 크게 잡아보면, NC통신에 의한 논평자들이 사용한 용어 그대로 구질서(舊秩序)가 신질서(新秩序)로 대치하는데 없지 못할 논전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사항이 투표에 회부된 결과는 항상 신질서가 절대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그 상황을 이렇게 대별해 볼 수 있다.
①주교들이 교회를 통치하는데 있어서 보다 큰 직무를 맡는다는데 명백한 찬성을 표시했다.
②교회의 공식예배를 간소화하는 개혁과 미사 및 성사를 집행하는데 현대어 사용을 승인하였다.
③교회가 신문 라디오 및 「테레비」를 이용하는데 관한 원칙을 채택했다.
④현대 가톨릭 성직 안에 종신부제직(副祭職)을 부활시키는데 찬성을 표시했다.
이만한 결과에서 본다면 새 질서가 _나갈 수 있는 여지는 충분했었다.
첫 회기(1962년 10월11일-12월7일)에서는 비밀에 붙이던 것을 이번 회기에서는 이를 대폭 완화하고 보도와 논평을 활발히 해갔었다. 회의 진행을 4조정위원(의장단)에 일임한 것도 특색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베르기의 세낭 추기경 독일의 되프호너 추기경 이태리의 레르까로 추기경 및 포교성성장관 아가지아니안 추기경이었다.
63명의 비(非)가톨릭 대표들이 초청된 참관대의원(公式名稱) 또는 그리스도교 일치국 초청인사의 자격으로 참석했었다. 이 수효는 첫 회기보다 18명이 더 많았다. 바오로 교황의 특별조치로 15명의 평신도 대표를 참석시킨 것도 특기할만한 일이었다. 세낭 추기경은 여성대표도 초청되어야 한다고 했다. (10월22일) 그는 또한 수사, 수녀회의 큰 단체 대표도 초청될 것을 강조했었다.
이번 회기의 개회 약 한 주일 앞서(9월21일) 「로마」 행정부 소속원들에 준 바오로 교황의 말씀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교황께서는 「로마」의 기구(機構)를 간소화하고 지방에의 분권(分權)을 시사했었다. 이 문제는 공의회 단상(壇上)에서 논급되었는데
①「로마꾸리아」 요원을 초국가적으로 구성한다(현재는 이태리인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
②동 요원들은 「교회 일치」에 관한 특별훈련을 받는다.
③지방주교들은 지방을 바탕으로 「로마」의 직무를 더 많이 맡는다.
④지방주교들을 「로마」에 기용한다는 것이었다.
교황께서 「교회일치」에 언급했던 것도 중요했었다. 『우리는 겸손히 천주께 용서를 청하고 우리로 인해 형제들이 상처를 받았다면 이 또한 사과해야 한다』고 했었는데 비(非) 가톨릭 대표들은 이 말을 듣고 『이는 개혁 이래 교황으로부터 그러한 감사한 말씀을 듣게된 것은 처음이다』고 했다. 10월9일 라띤 전례의 미사성제에 현대어를 사용하기로 승인했다.
10월29일 동정성모에 관한 의제로 따로 설정하지 않고 「교회의 성질」 의안에 포함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교회의 성질에 관한 토의에서 주교단의 단일성(單一性)과 종신부제직(副祭職)을 부활하는 두 문제는 찬·반을 보여준 것이었다. 이 두 문제를 참고투표에 붙인 결과 둘 다 찬성되었다. 10월30일 동 투표 끝에 잠시 휴회에 들어갔다.
11월5일 의안 교회(데·에끌레시아) 의제 5장이 되는 「주교들과 교구행정」이 상정되자 대단한 논전이 벌어졌다. 빈_대주교 같은 분은 동 안은 시작과 끝이 분명치 않고 1963년 3월 「로마」 근교의 주교들과 「로마」의 전문 위원들만이 모여서 급조(急造)한 것이라고까지 비난을 보냈다. 이때부터 의사(議事)는 부진한 감을 주었고 토론의 마당은 불을 뿜는 같았다. 한편 신학위원회는 주1회 회합을 연일 열게되었다.
그 중에서도 극적인 장면에 도달한 것은 11월8일 「케룬」(西獨)의 프링스 추기경이 성청 검사성성(劍邪聖省) 직무를 비난한 것이었다.
그는 검사성성의 직무는 현대에 맞지 않으며 『신자들에 해를 끼쳐주고 교회 밖에서 「스켄달」을 장만하는 근원이다』고 화살을 보냈다. 이에 맞서 오따비아니 추기경은 그같은 비난은 교황의 최고통치권을 침해한 것임을 들어서 강력한 응수를 했었다.
11월8일 새 의제 「교회일치」를 상정시켜 긴장된 분위기를 바꾸고 비(非)가톨릭측을 전연 비난하는 일이 없이 오직 이해(理解)를 증진시켜 갈 수 있는 진지한 태도로 발언을 계속해갔다.
이에 앞서 각 공의회 위원을 대폭 증강한 것은 공의회 촉진에 박차를 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동 의원들은 1964년 9월14일-11월20일까지 있을 제3회기의 결정에 따라 새로 준비사무에 들어서게 되었다.
비(非)가톨릭측과의 접촉의 길을 여는 방도로 비(非)가톨릭 성직자 앞서된 혼혼(混婚)을 인정하고 비가톨릭 종교행사에 참석하는 것이 허용되며 그쪽 지성인과 제휴해서 연구활동을 할 수 있는 방도 등이 제의되었다.
세낭 추기경(의장단)은 토의대상이 된 것을 투표에 붙이지 않는 것은 좀 더 냉각기를 가지는데 있다고 했다.
대체로 이렇게 짜여진 「스케쥴」과 긴장된 분위기로 일관했던 이번 제2회기는 완전한 그 진로(進路)를 열 수 있었다. 다음은 모든 완성에만 진력할 것은 자명한 것으로 내다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