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57) 작별 ③
발행일1964-07-12 [제430호, 4면]
집 대문에 들어서기가 바쁘게 아버지는 딕슨에게서 편지가 왔다고 반갑게 소리친다. 편지 피봉도 읽을줄 모르는 아버지의 말이기에 반신반의하며 받아 보니, 과연 발신지가 아직도 그의 고향으로 된 딕슨의 서신이었다. 아버지가 서두는 바람에 짐짓 반가운 마음은 속으로만 넣고 얇삭한 항공우편의 모서리를 가위로 천천히 잘랐다.
전과같이 「아이 러브 유」로 가득찬 문면을 예상하며 펴 보앗더니 뜻밖의 사연에 부딕쳤다.
『…어머니는 내가 코리아에 가서 군에 재복부하는 것을 극력 반대하므로 갈 수 없게 되었다. 대단히 미안스럽게 생각하나 나의 입장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멀리서 나순의 행복을 빈다….』
몇번이고 눈을 의심하며 거듭 그 귀절을 읽었다. 허두는 인사말과, 재복무 수속이 매우 까다롭다는 말이 쓰여있을뿐 그다지도 되풀이 하던 「아이 러브 유」의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뭐라고 했니?』
기색이 변한 내 얼굴을 바라보며 아버지도 걱정스러이 묻는다.
『그 자식 거짓말쟁이야!』
하고 , 나도 편지를 내 던졌다.
『안온다는 거냐?』
『저의 어머니가 못가게 한대요.』
아버지는 방바닥에 떨어진 편지를 집었다. 이해하지도 못하는 문면을 멀거니 들여다 본다.
나는 일부러 태연한척 휘파람 소리를 내며 건너방으로 건너왔다.
혼자가 되자 챗상에 특을 고이고 앉아서, 떠나던 날, 비오듯이 눈물을 흘리던 딕슨의 모습을 생각했다.
『개같은 자식, 떠날때 울지나 말지!』
나는 혼자 그의 욕을 했다.
아버지가 편지를 들고 내방으로 들어섰다.
『딕슨이 처음에는 너를 좋아 했기에 너한테 그만큼 한 것이 아니겠느냐? …아마도 저의 고향에서 딴 색시한테 장가들게된 모양이구나?』
나도 딕슨이 흘리던 눈물이 거짓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한달전의 편지만 하더라도 그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었다. 근자, 한달 사이에 그의 마음을 잡은 여자가 나타난 것이 분명했다.
단지 어머니의 반대로 한국에 올 수가 없었다면, 아직도 「아이 러브 유」만은 남아있어야 할 것이었다.
생활 수준이 높은 미국의 중류가정의 처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자가용을 손수 몰고 찾아오는 그 여자 옆에 같이 타고 「드라이브」하는 광경!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그들의 생활을 상상하니 내 자신의 꼴이 걸레같이 구기적 해보인다.
『…그까짓 자가용이 제일인가?』
나는 무심코 소리를 내어 말했다.
『자가용이 어쨌다는 거니?』
아버지는 묻는다.
『그런 계집애 하고 연애하고 결혼 하래지 뭐!』
『그런 계집애가 누구니?』
『…아무것도 아니야요!』
나는 아버지하고 얘기하기도 싫었다.
『몇달 돈이나 부쳐 준 뒤에 그 자식 맘이 벼하든지 할끼지!』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며 자기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날 밤은 잠이 안오고 딕슨과 「데이트」하던 지난날의 장면이 오락가락한다.
특히 내가 「지아이」들에게 희롱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분개하던 딕슨의 얼굴! 그들과 싸와 성한 앞니 두개를 부러뜨리고 돌아오던 일 「해리콥터」 앞으로 가면서, 눈물에 어리어 몇번이고 돌아보던 그 눈동자? 그때는 그 모든 것이 진실이었다.
(진실은 꽃과 같이 허무한 것인가?)
나는 이런 회의감에 잠기고 말았다.
다음날부터 열심히 다니던 「타이프」학원도 집어치우고 영어공부도 그만두었다. 낮에는 삼류 영화관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밝은 태양이 싫어, 연속상영하는 것을 세번이나 거듭 보고 어두워서 나온 적도 있었다.
일주일 후에는 나도 내머리 속에서 딕슨의 두글짜를 멀리 내 던지고 말았다.
갑자기 몸과 마음이 가뜬해 진 것 같다.
그가 쉽게 내던진 진실을, 나도 아침밥 먹듯이 내던져야겟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하루, 영화구경을 하고 저녁에 돌아오는 길에서 길을 묻는 미군장교가 있었다.
흑인과 백인의 퇴기인양 피부색이 누르까마작 하고 키는 동양사람의 중키만했다. 입술은 두툼했으나 갈색 눈동자가 시원스런 청년이었다. 그가 찾는 곳은 「코리아 하우스」였는데 길을 가르쳐 주어도 웃으며 알 수 없으니 같이 좀 가줄 수가 없느냐고 한다.
뻔뻔스런 녀석이라고 생각했으나 할일도 없는 때라 그와 나란이 「코리아 하우스」 문전까지 갔다.
『나읟 ㅗㅇ반자가 되어 같이 들어갈 생각은 없느냐?』
그가 말한다.
『너희들이 초대받아 가는데 내가 따라가도 괜찮으냐?』
『상관없다.』
『오케이!』
나는 허전한 내마음을 메우기 위해서 그를 따라 들어갔다. 사실은 말만 듣던 「코리아 하우스」의 구경도 좀 하고 싶었다.
들어가보니 미군장교들만 약 백명 가량 모인 자리에서 한국고전무용이 있고, 한국음식이 차려져 나왔다. 미군 여자들도 십여명 있었는데 그틈에 끼니 나의 존재는 별로 눈에 뜨이지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나를 유심히 보지를 않았다. 여흥과 식사가 끝나고 밝은 백광등이 비치는 넓은 뜰악을 제가금 거닐 무렵, 얼굴이 예쁘게 생긴 소위 하나가 우리 앞으로 왔다.
퇴기장교와 아는 사이인가 했더니 그는 나에게 말을 건넨다.
『너의 이름은 양나순이가 아니냐?』
『어떻게 내 이름을 아느냐?』
나는 놀랐다.
『나는 딕슨의 친구이다. 그는 나와 같은 고향이다. 딕슨에게서 너의 얘기를 듣고 알고 있다. 딕슨이 떠나던 날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딕슨은 너와 이별하는 것을 퍽 슬퍼했었다. 딕슨한테서 편지가 오느냐?』
『얼마전에 편지를 받았다.』
『너는 딕슨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겠구나?』
『그는 안돌아온다!』
『어째서?』
『아마 거기서 「파트너」가 생긴 모양이더라!』
『설마!』
소위는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한다. 퇴기장교는 샘이 많은 모양으로 나를 끄고 조용한 곳으로 와버렸다.
소위는 「콜라」잔을 손에 들고 나무그늘에 서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소위가 보라는 듯이 일부러 퇴기장교한테 가까운척 했다.
퇴기장교는 눈치가 빠른 사나이 같았다. 소위와 나의 대화에서 나의 입장을 「켓취」한듯 이렇게 말한다.
『너 같이 고운 여성에 대해서 약속을 지키지 않는 놈은 틀려 먹었다!』
『너는 한번 약속하면 죽을때까지 지키겠느냐?』
『나는 그렇다!』
『오늘의 지실은 내일의 진실이 아니야!』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진실은 꽃과 같단 뜻이다!』
『아직도 모르겠다.』
『호홋홋…』
나는 퇴기의 두툼한 어딘지 어리숙한 입술을 바라보며 공연히 크게 웃었다.
『내 얼굴에 무엇이 묻었느냐?』
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쓰다듬는다.
「갈 시간이 되었다. 굿바이!』
하고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정원을 나와 문 밖으로 총총 걸음을 놓았다. 한길에 나오니 퇴기가 뒤에 따라 나오고 있었다.
『너는 친절했으니 너를 바라다 주고 싶다!』
『나는 거리를 잘 안다.』
『너와 다시 만날 수 있겠느냐?』
사나이는 웃으며 말한다.
『나는 영화구경을 잘가니 영화관에 오면 만날 수 있다.』
『어떤 영화관이냐?』
『서울 안의 영화관은 다 내가 다니는 곳이다…』
『서울의 영화관이 몇이냐?』
『아마 5,60은 될 것이다….』
『오우…』
사나이는 기성을 올리며 소리쳤다.
이런 농담 비슷한 얘기를 하면서 우리는 어느틈에 종로에까지 걸어왔다. 버스가 왔길래 「굳바이」하고 올라타니 바로 문턱에 진호의 두눈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