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방학」이라 할 때 해수욕 등산 숲을 생각한다. 「축일」이라 할 때 우리는 일하는 걱정을 잊어버린다. 「주일」이라 할 때 우리는 무엇을 연상할 수 있는가? 자유, 놀이, 여행? 물론 이러한 「이미지」도 기쁨을 줄 것이다. 그러나 여기 문제되는 것이 있다.
■ 鐘
주일날 왜 종을 울리는가? 우리에게 주일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종은 교회를 둘러싸고 모여있는 집들을 지배한다. 종소리는 방방곡곡, 들가운데 산 속에 숨어있는 집에까지 울려퍼져야 한다. 모두가 종소리를 들어야 한다. 모두가 불렸기 때문이다.
이 소리는 하늘에서 오는 것이다. 엿세동안 지상의 시민인 사람은 이 세속 일에 골몰했다. 그러나 주일은 이 지상을 위한 날 만이 아니다. 천주의 자녀요 성인들과 동향인(同鄕人)인 신자는 자기 아버지인 천주와 하늘의 성인들과 같이 살기위해 불린자이다. 주일미사에 영세자가 모이는 것은 의무적이라기 보다 차라리 영광이다. 그것은 다만 지상의 어떤 회합이 아니다. 그것은 간선된 자의 모임의 전조(前兆)다. 그것은 이 세상 마칠 때 우리의 부활을 알리는 예언적인 「제스추어」이다.
시계는 지상의 시간을 가리킨다. 그러나 주일날 울리는 종은 신자들은 이미 영원의 사람이라는 것을 선포한다. 한 주간이 시작하는 이날에 인간은 기쁨을 무시할 수 없다. 그것이 큰 것이 되기를 희망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 기쁨은 그것을 잘라버려서는 안되는 한가지 원천을 가지고 있다. 주일은 축일이다. 인간이 이 축일에 천주로부터 초대되었다. 미사없니 주일이 없다.
우리는 성찬에 우리의 형제들과 함께 모인 천주의 자녀란 깊은 즐거움을 재발견하자.
■ 食事
전통적으로 우리 가정에서 주일식사는 주간식사보다 더 좋다.
주일날은 시간이 있다. 이날 만큼은 가정에서 서로 만날 수 있다. 먹는 것 만이 문제가 아니다. 같이 사는 것이 더 중하다. 주일은 가정의 날이다. 사랑의 날이기 때문이다.
주일날은 그저 잘 먹는다. 잘 먹어야 한다. 그것이 아니다. 그것을 미사와 관련시켜야 한다. 지상에서의 잔치는 천상잔치의 「이미지」요 연장(延長)이다. 주일싯사를 격식화(格式化) 시켜야 한다는 것이 아니요 이 식사는 그리스도교적 의식(意識)을 가지는데 있다.
그것은 또한 인간 기쁨에 반대하는 것도 아니다. 신앙의 이 관점이 몇가지 문제를 제시한다.
우리는 혼자 있는 자들을(독신자 · 과부 · 노인 · 병자 · 걸인들) 생각해본 일이 있는가? 주일날 우리의 식탁에 이런 자들을 초대할 수는 없을까? 그들과 함께 성체의 떡을 나눈후 우리는 그들이 또다시 고독으로 돌아가는 것을 버려둘 것인가. 그러나 반대로 주일식사가 가정의 어머니들에게 수고를 더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어떻게 문제가 해결될 것인가?
이 두가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한 우리가정에 주일이란 없을 것이다.
■ 衣服
일할 때 입는 옷이 따로 있고 주일날 입는 옷이 따로 있다.
사람은 자기 노동의 결실에서 덕을 얻을 시간이 꼭 와야한다. 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휴식 즐거움 축일 등은 인간 생활에서 제 자리를 가지고 있다. 교회 자신도 그 전례가운데 의복을 중요시한다. 영세하는 자는 흰 옷을 입는다. 이 흰 옷을 요왕이 묵시에 본 간선자들이 입고 있다.
미사를 거행하는 사제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성직자들은 특별한 옷을 입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사제의 피복료(被服料) 제대포(布)의 세타 ㄱ본당교회의 청소 등은 주일의 의식을 가져야 할 신자가정이 책임져야 할 것이라는 것을 자문해 볼 일이다.
우리는 적어도 남누한 옷을 입고 나타나거나 성당을 해수욕장이나 「패션쇼」를 벌리는 장소로 착각하고 나타나서는 안되겠다는 가장 초보적인 애덕이 있어야 할 것을 알자.
요안 23세께서 「파리」주재 교황청 대사로 계실 때의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외교관례에 의해 교황청 대사가 언제나 수석에 앉는다.
또 농질 하시기로 유명한 롱갈리 추기경이던 교황님은 그러한 석상에서도 언제나 화제의 주인공이 되곤 하셧다. 하루는 어느 연회석상에서 팔 어깨, 앞 가슴이 유난히 드러난 의상을 입은 귀부인이 롱갈리 추기경 바로 옆에 앉아있었다.
식사가 끝날무렵 롱갈리 추기경이 「대서어드」로 사과 한개를 그 부인에게 집어주엇다.
어떤 익살맞은 남자손님이 다른 많은 과일 중에 하필 사과를 준 이유를 물었다. 이때 롱갈리 추기경, 『에와가 사과를 먹은 후에 비로소 부끄러움을 알았지요』 이러한 악의없는 농가운데 의미시망한 교훈을 하셨다.
오늘날 성당 안에 가보면 소위 동방예의지국의 국민이 언제 이렇게 서양화했는가 싶어 한심하다. 에와는 사과를 먹고 부끄러움을 알았다니 오늘의 한국여성도 사과는 어지간히 먹었을텐데 부끄러움을 모르니 웬일일까.
구미(歐美)의 성당에서도 소매하나도 없는 심한 노출형 옷을 금하고 있다. 요즘 미국 해수욕장에 나타난 「톱레스 스트」로 세계에 화제를 일으키고 있지 아니한가. 정숙은 여자가 꼭 지녀야 할 「에띠게뜨」 이상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