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은 제2차 「바티깐」공의회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오지리 「비엔나」대주교 쾌니히 추기경이 얼마전 미국 방문 때 한 강연의 요지이다.
가톨릭교회는 오랜 역사를 두고 여러가지 사회체제 안에 살아왔다. 「봉건사회」 「도시국가 체제」를 겪었고 「절대군주주의」와 「독재체제」하에도 있었다. 박해시대에는 국가와의 협조가 불가능하였지만 교회는 기회주의에 떨어지지 않았고 구원의 「메시지」를 수정한 일이 없다. 불의(不義) 앞에 굴복하지 않으면서 교회는 차라리 박해르 감내하였다. 현대에 이르러 교회는 여러나라에 있어 공공연히 또 의당히 민주주의를 옹호한다.
이것은 기회주의에서가 아니다. 또는 정권과의 타협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시대의 여건에 맞추어 교회가 그 본래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다.
민주주의는 물론 유일한, 가능한 생활양식이 아니다. 또 그것은 교회의 생존과 사명완수를 위해 희망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사회체제도 아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현대세계를 위해 가장 좋은 사회체제일 것이다.
교회가 과거에 있어 지나치게 그 시대 환영에 의존되어 있었다고 비난하는 것은 오늘 하나의 풍조같이 되었다. 모든 악에대한 책임이 교회에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 선악의 판단은 과거를 돌아다보는 그 시대의 편의 여하에 따라서다.
그러나 이와같은 것은 지성의 오만이 아닐까? 수난에 처해있고 투쟁하고 있는 교회는 그 현세모습에 있어 인간의 단체이며 따라서 세상과 시대의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적인 면에 있어 교회는 자연히 보호받을 수 있다. 교회는 전통을 고수하려고 힘쓰게 된다.
이것은 교회가 위임받은 복음이 가장 혁명적인 것이라는 점과는 너무나 대조적임을 부인할 수 없다. 과연 그와같은 보수적 태도에는 주께서 교회를 세우시면서 교회에 약속하신 성우(聖祐)에 대한 신뢰가 결핍되어 있다. 그같은 경향에서 교회는 가끔 본래의 임무가 아니면서 기존 사회체제를 옹호하는 투쟁에 휩쓸려 들어갔다. 투쟁은 대외적으로도 있었지만 교회안에서도 있었다.
그래서 새로운 생활양식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언제나 난관에 부딪쳐야만 했다.
요안 23세 같은 친히 장래로 향한 문을 여는 교황은 몇세기를 통하여 한두분 있을 것이다. 요안 23세도 모든이로부터 이해된 것은 아니며 교회 안에서도 그를 이해치 못한 이들이 있었다. 이와같은 보수적 경향은 19세기에 있어 민주주의에 대한 교회의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그 당시 교회는 대체로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사람을 교회의 적으로 보았다. 수도원에 불지르는 자들! 사실 많은 민주주의자들이 그런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교회는 그와같은 반교회적 인상을 준 민주주의에 저항하여 자신을 변호해야 할 필요성에서 그 바로 민주주의적 양식을 취택하게 되었다. 세속적 자유주의 및 무신론적 「맑시즘」과 싸우는 중에 교회는 민주주의적 정치단체 조직을 고무하였다. 오늘에 와서 교회가 그 점에 있어 과오를 범하였다고 비난하긴 대단히 쉽다. 그러나 그 당시 역시 교회의 인간적인 면과 시대사조로부터 받는 제약성을 참작할 때 교회는 달리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오늘 교회는 교회로서 정권을 잡은 것도 없고 정당도 없고 사회적 특권도 향휴하고 있지 않다. 교회는 오직 그 신자들을 가졌을 뿐이다. 물론 이것이 교회이 참된 모습이다.
교회는 어떤 의미로 그 바탕에 있어서 언제나 민주주의적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언제나 만민은 다같이 천주의 자녀들로서 또 불사불멸의 영혼을 가졌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본질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이정해 왔기 때문이다.
교히가 과거에 노동자의 영혼보다 왕자(王者)의 영혼에 더 유의하였다면 그것은 왕자의 영혼을 더 값있게 보아서가 아니다. 그것은 치자(治者)를 통하여 더 효과있게 백성의 영혼을 구할 수 있다고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현대에 와서는 교회는 가톨릭이 소수인 곳에서는 민주주의를 지지하나 다수 세력을 차지하고 있는 곳에서는 이와 반대로 절대지배를 기도하고 있다는 비난을 가끔 받는다. 이는 중대한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비난을 뒷받침하는 것 같이 보이는 사실이 없는 바도 아니다. 가톨릭은 이런 비난에 반격을 가하는 것만으로 응해서는 안된다. 여기에는 신학적인 문제가 있다. 공의회 다음회기는 이를 크게 취급할 것이다.
내일의 전망을 말한다면 교회는 아마 그의 진리와 이를 서포하는 권리를 포가힘이 없이 스스로를 위해서와 같이 다른 종교를 위한 자유를 수락할 것이며 모든 인간의 사상적 자유 또한 존중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상대주의 앞에 굴복함이다.
이는 오히려 우리는 결국 승리를 거운다는 이념에서다.
민주주의 기회를 의미한다는 것이 그렇다면 교회는 기회를 어떻게 하는가?
과거에는 교회가 그리스도교 정당을 만들어서 이 기회를 이용하였다. 이같은 정치적 「가토리시즘」을 띤 환경에 있어서 교회의 권리를 __하기 위해 사실 그렇게 한 것일 수 있다. 그것은 교회의 정신도 아니요 목적도 아닙니다. 교회가 신앙을 입지 않고서는 정치적 유__ 장기에 걸쳐 한다.
이 때문에 __의 경우, __에 내린 사제__ 접적인 정치관계라 하는 금령을 1945년 재천명 하였다.
교회가 정치에 대해 초연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정치에 대한 무관심에서가 아니다.
반대로 교회의 정치에 대한 관심은 교회가 직접적인 영향을 정책수립에 가질 수 없는데서 더 크지 않을 수 없다.
또 그것은 교회가 어떤 나라에서든지 정치적 중립을 지킨다는 것도 아니다. 교회는 더욱 강력히 기본적인 문제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정치적 판단에 영향을 줄 탁월한 원리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정치에 관여하는 신자들에게 직접적인 지령을 내리지는 않는다.
정치인인 가톨릭신자는 교회로부터 그런 지령을 기대할 수도 없고 또 해서도 안된다. 그들은 자신의 이성과 양심에 따라 판단하여야 한다.
그리스도교적 정치운동을 한다는 것이 주교들의 지령하에 움직인다는 것이 아니다.
또 교회의 기치(旗幟) 아래 투쟁한다는 뜻도 아니다. 정치에 그리스도교적 책임감을 부여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교적 정치이다. 이와같은 책임감을 장려하고 강화하는 것은 교회가 할 일이다. 그러나 교회는 어떤 특정한 정책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교적 책임감에세도 같은 문제에 대하여 여러가지 방안을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라는 명칭이 붙었다 해서 반드시 좋은 정책인 것이 아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교적 책임감에서 나올 때 비로소 좋은 정책이 될 수 있다.
무엇이 좋은 것인가,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여기 대해서도 성경말씀이 제일 좋은 답이 될 수 있다. 즉 『그 열매를 보고 저들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마테오 7장 16절) (NC特信)
쾌니히 樞機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