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 내림은 이천년 전, 그러니까 과거에 속하는 일입니다.
헌데 이 내림이 장래에도 있는데 이 짓을 재림이라 합니다. 『그 날과 그 시(時)는 모르나니 성부 외에는 하늘의 천신도 모르고 인자도 모르나니라』(말구 63.32) 예수께서는 천주로서는 아시지만 성부만이 드러낼 권리가 있기 때문에 알려서는 안 되십니다. 이 재림은 인자(人子)가 성부의 영광 중에 천신들에게 옹위되어 공적으로 위엄 있게 오시는 것입니다.
그 날은 외인들에게 그야말로 구원의 날입니다. 그들은 마음으로 가난하고 물질적으로도 빈한했으며 억울하게 압박을 받아도 아무런 구원을 못 받았던 까닭입니다. 그들은 간선자가 됩니다.
성 바오로에 의하면 모든 조물들까지도 부패의 노예 지위에서 구원을 받아 천주의 자녀에게 마땅한 영광과 자유를 얻게하고자 또 그 때문에 이제까지 탄식하며 산고 중에 재생하기 위해 이 재림을 초조하게 기다립니다. (로마 8.19.12) 더구나 이미 성신의 첫 열매를 차지한 우리들은 얼마나 심중에 탄식하며 천주의 자녀가 되기를 즉 우리 육신이 구속되기를 양망하였읍니다. (로마 8.18.23)
셋째 내림으로 현재가 있읍니다. 성총으로 그 때 그 때 찾아보아 주시는 내림이요 현세에 살아있는 우리에게는 주의해야 할 참된 내림입니다. 천주의 이 내림이란 천주의 현장출현 즉 현존(現存)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면 둘이나 셋이 주의 이름으로 모인 가운데 계십니다(마두 18.20) 또 오셔도 드러나게 오시지 않읍니다. 『천주의 나라는 드러나게 이르지 아니하고 여기 있다 저기 있다도 하지 못할지니 곧 천주의 나라가 너희 속에 있음이니라』(루가 17.20-21)
예수의 선구자인 요안 세자도 예수께서는 벌써 오셨고 기다리던 메시아로서 우리 사이에 머물러 계신다고 똑똑하게 밝혔읍니다. 『너희 가운데 서신 자를 너희가 모르난도다』(요왕 1.26)이 「서신 자」는 예수로서 『보라 천주의 고양이시로다 보라 세상의 죄를 면하여 주시는 자』(동 29절)시였읍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를 맞아 들이기 위해서 멀리까지 쫓아다닐 필요가 없읍니다. 그는 언제나 계셔 주시고 우리 마음 안에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 아오스딩도 그 「고백」에서 자신 밖에서는 천주를 찾으려다 못 찾고 자기 안에 들어와서야만 찾아 만났다고 솔직히 고백하였읍니다.
조금만 주의하면 넉넉히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머무시는 예수를 찾아 얻을 수 있읍니다.
우리가 천주를 버리지 않는한 우리를 먼저 버리지 못하십니다. 우리를 내버리시는 것 같을 때도 우리가 그를 받아들일 준비만 되어 있으면 즉시 돌아오십니다. 이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촛점입니다.
그 때문에 천주의 이 세 가지 내림을 우리의 일상생활에 적용시킬 수가 있읍니다.
방미 지나 아침이 되면 예수의 탄생과 영세로써 받은 우리의 탄생을 생각하고 저녁에는 올 밤을 생각하고 하루를 막는 양심 성찰을 합니다. 낮 동안은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천주 앞에서 늘 대면하면서 지냅니다.
어디로 가야 내가 당신의 기운에서 멀리 떨어지겠나이까? 또 어디로 가야 내가 당신의 얼굴을 피하오리까? 내가 하늘로 올라가도 당신은 거기 계시고 내가 지옥에 가서 눕더라도 당신이 거기 계시나이다. 내가 새벽에 날개를 단다하더라도 내가 바다의 극변에 가서 산다하더라도 거기서도 당신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고 당신의 오른 팔이 나를 잡아 주시리라. (성영 139.7-10)
그러니까 우리는 이렇게 바랄 수 있읍니다.
『이는… 그리스도 신앙으로 인하야 너희 마음 안에 거처하시며 너희는 그 사랑에 뿌리를 박고 확고한 기초를 두기 위함이니라. 이에 모든 성도들로 더불어 능히(구원에 대한 천주의 계획과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얼마나 되는가를 깨닫고 모든 인식을 초월하시는 그리스도의(우리에게 대한) 총애를 옳게 인식할 수 있으리라. 이로써 너희는 천주의 온갖 충만하심으로써 충만하여질 것이니라』(에페소 3.17.19)
천주는 참으로 우리 사이에 거처하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자로서 모든 이가 애타게 지금부터 고대하는 엠마누엘이시다.
崔益喆 神父(서울 里門洞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