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福者(복자)로 모셔야 할 26위 순교사기] (21) 아릭수, 禹世英(우세영)
背敎길 되돌아 自首
丙寅年 殉敎者 中 最年少
발행일1963-12-15 [제403호, 3면]
「세필」이라고 불리던 그는 1846년 황해도 서흥(瑞興)에서 나서 18세 때에 비로소 영세하였다. 부모의 반대와 박해를 감수 인내하고 교회를 배반하지 않을뿐 아니라 도리어 부모까지 회두시키게 되었다. 병인년 2월 중순 유정률(劉正律)이 잡힐 때 여러 교우들과 함께 평양 논재에서 잡혀 평양포청에 갇힌 일이 있으나 불행히도 혹형에 못이겨 배교하고 나왔다.
그러나 즉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회두하여 순교할 마음으로 그 길로 평양을 떠나 서울의 정말구 회장집을 찾아갔다. 그 때 마침 회장집을 지키고 있던 포졸들이 『무엇하는 사람이냐?』하니 『내 스승을 만나러 왔소』하고 아릭수는 대답하였다. 나이가 젊고 또 비단 옷차림으로 미루어 보아 틀림없이 갖결혼한 그를 동정하여 피신할 기회를 주었지만 『내가 천주교를 믿는 고로 천리 길을 마다하고 여기까지 온 것이오』하여 고집한 끝에 자원하여 포청에로 잡혀갔다. 때는 오월 말엽이었다.
아릭수의 젊은 청춘을 아껴서 판관은 그를 배교시키려고 여러번 꾀하였으나 그는 판관의 달램과 위협과 혹형 그 어느 것에도 굴하질 않았다. 사형날인 3월11일 아릭수는 두 신부와 자기의 스승인 정회장과 같이 「새남터」로 들 것 위에 실려 나갔다. 그가 젊었던 까닭에 군사들과 또한 길가 구경꾼들의 이목을 끌었다. 포승과 좌석으로 매우 고통을 당하고 있던 아릭수는 호기심에 찬 군사들과 군중에게 『여러분 나를 좀 편하게 해주시오』하니 그들은 『못하겠다. 판정에서 너더러 배교의 한 마디만 하면 놓아주겠다고 했지만 배교를 안 하더니 이제 와서 무슨 말이냐. 하지만 이제라도 배교한다는 한 마디만 하면 놓일 것이다』라고. 이 때 군복을 하고 순교를 목격하고 있던 베드루.박순집이 용감히 군중을 뚫고 나와 그들을 책망하는 한편 아릭수를 좀 편하게 해주고 초성 목적을 묵상하도록 그를 권면하는 것이었다. 군문효수의 관습을 따라 휘광이의 칼을 받아 참수 치명하니 때에 그의 나이 21세, 새남터에서 그들의 생명을 용감히 바친 모든 순교자들 가운데서 최연소자의 영예를 차지한 것이다. 그의 시체는 후에 교우들이 장주교 외 다섯 신부의 것과 같이 거두어 「왯고개」에 묻었던 것을 시복 준비차 명동대성당 지하실의 정문 우측 두 번째 자리에 안장, 미구에 있을 시복의 영광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