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재일치는 오늘의 그리스도교 세계의 가장 큰 정신운동입니다. 구미에 있어 각 교회간의 활발한 대화접촉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읍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금년초 성공회 주최로 지도자간의 대화가 시도되었고 산발적으로 청구 · 대구 등지서도 1 ·2차의 접촉이 있었읍니다. 이제 우리는 적어도 그런 대화를 위한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보려는 의도에서 ①「우리나라에서의 대화의 필요성」 ②「그 가능성」 ③「그 내용」 ④「공의회에 대한 기대」 등 이상 네가지 설문으로써 「프로테스탄」 각 교회 지도자 되시는 분들을 지상 초대하였읍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오직 한분이시니까. 우리의 일치원리가 바로 이 그리스도이실 때 그를 통해 형제인 우리들의 합치는 반드시 있으리라 믿습니다. (編輯室)
原稿揭載 到着順, 앞으로 約3回 隔週 揭載
■ 姜元龍
敎理問題 등 避하고 社會事業 등 먼저해야
①對話는 必要하다.
「가톨릭」敎會와 非「가톨릭」敎會 사이에는 오랫동안의 치열한 論爭의 단계를 지나 피차에 論爭도 對話도 아닌 沈默의 時代가 길게 흘러왔다. 그러나 이제는 論爭의 時期도 아닌 對話의 時期가 되었다고 본다. 어떤 人間이나 制度를 神話하지 않는한, 아무도 對話의 必要를 느끼지 않으리만큼 오만해질 수는 없다.
②對話는 물론 可能하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에 비해 훨씬 더 힘들이라고 예상한다. 우리나라에 「가톨릭」敎會나 개혁파 敎會가 들어온 때는 西歐에서는 이미 치열한 論爭의 時期였던 관계로 韓國敎會歷史에서는 이 두 敎會 사이에 論爭이나 對話가 거의 없이 지나왔다. 그러므로 피차에 깊이 상한 감정은 없으나 對話를 할 수 있는 준비가 잘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派閥意識이 강한 民族의 性品이 敎會 안에도 깊이 침투하여 개방적인 것을 항상 위험시하고 閉鎖的, 消極的, 獨善的인 것과 信仰의 純粹性과를 혼동하는 意識構造가 널리 퍼져있어 對話는 쉽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소 어려울뿐, 결코 不可能하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에게는 이러한 결점들이 있기 때문에 다른 어느 나라보다 더 對話가 필요한 것이며 그러한 必要를 절실히 느끼는 사람들 사이의 對話는 한층더 쉬워질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③對話의 內容은 우선 敎理問題가 對話의 內이어서는 안되리라고 본다. 敎皇 요안 23세가 열린 자세로 「갈라진 형제들」에게 호소하고 나온 이래 서로가 폭넓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고는 해도 아직까지는 각기의 基本的인 敎理들이 달라진 것은 아니라고 본다.
敎皇의 地位나 聖典禮 등이 여전히 서로 쉽게 對話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가장 基本的인 敎理問題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信仰告白이 對話의 主題가 되어서는 안될 줄 안다.
맨 먼저의 출발은 共同祈禱에서부터라고 생각한다. 이 祈禱는 우리 사이의 分裂을 主 앞에 뉘우치는 內容과 요한복음 17장의 主의 祈禱 내용이 主題가 되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親交(KINONIA)」와 「奉仕(DIAKONIA)」에 주력하여야 하겠다. 심각한 討論은 하지 않을지라도 서로 親交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만들도록 노력하는 일과, 오늘 날 같이 도와주어야 할 이웃이 많은 이 나라에서 우리 모든 敎會가 지니고 있는 힘과 물질을 한데 합하여 보다 효과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일이 필요하며 또한 밖으로부터 받는 戰鬪的無神論을 哲學으로 하는 共産主義의 위협과 안으로 不正, 부패, 독재, 무질서의 위협과 전염병 같이 퍼지는 퇴폐적인 문화와 生活意識, 우범소년들의 문제 등이 對話의 主題가 되는 同時에 共同行動의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오랫동안 서로 막혔던 데서 생기는 어색한 기분들을 자연스럽게 풀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의식이 깊어감에 따라 서로 相異한 敎理와 制度問題도 솔직하고 담백하게 토론되어야 할 줄 믿는다. 여기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상대방의 의견을 겸손하게 경청하는 態度요 감정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④이번 공의회가 現敎皇의 열린 姿勢를 따라 全世界의 「가톨릭」 敎會 指導者들이 오늘까지 흔히 지녀오고 있는 閉鎖的, 排他的인 태도에 一大革新을 가져오기를 기대하며 구체적인 문제로 「가톨릭」이 絶對多數의 人口를 차지하고 있는 「스페인」이나 南美 여러나라와 같은 소위 「가톨릭」國家들에서 행하여지는 非「가톨릭」 敎會에 대한 모든 종류의 차별대우가 깨끗이 청산도리 수 있는 조처가 취해지기를 바란다.
또한 非「가톨릭」敎會와 敎會對敎會로서의 對話를 방해하는 모든 敎理들이 과감하게 修正되어지기를 바라는 바이다. 현재까지 對話를 할 수 있는 「무드」를 造成하는 데에는 놀라운 成果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으나 對話를 가로막는 여러가지의 基本敎理들에는 거의 손을 대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따라서 앞으로는 對話의 길을 막는 이러한 여러 문제들의 해결에 주력하여 주기를 바란다.
(筆者 서울 京洞敎會 牧師)
■ 張炳日
兄弟的 對話 너무도 當然
20세기를 기독교의 歷史的 轉換点으로 보고 싶다. 우리는 그 決定的인 두가지 계기로써 「에큐메니칼」운동과 제2次 「바티깐」 公議會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두가지 우직임은 모두 한결 같이 再一致를 展望하고 있으며, 쌍방의 보다 積極的인 對話를 가져 보자는데 있다. 우선 이 대화를 통해서만 「카토리시즘」과 「프,로테스탄티즘」의 問題点을 피차 理解하게 되며 可能한 길을 모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나라에서도 對話의 필요성을 적극 주장하고 싶다.
지금까지 우리는 같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兄弟이면서도 不_明한 관계와 심지어는 異敎視 해온 것은 역사의 審判을 받고도 남음이 있다.
실로 4世紀 남짓한 대화의 斷切은 너무나도 무서운 침묵이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설혹 세계가 다시 침묵하는 일이 있더라도, 우리 나라에서만은 서로의 가슴과 가슴을 열고 시원한 對話의 꽃이 피어지기를 고대한다.
한데 이러한 대화가 한국에서도 可能하냐의 문제에 대하여 필자로서는 肯定的인 대답을 하고 싶다. 우리들의 대화가 곧 「決定」이 아닌 限 불가능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이미 「바티깐」 공의회에서도 公式的인 對話의 태세로 나오고 있으며, 그 필요성을 절감하여 진행중에 있는 만큼 하등의 구애됨이 없을 것이다.
또한 형제끼리 이야기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런 일이다. 피차의 입장과 문제점을 토의하고 이야기 하는 가운데 理解하게 되고 나아가서는 하나로 지향할 수 있는 「무드」가 형성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막연한 산발적인 대화는 불필요하다기 보다는 非能率的이기 때문에 對話의 主題와 대화할 수 있는 자리와 모임이 있었으면 좋겠다. 여기서 필자는 對話를 위한 모임을 제창하는 바이다.
그리고 對話의 內容으로서는 먼저 再一致의 가장 基本的인 課題인 동시에 基礎 工事로 볼 수 있는 「聖書」를 제1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서 이외의 우리들의 對話를 가능케 할 _点은 없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最近 美國의 新舊敎 神學者들이 주동이 되어 추진하고 있는 聖書統一運動(ANCHORBIBLE)은 매우 중대한 사업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이 빠르면 빠를수록 再一致의 「카이로스」는 가까와지기 때문이다.
이른바 公聖經 문제가 對話의 내용으로 등장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聖書 解釋學을 中心으로한 對話이다. 실지 敎理的인 問題를 중심한 대화보다 성서 해석학적인 面에 더 접근할 수 있는 可能性이 많다고 본다. 敎理는 이 聖書解釋을 母體로 하여 形式되기 때문에 2次的인 線上에 선다.
셋째로는 傳統의 문제이다. 이상의 두 주제보다도 건너기 어려운 강이 아마도 이 傳統의 문제인듯 같다. 「프로테스탄티즘」의 「COLA SCRIPTURA」와 「啓示의 二重的根源」(DE DUPLICI FRONTE REVELATIONIS)을 주장하는 로마 가톨릭의 神學的 「데오리아」 사이에는 허다한 문제가 가로놓여 있다. 이런 거창한 주제를 한국에서 취급하기엔 벅찰지 모르나 對話의 주요 내용에서 빠뜨릴 수는 없을 것이다.
아울러 敎皇의 無誤性 問題라든지, 聖母 마리아 崇拜論, 敎職制며 機構며 敎理上의 여러 문제가 있지만, 이런 것은 아직 한국에서 논의할 성격이냐도 문제이려니와 토의해도 實效가 있을 것도 아닌상 싶다.
끝으로 한국에서 쌍방의 선교문제라든지 한국의 전통과 異敎地盤에 대처할 자세며, 한국의 역사와 文化 연구 같은 것도 對話의 내용으로 고려했으면 싶다.
마지막으로 「바티깐」 公議會에 대하여 그 前途야 어떻든 우선 우리로서는 환영의 찬사를 아끼지 않고 싶다. 이미 제1차 공의회에 비하여 볼 때 상당한 진전과 改革을 보여주었고 統一偍進事務局(=一致局)까지 설치하여 敎會一致를 항구적 과제로 삼은 것만해도 기독교 역사상에 특기할만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쌍방의 相距는 여전히 제자리 걸음에서 주춤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므로 공의회에 바라는 것은 우선 항구적인 神學的 對話의 넓은 廣場을 마련해 두라는 점이다. 그리고 언제나 접근할 수 있는 「무드」를 형성하는데 인색하지 말기를 바란다. 물론 오랫동안 나누어졌던 만큼 再一致 역시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또한 그렇게 기대하는 사람도 없다. 우리는 성급한 合一보다는 충분한 이해와 합의와 성숙을 통해서 완전한 지반 위에서의 一致를 이루어야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敎皇 至上權과 無誤性이 敎會一致의 가장 큰 난관이라는 점을 충분히 고려해주기 바란다. 아울러 再일치에는 언제나 동등한 입장이 전제되어야 하므로 쌍방의 너그러운 이해와 태도와 방법이 언제나 선행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어느 한쪽으로 합치는 통합은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면을 충분히 고려하여 근본적으로 일치점을 발견하기까지 진지한 연구와 告白을 지속해 주기를 기원할 따름이다.
(筆者 基督敎思想 編輯長)
■ 李相根
一致運動 順次的으로 聖書飜譯 등 같이 하자
①우리나라에서도 對話가 必要하다고 생각합니다. 宗敎改革 이후 極과 極으로 分裂되었던 新舊 양교가 對話姿勢에 선 것만해도 극히 감사할 일입니다. 우리는 宗敎改革에 하나님의 신비로운 攝理를 느낍니다.
그것은 「프로테스탄티즘」이란 새로운 運動을 일으킨 同時에 거기에 극렬히 反對하면서 「가토리시즘」에서도 無首의 改革이 進行된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피차 理解할 수 있는 機運이 世界的으로 감돌고 있는 듯합니다. 「가톨릭」은 「프로테스탄」에서 무엇을 찾으려 하고 「프로테스탄」은 「가톨릭」에서 무엇을 얻으려 하는듯 합니다. 이런 세계적 趨勢는 우리나라인들 無視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對話는 必要하고 그것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교회 전체에 有益하며 하나님께 榮光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②우리나라에서도 對話는 몇가지의 基本條件이 受諾되면 可能하다고 믿습니다.
첫째는 眞正한 兄弟愛로 대애햐 할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가톨릭」은 과거에 優越感과 高姿勢로 「프로테스탄」을 대한 것은 부인치 못할 것입니다. 이런 態度는 완전히 가셔져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의 對話姿勢는 政治的 協商이 되지말고 良心的이며 個人的이라야 된다고 믿습니다. 「성경과 信仰良心」을 最高의 표준으로 하는 「프로테스탄」에는 이것이 可能하다고 믿습니다만 敎會의 統率과 權威를 보다 높이는 「가톨릭」에서 이것이 얼마나 可能할지 모르겠읍니다.
③對話의 內容은 극히 重要한 점인 줄 압니다. 즉 우리가 「하나」가 되는 限界와 形態를 미리 規定 지우지 않고는 健全한 對話는 할 수 없을 것으로 봅니다. 이미 指摘한대로 宗敎改革에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攝理를 느낍니다. 「하나」에는 統合的인 하나가 있고 聯合的인 하나가 있읍니다. 「가톨릭」에서 전자를, 「프로테스탄」에서 후자를 볼 수 있읍니다.
國家的으로는 전자는 合邦式에서 후자는 聯邦式에서 볼 것입니다.
이 兩者에는 다 一長一短이 있읍니다.
宗敎改革 이후 우리 그리스도교王國은 이 두가지 樣態로 分流하여 彼此間 警威하며 補充하면서 내려왔읍니다. 그것은 앞으로도 같을 것으로 봅니다.
결국 人間的機構에 絶對가 없읍니다. 萬一 新舊 兩敎가 敎理的, 儀式的, 敎會政治的으로 完全統合이 된다면 그것이 아무리 完全無缺하여 우선 雙方에 다 滿足을 준다 하더라도, 이 「맘모스」적은 單一敎會는 그날부터 부패하며 타락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는 相對的 不完全 속에서 하나님의 完全을 더듬어 찾으면서 또한 反映하면서 進行하는 것으로 믿습니다.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이 各自의 特色을 살리고 그 敎理와 敎會形態를 堅持하면서 그것을 彼此 充分히 理解하는 素地에서 진정한 對話는 비로소 시작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對話內容, 즉 「하나」의 限界는 이런 敎理나 儀式 등 兩敎의 기본조건을 떠나서 敎人들의 親善과 聯合的 事業 등의 分野이라야 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例를 들면 聖書의 共同飜譯, 술어 등의 共同化 등도 필요할 것입니다. 要는 對話의 妙를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對話의 妙를 따라 우리의 對話는 成功할 수도 失敗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對話가 成功的인 경우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되고 兩敎會의 健全한 發展에 유익하며 나아가서 우리 겨레에게도 좋은 影響을 줄 것으로 믿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④공의회에 대한 기대를 말한다면 우리는 공의회가 무엇을 논의하고 있는지를 仔細히 모릅니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기대는 있을 수가 없읍니다. 그러나 公議會가 劃期的인 「에큐메니칼」 態勢에 있다고는 듣고 漠然하지만 큰 期待를 가지고 있읍니다. 한마디로 말해 「對話의 素地」를 마련해 주면 하는 것입니다. 즉 必要 이상에 兩敎會의 間隔을 깊게하는 요소들을 除去하여 安心하고 對話할 수 있게 해주기를 바라고 있읍니다.
今日 「프로테스탄」의 對 「가톨릭」 태도는 不可能의 條件들을 是認하면서도 對話를 해보려는 熱聖派와 當初에 外面하려는 强硬派로 二大別 될 수 있읍니다. 아마 공의회의 앞으로의 態度를 따라 이 兩派는 左右 어느 便으로 統一될 것입니다.
(神學博士 大韓 예수敎 長老會 大邱 第一敎會 牧師)
■ 金亨錫
反對點 보다 같은 것 많아
우리는 主의 뜻을 어겼다
①對話가 필요할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우리 신구양교는 각각 대내적인 생가과 정책에만 치우친 나머지 그리스도께서 하나가 되기를 원하시는 뜻도 잊어버렸고 불신사회에 대한 신뢰와 사명감도 소홀히 하는 결과를 가져왔었읍니다.
그 점 신구양교는 우리들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美國의 케네디 大統領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곧 소련의 흐루시초프를 만났으니다. 앞날의 세계를 위하여 꼭 있어야 할 일이었읍니다. 그러나 신구양교의 책임자들은 수百年間 만난 일이 없다가 최근에야 접촉이 이루어지고 있읍니다 또 기독교신문들은 그 사실을 대대적으로 큰 일인듯이 보도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한 그리스도와 같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우리들이 수백년간 나누어져 있었다는 점에 대한 잘못과 부끄러움은 누구도 솔직히 인정하기를 꺼리는 것 같습니다.
물론 문제는 정치적인 것과 다르겠지만 지금가지 對話를 못가지고 살아왔다는 일, 노력마저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반드시 뉘우치고 개선해 나가야 할 우리들의 사명이라고 봅니다.
사랑은 어디있고 겸손은 누구의 것이며 봉사의 정신은 어디서 찾자는 것이었읍니까? 아직도 對話를 찾지 못한다거나 對話를 거부해야 할 정도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뜻, 성령의 역사 하심을 무엇으로 증거할 것인지 가슴아픈 생각을 금할바 없읍니다.
②對話가 可能하냐 못하냐는 문제가 아닙니다. 對話를 해야할 사람은 우리들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不信徒들의 對話는 있을 수 없겠지요. 可能性을 묻기전에 對話를 실천하겠다는 신념이 먼저 있어야합니다.
물론 전체적인 대화는 곤란한 것입니다. 그러나 소수의 지도자 뜻 있는 분들의 대화는 먼저 이루어지고 있어야 하겠읍니다.
많은 양측의 지도자들은 對話의 곤란점들을 들고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사이에는 반대되는 점보다 일치되는 내용이 더 많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선 구원받아야 할 인간성의 문제와 내용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도 한가지입니다.
이 두가지 문제의 공통점만 발견된다면 우리는 다른 무엇을 희생시키더라도 對話를 가능하게 이끌어 나가야 하겠읍니다. 우리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우리들의 후배나 후손에게 다시 양도할 필요가 없읍니다. 그 일을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가 이난본위의 것이지 성령의 이끄심을 받는 교회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과거 수세기에 걸친 종교전쟁을 양파가 모두 눈물로 뉘우치고 곧 속죄해야만 합니다.
③대화를 가능케 하는 두개의 거점이 있읍니다. 먼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일이며 다름은 불신사회에 대한 사명감을 찾는 일입니다.
이 일은 신앙의 내용과 사업의 광장을 보여줄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교회가 꾸준히 지녀온 전통, 성령의 역사하심이 역사에 나타난 증거를 그 근본과 본질에서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구양교는 물을 것 없이 우리는 가난한 이웃, 진리의 빛을 모르고 있는 형제, 삶의 영원한 값을 잃고 있는 동포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뜻을 증거하며 그들을 도와 섬겨야 하겠읍니다.
이런 일들을 위한 對話는 지금부터 꾸준히 계속되지 않으면 안되겠읍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문제들로서는 교회적 술어의 동일성, 일치되는 근본교리의 강조, 동일한 성경의 번역과 사용, 예배양식의 접근 등을 모색해야만 하겠읍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다른 종교와 달리 한 天父와 구주를 모시고 있다는 엄연한 실적을 사회에 입증하지 않으면 안되겠읍니다.
더우기 젊은 세대들에게는 보다 많은 對話의 기회와 협조의 뜻을 남겨주어야 하겠읍니다.
④항상 새롭기 때문에 영원한 진리와 교회의 사명을 다하는 방향으로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신교를 선의로 이해하며 협조하는 길을 여러주시기 바립니다. 지금가지도 신교가 구교때문에 받은 많은 혜택을 알고 있읍니다. 앞으로는 더 많은 이해와 협조가 있는 방향을 택해 주시기 바랍니다.
(필자 延世大 敎授)
■ 盧大榮
對話 世界的 課題
妥協 아니고 理解'에의 길
이 「대화」란 말은 요사이 신학자들 중에서 너무 인기가 많은 단어로 되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말 대신에 무엇이라 하여야 하는지 모르겠다. 중요한 일로 보는데 우리의 세대의 여러가지 병리를 고치려면 대화함으로서만 고치는 길을 찾을 수 있을 줄로 믿는다.
대화는 대개 서로 속하지 않고 혹 서로 같은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들이나 「구르프」들이 서로 만나서 그들 사이에 있는 ㅅ차이를 설명하면서 말을 듣고 주는 것인 줄을 알겠다. 그렇게 생각하면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회회교, 그리스도교와 불교, 교회와 사회, 동양과 서양 사이도 대화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대화는 타협이 아니다. 그리스도 교파들 중에 대화를 무서워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이 대화란 것은 타협과 마찬가지인 줄로 알고 타협을 원치 않으므로, 대화에도 반대한다.
그런 이들은 오해하고 있다. 다만 충실히 믿는 사람들이 대화에 들어갈 수 있을 뿐만 아니고 또한 상대편을 귀하하려 할 생각을 가지고 좋은 대화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대화에 들어간다면 내 목적은 두 가지로 되겠다. 먼저 상태편의 입장을 이해하도록 하고 다음에는 내 입장을 진실히 드러낼 것이겠다. 대화가 그렇게 되면 좋은 뜻을 가졌을 뿐 누구든지 반대하지 못하며 찬성할 수 밖에 없는 줄로 안다.
여러 교파중의 이런 대화는 다른 나라에서 얼마동안 발전해 왔지만 한국에서는 이제 시작하는 단계와 같다. 구라파에서는 벌써 좋은 실과를 거뒀는데, 특별히 일반 가톨릭이 성경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과 일반 「프로테스탄」들이 성사의 도리와 가톨릭 전통적 기도생활과 전례에 대한 과심이 일어났다.
몇년전에 한국서 이런 대화를 원하는 이들이 드물었던 것 같았으나, 오늘의 분위기는 아주 달라졌을 것으로 본다. 분위기가 바꿨으면, 대개 「바티깐」 공의회에서 나온 희망의 바람으로 된 것이겠다.
내가 한국 사람이 아니지만, 한국에서 대화가 가능하지 못하게 된 이유를 모르겠다. 어떤 분들이 한국을 주목하면 한국이들은 버릇의 정도까지 당쟁의 마음이 있다고 하지만, 내 생각에는 하국인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성총을 받음으로 이나라의 역사적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 그러함으로써 한국 교인들이 온나라에 그리스도적인 아름다운 모범을 뵈어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사회를 따라서 자기의 병을 고칠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교는 먼저 자기의 병을 고침으로 그 사회의 병을 고칠 것이다.
이 대화의 내용은 신학과 신앙과 교회생활이 넓음을 따라 넓은 범위로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특별히 과심이 많은 문제에 대하여 몇마디를 적겠다.
구교와 신교 사이에 매우 어려운 한가지 문제는 성모 경배이다. 몇달전에 영국 성공회 신학자 여러사람들이 「성모론 심포지움」을 내면서 그들의 목적은 대화를 도와줄 것이라고 말하였다. 사실 오늘의 구교파 신자들이 기도 할 때마다 성모경을 외우고 성모상과 묵주신공을 사랑하고 있는데 신교파들이 이 점을 흔히 오해하고 있다. 「파티마」의 역사도 신교파 교인들의 귀에 미신적 전설과 같이 들리는데 좋은 대화가 없으면 상대한 편견을 가진 신교파 교인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가? 성모론은 중대한 문제이다.
또한 양편이 교회법규에 대한 입장을 서로 알려줄 필요가 있다. 구교 법규는 신교파 교인에게 너무 복잡하고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구교에서는 신교파의 법규가 너무 간단하므로 질서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벌써 양편에서 상대편의 문서를 읽기 시작하고 있는데 그러나 책을 읽음으로만 넉넉지 않겠다. 신교파 교인은 자기의 원편견을 가지고 구교파에서 출판된 조그마한 성모에 관한 「팜프레트」를 읽으면, 그의 편견이 더 심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와 만나서 인간으로서 터놓고 얘기하면 양편이 옳게 깨달을 수 있다.
그래서 이 대화는 대개 인간 사이에 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대화와 담화회 또한 「대화회」를 하는 것이 좋으나, 완전한 대화는 다와 어떤 목사나 천주교 신부가 서로 애기할 때에 우리 개인 관심을 중심으로 상의하는 것이 많고 또한 평신도끼리 교파의 경계를 넘는 그런 우애가 생기면 그것은 가장 좋은 대화라고 하겠다.
하여튼 말로써만은 안된다. 대화에 기도도 필요하다. 나와 다른 교파의 신자들이 서로 기도하고 또한 함께 기도하면 우리의 상의와 대화가 좋은 효과가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겠다. 기도가 없으면 대화 대신에 토론이 되기 쉬운데, 조심할 것이다. 아직은 함께 영성체하지 못하더라도, 함께 기도할 수 있겠다. 그런 기도 할 때에 제일 좋은 기도문은 성경의 말씀이라 하겠으며, 특별히 함께 복음서 낭독과 함께 성령(聖詠)을 노래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하면 이 대화의 목적은 우리 영광이 아니고 다만 천주의 영광인 줄을 잊어 버리지 않겠다.
(필자 大韓聖公會 神父 · 英國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