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31) 주린 사랑 ④
발행일1963-12-25 [제404호, 6면]
한참 멍하니 걷고있는 내 귀에 기차 기적 소리가 울린다. 가는 찬지 오는 찬지 모르겠으나, 기적 소리는 나를 부르는 것 같다.
기차에 몸을 싣고 어딘지 먼 곳에 가고 싶으나, 수중에는 단돈 일원이 없다. 「버스」 회수권은 있었지만 걸었다. 남대문을 지나 종로쪽을 향하였다. 행인들은 모두 자기의 가는 목적지가 있고 걸음들을 재촉하는데 나만은 갈 곳이 없었다.
『색시 어디가지?』
누가 나를 이렇게 부르기를 은근히 기다리기도 했다. 절반쯤은 끌려가버릴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오고 가는 사람마다 제 갈 길이 바쁘며, 말 한 마디 거는 사람이 없다. 종로까지 와서 1가, 2가, 3가, 4가 이렇게 지나는 사이에도 기다렸던 유혹은 짐짓 오지를 않았다.
늦은 밤 시간이라, 이 골목 저 골목의 어구에는 거리의 여성으로 보이는듯한 여자들이 두 명 혹은 세 명씩 때로는 혼자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잠자리와 세 끼 밥이 거기 있다. 양부는 나에게 이 「트렁크」도 주셨던 것이다…)
나는 「트렁크」의 중량 속에 양부의 애정을 새삼스러히 느꼈다.
(내가 아버지라고 부를 사람은 그 이 하나 뿐이다.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그 아버지 하나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늘어졌던 발걸음에 약간 탄력이 생긴다.
(그는 나를 때릴거야)
머리채가 잡아 당기우고 날카로운 시선에 강박을 당하는 내 꼴이 보이자 발걸음은 다시 주춤해 진다. 집까지 약 1「키로」의 지점에 왔을 때 열한시반 사이렌이 울렸다.
집 문전에 이르렀을 때는 거의 자정이 다 되었을 무렵이다. 대문은 닫혀있고, 집안은 조용했으며, 문틈으로 보니 안방에는 불이 켜져있다.
『떨거덕…』
자신없이 문을 흔들었다. 크지 않은 문소리였으나, 약간 사이를 두고 안방문이 열리더니, 아버지의 그림자가 역광선을 등에지고 마루에 나온다.
『누구야?』
『………』
옆의 담쪽으로 몸을 피했다.
『누구요?』
문깐까지 나온 소리다.
『나순이야요…』
목소리가 안 나올줄 알았더니 이외에도 내 입에서는 큰 소리가 나왔다.
대문이 열리고 아버지의 검은 그림자가 내 앞에 선다.
『어디를 싸다니다가 이제야 돌아오느냐? 들어가자…』
그의 뒤를 따라 문턱을 들어섰다.
대문 빗장이 절거덕하고 걸린다.
돌아온 안심과 불안이 뒤엉킨다.
『그간 어서 잤느냐?』
『강숙이네 집에서 잤어요!』
『이 년아, 애비 집을 버리고 네가 어딜 나갈테냐?』
이 한 마디가 튀어나오고 그의 억센 손이 내 머리채를 잡아 당길줄 알았더니,
『저녁은 먹었니?』
하고 비교적 부드럽게 묻는다.
『국수 조금 먹었에요.』
『배 고프거든 밥 먹어라!』
하며, 일어서더니 양부는 스스로 부엌에 나가서 상을 보아 드려온다.
아랫목에 묻어 두었던 자기의 밥 주발을 꺼낸다. 밖에서 식사를 하고 들어온양 밥이 고스란히 담기고 김이 무럭무럭 난다.
반찬은 김치와 콩자반 조개젓 김 먹다 남은 것 등 몇 가지 안 되었지만 진종일 제대로 요기를 못한 내 입에는 꿀맛이었다.
『지금 어서 오는 길이냐?』
『… 도서관에 갔다가 늦었에요』
『무슨 도서관이 이렇게 늦냐?』
양부의 눈에는 의심하는 빛이 보인다.
나는 밥상을 물리자 곧 내 방에 돌아가서 이불을 쓰고 누웠다. 어쩐지 이날만은 양부도 끈덕지게 묻지는 않았다.
『집을 나간 것도 약이였나 보다…』
나는 이불 속에서 혼자 혀바닥을 내밀며, 다시 전날의 내 자신을 찾은 기분이 되었다.
다음 토요일까지 며칠동안은 별 일이 없이 하루하루가 갔다. 그간 아버지도 강숙이도 만나서 자세한 얘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던날 밤에 어디서 무엇을 하다가 늦었느냐고 그는 몇 번이고 꼬치꼬치 묻기 시작했다. 그 추궁만은 괴로왔다. 두 번이나 머리채가 닻줄 감기듯 그의 손에 휘휘 칭칭 감기었지만 나는 그 아픔을 참았다. 그리고 학교도 다시 다녔다.
(좋으나, 나쁘나, 아버지와 더불어 살아 나가는 수밖에 없다!)
이런 체념이 생기기도 했다. 나는 때때로 발작적으로 명랑하기도 했다. 노래하고는 담을 싼 내가 가끔 노래까지 읊었다.
『나순아, 제발, 노래는 부르지 마라…』
『왜?』
『얼굴 망친다!』
강숙은 손을 들어 휘졌는다.
『어때?』
나느 ㄴ일부러 크게 또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오면 다시 우울해진다. 양부는 아직도 짬만 있으면 내 공부방에 건너와서,
『그 날 밤 늦은 까닭을 말해라!』
하고 날카로운 눈을 나에게 모둔다. 되는대로 거짓말을 둘러대니 거짓말의 앞뒤가 안맞았다. 양부는 한층 의심을 품고 있는 눈치였다.
토요일 낮, 약속대로 나는 학교가 파하자 「뮤직홀」로 뛰어 갔다.
약속시간보다 삼십분이 늦었으므로 딕슨이 와서 기다리고 있을줄 알았는데, 아무리 찾아도 그의 얼굴은 보이지가 않았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을 앉아 있어도 딕슨은 나타나지를 않는다. 먼저 왔다가 갔을까?
(인제보니 그 자식도 건달이었나 보다!)
나중에는 그에 대한 미움만이 솟구친다. 그립던 그 얼굴이 이제는 누구보다도 미운 얼굴로 보인다. 미우면서도 또 보고싶은 마음이 솟아난다. 이튿날 일요일 낮에도 「뮤직홀」에 들러 한 시간쯤 앉아 있자니, 내 옆으로 오는 그림자가 하나 있다. 아버지였다.
『나오너라!』
그는 내 뒤를 미행해 온 모야이었다.
『너 거기서 누구를 기다렸니?』
『그냥 음악 감상 했어요!』
『거짓말 마라. 딕슨인가 그 양키 기다린 거 아니냐?』
『아니요!』
그것으로 오는 동안의 대화는 끝났는데, 집에 들어서자, 그는 큰 가위를 꺼내더니
『바른 말 안 하면 이 칼로 머리를 싹둑 잘라줄테다!』
하며 눈을 부릅떴다.
『머리 잘라도 헐 수 없어요. 안 그런걸 그랬다고 할 수는 없어요.』
나는 시침을 딱 뺐다.
『너 천준지 예순지 좀 믿었지? 예수 앞에서 맹서해라!』
『… 누구 앞에서든지 맹서할 수 있어요』
『예수님 앞에서 맹서합니다. 그래봐라』
『예수님 앞에서 맹서합니다!.』
그제서야 그의 의심은 조금 풀린듯했다.
이튿날 저녁에 나는 오래간만에 진호가 다니는 교회로 찾아갔다. 주께 거짓말을 맹서한 것이 꺼림칙했다.
교회 안은 텅 비고 몇 사람의 부인이 제단 앞에 앉아서 묵주신공을 하고 있었다. 나는 제단 앞 모퉁이에 자리를 잡고 거짓말을 주께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교회를 나설적에 내 마음은 훨씬 가뜬해진다. 오는 길에 교회로 가는 김진호와 마주쳤다.
『오래간만이군요. 미스양?』
진호는 눈이 부신듯이 나를 바라보며 반가와한다. 전보다 육체적으로 성장한 내 모습에 놀란 눈치이다.
『거짓말을 했을 때 주님께 빌면 용서해주시나?』
『고해성사를 보세요』
『신부님 앞에 가서 얘기하는거죠』
『네에』
『싫어요.』
『신부님은 주님과 우리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야요…』
『사람한테 말하는건 싫어요』
『신부님은 고해한 사람의 얘기를 절대 남한테 얘기 안 해요. 다만 주님께 고해한 사람을 위해서 기구할 뿐이야요…』
『살인죄를 지어도?』
『물론…』
십분 후에 집에 돌아오니 의외의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강숙과 딕슨이 문깐에서 아버지와 얘기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