平信徒(평신도) 눈에 비친 美國(미국) 겉 핥기錄(록) - 美國(미국) 가톨릭 안팎 (22) 닭고기와 전화요금
미국인과 한국인 어느편이 더 경제적
발행일1964-07-26 [제432호, 3면]
미국을 부자나라라고 한다.
그런데도 미국 사람보고 단돈 10전 갖고도 발발떠는 깍쟁이들이라고 평하는 사람이 있다.
돈 많다고 덮어놓고 아무한테나 물쓰듯 하지 않는 그들의 경제생활을 이렇게 「깍쟁이」란 말로 업시여겨 표현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무계획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은행에 있는 리챠드란 사람이
『한국사람들은 기분난다고 친구들과 술집에 가서 하루저녁에 자기 월급의 반을 소비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국인상기에서 밝힌 것을 본 일이 있다.
그들은 한국사람이 보면 정말 깍쟁이란 소릴 들을 정도로 까닭없이 돈을 쓰지 않는다. 또 자기 수입의 액수를 생각지 않고 「체면」만을 내세우는 한국식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쌀이 떨어져서도 손님이 오면 「술을 받아와라」이 체면문제가 한국엔 있고, 고기가 「아이스박스」 속에 대여섯근씩 남아 있어도 「커피」만을 내놓을 수도 있는 계획생활이 미국엔 있는 것이다.
물론 미국 사람이라고 다 그렇진 않지만 어쨌든 「인정」은 「인정」이고 사무적인 것은 명백히 사무적으로 처리하는 그들의 생활양식이 있음은 틀림없는 일이다.
내 「아파트」의 관리인은 예순네살의 폴랜드 출신의 할머니였다.
열심한 교우 할머니였고 「엘리자벳」이란 이름을 갖고 있었다.
새벽미사에 매일 참례하고 돌아와서는 「아파트」의 1층서 3층까지 혼자서 청소를 다하고 각 방의 뒷치닥거리까지 다하는 할머니였다.
『엘리자벳 할머닌 진종일 일단 하시니 퍽 피로하시겠어요』
『토마스! 난 천주께서 부르시는 날까지 이렇게 일 할 수 있는게 복되다고 생각해요.』
그는 신앙속에서 생활이 회전되고 있었다.
『이 「아파트」는 할머닛겁니까?』
『아뇨, 경찰에 다니는 내 아들 거에요. 난 관리인으로 취직되어 있죠』
『취직요? 아니 그럼 월급을 아들한테 받고 있나요?』
『그럼요, 헌데 월급이 아니고 한주일에 한번씩 주급을 탑니다.』
『왜 아들집에 가 계시잖구!』
난 한국식으로 물었다.
『아니 왜 아들집엘 갑니까? 내가 벌써 아들과 며느리한테 짐이 되어야 할 사람은 안됐는데요. 아직 일할 수 있어요.』
내 질문이 이상스럽다는 눈치였다.
『오히려 매주 아들 며느리 그리고 손자들이 놀라오고, 또 초대 받고 가는 것이 더 정답고 즐겁답니다.』
『토마스! 이리와요, 내가 닭요릴 만들었는데 먹겠어요?』
미안스러워 한국식으로 어물어물하면
『왜 미국음식으로 만들어 좋아하질 않느냐』고 반문하기까지 한다.
『내 지금 내 나이에 돈 해서 뭘 해요. 봉급타면 죽은 남편을 위해 연미사나 드리고, 가끔 미사예물 바치고, 가난한 전교지방을 위해 기부하고… 그렇답니다.』
그는 내가 방에 있는줄만 알면 별별 요리를 다 만들어 준다.
『오늘은 소쟀날이라 생선 「후라이」를 했는데 토마스 식당으로 와요』
난 한주일에 10「달라」씩 「아파트」값으로 내로는 약 15「달라」이상의 식사를 수시로 제공받았다.
인정많은 이 할머니는 자기가 즐겨보고 있는 「텔리비죤」도 보라고 제공해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한국 유학생 K씨가 놀라왔다가 장거리 전화를 걸겠다고 청했다. 할머니한테 허가를 맡았다.
그 다음날 이 할머니는 『전활 어디로 걸었죠? 몇통화래요? 몇통환줄 몰라요? 아니 그걸 모르면 어떡해요, 다음 달에 가서 계산서가 나오는데… 난 아들한테 말들었어요. 아이 속상해 아니, 글쎄 몇백 「달라」 될거라는군요… 그걸 어떻게요』
몹시 맘상해 하는 눈치였다. 『난 토마스가 건 줄 알았더니 토마스 친구가 걸었어요 절말 난 싫어요』
정말 어안이 벙벙해질 지경이었다. 7「달라」나 8「달라」정도 밖에 안되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평생 장거리 전활 걸어본 일이 없는 그 할머니였다.
『제가 지불하겠어요』 이렇게 말해도 그는 「백여 「달라」 될거라 하던데 그많은 돈을 어떻게 토마스가 내겠어요』하면서 약 3·4일 동안 그 흥분상태가 계속되었다.
『개인의 정은 정이고, 사무적인 것은 사무적으로 처리해야 해요』하는 것이었다.
7·8 「달라」의 전화요금 가지고 통화직후에 통화수와 요금을 묻지 않았다고 언잖아 하면서도 14.5「달라」에 해당하느 ㄴ음식의 「서비스」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며칠후 전화요금건은 무사히 매듭을 맺었다. 미국인의 「공」과 「사」의 구별은 너무나 확연하였다.
까닭없이 인정을 베푸는 엘리자벳 할머니였다. 그리스도적인 「사랑」이 그 인정의 이유가 됐는지도 모른다. 전화요금 사건처럼 따질 것을 따지는 그들을 우리는 「깍쟁이」라고 표현하는 것일가 그 깍쟁이란 말을 함부로 쓰는 우리가 너무 깍쟁이 같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