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79) 虛實(허실) ②
발행일1965-01-01 [제453호, 4면]
진호네 집에 온 손님이 그 「찦」차를 타고 온 것이 분명했다. 그 차의 임자는 「미스터」강이니, 그가 와 있어야 할건만 같다. 진호와 강이 아는 사이일까?.
이런 생각을 하며 대문을 밀었더니 열린다. 예상한 「미스터」강은 안 보이고, 중년 부인이 마루에 걸터앉아 있고 마루 위에는 진호가 엉거주춤하니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진호는 나를 보자, 반색하며 들어오라고 한다. 부인은 이야기를 마친양, 자리를 일어서고 문 밖으로 나오더니, 기다리던 「찦」차를 타고 사라졌다.
『그 부인 누구죠?』
문깐까지 전송나온 진호에게 물었다.
『과외 공부를 가르치는 아이의 어머니야요.』
『저 차 임자가 누구야요? 성이 강씨 아니야요?』
『김씬데!』
『김씨라구요?』
『왜, 그건?』
내 안색이 보통 아닌 것을 보고 진호는 말끔히 바라보았다.
얘기를 들어보니 진호는 몇개월 전부터 중학 일학년 아이들에게 영어 수학을 과외 공부시키고 있는데 김영식이란 아이의 차라 한다.
그간 어느 회사에 한달 전세로 빌려주었다가 며칠 전에 기한이 되어 찾아왔는데 자기네는 그다지 차가 필요치 않기 때문에 청하는데가 있으면 세를 놓는다는 것이었다.
차에 대한 미심한 점도 이제는 풀리고 말았다.
「미스터」강이 공장에 들어갔다고 한 차는 주인의 손으로 돌아갔던 것이었다.
『망할 자식…』
내 입에서는 절로 욕설이 나왔다.
『누구 말이야?』
『아니야요.』
나는 진호에게 그 얘기를 하기가 부끄러웠다.
『어떻게 지내세요?』 나는 화제를 돌렸다.
『나보다는 「미스」양은 어떻게 지내고 있어?….』
진호는 전과 다름 없는 다정한 얼굴로… 그러나 그간의 나의 생활이 궁금한듯이 묻는다.
『지금까지는 살아왔는데,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르겠어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어떻게 될지 모르다니?.』
『내 자신이 어디로 떠내려 갈지 모른단 말이야요!』
남의 일같이 나는 말했다.
『왜 그런 의지(意志)를 상실한 말을 해?』
『의지가 있으면 뭘 해요? 당장 생활이 급한 걸…』
『………』
진호는 나의 옷차림 위에 은근히 시선이 흘렀다.
외모로 본다면 중류 이상의 괜찮게 사는 집 딸과 별 차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집이라고 이름붙은 집 한 칸이 없고 쓸어져 가는 산동리의 침침한 사글세방 하나가 양부와 나의 몸 담을 곳이었다. 사장 부인의 꿈은 산산히 깨어진 마당에, 내일은 무엇에 의지할지 몰랐다.
남은 희망은 「미스터」강의 사기술에 넘어간 돈을 찾느냐 먹히느냐 하는 것 뿐이었다.
진호는 안에 들어가더니 옷을 갈아입고 나섰다. 얼마 안 가서 나무 없는 조그만 산이 있다. 도심지에서 자리를 얻지 못한 판잣집들이 여기에 다섯 채, 저기에 세 채, 산비탈을 이용하여 지어져 있었다.
진호는 아무 말도 않고 산길을 주어 올라간다. 그의 다리는 전보다 덜 절었으며 지팡이 없이 걸었다.
조금 힘이 드는양 숨소리가 가빴다.
『다리가 불편한데 이런데는 무엇허러 올라와요?』
나는 발을 멈추며 물었다.
『얘기할 게 있어…』
진호는 산봉우리에 이를 때까지는 아무 말을 안 했다.
우리는 무덤같이 불쑥 지면에서 솟아난 바위 위에 나란히 앉았다.
『「미스」양….』
진호는 땅을 보며… 힘있게 입을 열었다.
『나에게 만약, 「미스」양 같은 누이동생이 있다면,… 나는 따귀라도 한 대 갈겨주고 싶어….』
『왜요?.』
『그만큼 똑똑한 여성이 갈대와같이 흔들리고 있으니 말이야요?.』
『갈대만 같애도 좋겠어요. 바람에 꺾어지지는 않으니까!』
『「미스」양은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살 생각을 해요. 쓸데없는 허영심에 들뜨지 말구?』
『…진호씨는 가난이 좋으세요?』
『가난이 좋은 사람은 없지. 그러나 가난 때문에 마음과 생활을 더럽히고 싶지는 않아!』
『………』
『…「미스」양의 옷차림은 가난한 사람의 옷차림이 아니야!』
『나는, 옷은 남과 같이 입고 다니고 싶은걸요. 내가 만약 거지꼴을 하고 다녀봐요. 누가 거들떠나 보겠어요?』
『여자들은 너무도 입는 것에 정신이 팔려 있어!』
『진호씨는 남자니까 그런 소리를 하는거야! 여자가 되어보아요? 여자란 못 먹는 것은 그다지 고통이 아니야요. 남과 같이 못 입는건 굉장한 고통이야요!』
『그러니, 옷에서 해방되면 고통에서도 해방이 될 수 있지 않아?』
『좋은 옷이 부럽지 않으면 이 세상은 무슨 재미로 살아요?』
『………』
진호는 성난 눈으로 나를 노려본다.
『여자에게는 의복이 생명 다음이야요.』
나도 빈정거리며 말했다.
내가 사장 부인을 원한 것도 좋은 옷을 맘대로 입고 싶어서였다.
『마음이 텅 비었으니,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정말이야. 내 마음은 텅 비었어! 바람따라 내 몸은 아무데나 굴러갈건만 같애!』
나는 내 자신의 일을 타인의 일만치나 가볍게 바라보았다. 이까짓 내 몸 하나쯤 아무렇게나 되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에 대한 진호의 반응을 알고 싶었다.
그간 진호에게 멀어졌던 내가 새삼스러이 그의 애정을 바랄 염치는 없었다.
사실은 그 염치를 제쳐놓고 나의 고독을 그의 애정 속에 기대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미스」양…』
『……………』
진호의 시선은 다시 땅 위에 떨어졌다.
『진실한 사랑을 하도록 해요. 내 말 알겠소?』
『나를 진실로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을까요? 나는 지금까지 속기만 한 걸요』
『…나는 속이지 않았서. 물론 가난하고 다리가 이 꼴이 된 나는 자격이 없을 줄 알아! 그러나 그런 사람이 어디엔가 있을거야… 나도 나를 이해해 줄 사람이 이세상에 어디엔가는 있을건만 같애…』
『……』
나는 문득 진호의 품에 안기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그렇게는 못하고, 잠시 후에는 그 곳을 떠났다.
진호는 쓸쓸한 표정으로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어쩐지, 나는 진호가 무서웠다. 그의 진실이 두려웠다. 때묻은 내 마음이 그의 앞에 가기가 계면쩍었다. 한편으로는 아직도 잘 사는 남성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하고도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양부에게 자가용 얘기를 했더니 그는 펄쩍 뛰며 금방 얼굴색이 짓노래졌다.
지금까지, 어딘지 강을 믿는 마음이 있었던 양부도 그 말에 완전히 절망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놈 오기만 해봐라!』
양부는 벼르고 있었으나 그날 저녁은 강이 나타나지를 않았다. 다음날 그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급한 일이 생겨서 못 가니 내일, 종로의 아무데 다방에서 저녁 다섯시에 만나자고 하였다. 은행에서 그 땅값만큼 융자를 해주겠다고 하였으니 땅문서를 꼭 가지고 나오라고 부언하고 있었다.
그것은 땅문서까지 후려치려는 심산인 것이 빤했다.
양부는 이를 갈고 분히 여기며, 내일 다방에서 보자고 별렀다.
내 예감에는 육만원돈은 다시 찾기 어려울 건만 같았다. 나는 이 침침한 분위기 속에서도 오히려 태연했다. 웬일인지 알 수가 없다. 내 자신을 굴러가는 낙엽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