平信徒(평신도) 눈에 비친 美國(미국) 겉 핥기錄(록) - 美國(미국) 가톨릭 안팎 (23) 피땀 섞인 원조들
쉽게 생각하는 원조금 「만불」 밤세우며 1달라씩 모은 것
발행일1964-08-02 [제433호, 3면]
농산물이 너무 많이 생산되어 밀가루나 강냉이를 농부로부터 사들여 처리할 길이 없어 바다에다 내버려야만 했던 미국이다.
이것을 우리는 「잉여 농산물」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물자가 풍부한 부자 나라가 가난한 한국을 돕기 위해 옷보따리를 보내고 원조금을 보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층이 있고, 오히려 그 원조에 기대어 살려고 드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부자나라 사람이라고 이해관계 없이 마구 돈을 쓰는 법이 없는 사람들이다.
난 한국의 가난한 사람을 위해 옷을 모으는 광경을 봤고, 한국의 가난한 환자를 위해 약을 모으는 운동을 봤고, 한국의 전교지방에 나가있는 자기 자식(메리놀신부님)의 전교자금으로 돈을 거두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
자기가 지니고 있는 물건에 대한 애착심은 우리들이나 그들이나 마찬가지다.
아무리 옷이 많은 그들이라 하지만 한국의 가난한 실정의 이야기를 듣고 자기가 입고 다니먼 「오바」를 벗고 「샤쓰」를 내놓고 할 때는 하나의 의협심이 발휘된 때이고 또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뜻이 「이웃돕기 마음」으로 작용된 때이다.
『아니 이것 입으라고 다 보냈나, 우릴 양거질 만들려는 건가』
「사랑의 선물」을 받는데 있어 성실치 못한 점이 우리에겐 없었나? 하고 몇번이고 생각하고 싶어졌다.
의약품도 그렇다. 비싸기가 한량 없는 미국의 의약품들이다.
이 의약품을 모으는 운동을 전개하는 어떤 가톨릭의 「클럽」회원들은 자비를 들여가며 애를 쓰고 있었다.
「켄터키」주 「루이빌」에 갔을 때 나는 도날드(申) 신부(메리놀회 소속 인천교구)님 댁엘 찾아갔다.
노령이신 신부님의 아버님은 『아이고 정말 반갑습니다. 글쎄 이게 다 천주께서 연락해 주셔서 한국 친구가 온 것 같습니다.』
『무슨 말씀이신데요』
『「미스터」 신은 우리 돈신부(도날드 신부)를 잘 아슈?』
『처음 한국에 도착한 뒤 임지에 가시기 전에 내 본당인 흑석동 성당에 오셨드랬지요. 미사도 지내셨죠. 또 제가 합창단을 이끌고 있을 때 본당신부이던 이 알렉산델 신부님의 제안으로 환영회까지 열어드린 일이 있었읍니다. 그후는 만나뵙지 못했읍니다.』
돈신부의 노부모님은 오늘 바로 아들신부 본당의 수녀관을 짓기 위한 모금의 행사를 벌리는 날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인연있는 한국친구가 온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한 4백 「달라」는 모아야겠는데 돈 모다는게 얼마나 힘드는지 모르겠어요.』
신신부님의 어머니는 성프란치스코성당의 본당신부의 협조를 얻어 성당강당에서 「카드 파티」로 모금 행사를 벌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작년 6월 28일 하오8시30분.
말하자면 「한국 돕기 운동」의 밤인 것이다. 이들은 그저 한국을 위해 돈을 내라는 식의 방법을 피한다.
「카드」놀이를 시켜가지고 재미를 보게하고 각자 1 「달라」씩만을 「돈신부」의 전교 원조금으로 내놓는 것이었다.
『본시 4백명 예정을 했는데 보다싶이 약9백명이나 참가하여 대성황입니다.』
신신부의 형제 네분이 신부였다.
신부님의 노부모는 새벽1시반까지 강당 뒷처리를 하고 걸상 치우기도 하면서 「아들신부」를 위해서이기 보다 아들신부가 있는 「한국」을 위해서 애를 쓰고 있었다.
단 몇백불이라 해도 그들이 보낸 원조금 속에는 언제나 이같은 피어린 노력과 정성이 숨어있는 것이었다.
『원조금 몇만불!』
이런 높은 단위로만 귀에 익은 우리들은 가난하면서도 몇백불이라면 깔보는 습관이 있는 것이 아닌지?
한국여행자는 백불짜리 지폐가 주머니에서 잘나와도 미국사람들중에는 백불짜리 돈을 아니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 정도다.
단 일불씩 모은 그 귀한 원조금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 것인가 다시금 생각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