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염천에 뻗은 장장 3「킬로」의 행렬, 김천시 유사이래 드문 이 긴 행렬은 어느 고관 호부의 거나한 장송(葬送)의 점경은 아니었다.
만리이역서 숨진 이방인인 한 베네딕도회 수사신부의 장례인 것이다.
4년 6개월 「죽음의 행렬」에 끌려 들어 진저리가 나도록 혹사를 당한 이 고장을 싫다 않고 찾아와 『내 뼈를 여기에 묻기로 했다.』면서 살아온 서독산(西獨産) 한국인 파비안 탁(卓世榮) 신부를 영결하려는 김천시민들이었다.
구호물자 누더기를 많이 주었대서가 아니고 밀가루를 많이 타서도 아니다.
성의중고등학교를 세우고 내아들, 딸들이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했다는 것만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는 잘 몰라도 그것을 나누는데 무척 애쓴 그의 정성과 열이 김천시민들의 눈물을 짜낸 것이다.
평범하면서도 인자한 풍정을 한껏 누구나에게 나누는 그는 이제 김천에서 볼 수 없다.
지금으로부터 36년전 28세의 약관으로 우리나라에 온 탁 신부는 원산본당에서 그의 첫 사목활동을 시작했고 일제와 싸우는 한국인의 자주(自主)를 눈물겨웁도록 도왔다.
방인사제 양성, 해성국민학교도 설립했다. 한국인이 문명된 생활을 하도록 애쓴 그는 끝내 모진 곤욕으로 갚음을 받았으면서도 『스테파노 틀림없어요, 천주께서 분명히 우리의 고향 원산을 수복시켜 주실 거요』라고 만다는 피난교우들을 자기 마음 달래듯 위안하면서 한편 김천에 방대한 남녀중고등학교를 설립했으며 근대 서양교회건축을 김천 평화동에 옮겨 놓았다.
중앙지나 지방신문 할 것 없이 탁 신부의 서거를 『한국의 슈바이쳐는 갔다』고 김천시민 못지않게 애도했다.
그는 제1의 조국 서독보다 한국을 앞세웠다. 우편요금이 없어 소포로 1만통의 한국원조요청 편지를 독일에 부치면서 여러분의 정성어린 1「마르크」가 나로 하여금 천주님이 가르치신 애덕을 한국민과 나누는데 도움이 된다고 호소했고 성의중고교 여자부를 1억8천만환(구화)으로 완성하고 남자부를 위해 같은 액수를 계획했었다.
그는 전기 「성의」 남자부를 명년까지 마치고 대구대교구와 오도 「아빠스」의 요청을 받고 분도회의 대구진출사업 설계를 시작했었다. 학생기숙사를 위시한 바람직했던 그 사업이 종내는 햇빛을 보도록 저세상서 빌리라.
동아출판사가 요청한 「독한사전」 감수에서 사계의 권위와 존경을 받기까지 단어 한자 한자에 독일인 다운 세심을 베푼 탁 신부, 그의 죽음은 50여명의 재독 한국인 기술 수련자들의 놀라움이었다.
담석증 수술때 한번 심장마비로 숨졌던 탁 신부는 끝내 심장마비로 우리를 하직했다.
겹친 피로도 풀고 앞으로의 사업계획을 조용히 가다듬으려고 갔던 삼척의 휴양지가 그의 마지막 길이었다. 가슴까지밖에 차지않은 수심(水深)이 64세의 할아버지에게 대수롭지 않았으나 갑자기 밀려닥친 파도는 탁신부를 휘덮었고 심장을 멈추게 했다.
급보에 접한 구주교님은 몸소 삼척으로 달렸고 관민 · 신자 다수와 함께 한 한국의 「슈바이쳐」를 정중히 장송했다. 그의 유해는 「위대한 인격자」 「한국인의 벗」으로 칭송되면서 23일 정오 이곳 성베네딕도 대수도원 성직자묘지에 영영히 안장되었다. 【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