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趙光元
一致 聖書的 敎理다
分離된 敎會처럼 슬픈 것 없어
한 성신으로 성세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 (고전 12, 13)
교히 재일치 운동은 성서적 교리로서 우리는 한 양무리요 한 목자시요 한 임금을 모신 가족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많은 무리에게 천주의 나라에 대한 설교, 사람으로서 최고의 모범을 보이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요. 주님은 구세주로서 그 업적이 이 땅 위에 계속되기를 희망하셨다. 복음성경은 주예수님의 공생애의 후반의 대부분을 적은 무리인 종도들의 교양을 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주님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특히 선택하신 열두 종도들에게 먼저 자기가 어떠하신 분임을 깨우쳐 주시기 위하여 기거를 같이 하시고 말씀으로 가르치시는 것보다 마음으로 깨우쳐주려 하셨다.
길고 긴 교양의 제일기가 마쳤을 때에 주님께서는 저희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시니 시몬 베드루가 대답하기를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천주의 아들이시라고 대답한 것은 주께서 그러한 대답을 들으시려고 기대하셨던 대답이었다.
주님이야말로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구세주시요 천주의 독생자시요 종도들이 이 신앙에 이르렀을 때에 주님은 처음으로 교회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종도들에게 위탁하시는 권위를 밝혀 주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하셨고 또 말씀하시기를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라는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나는 것 같이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하셨다.
그래서 주님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실 것을 밝히말씀하셨다.
주님은 과연 죽으셨다 부활하신 후에 저희들에게 보이시고 종도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고 승천하실 때에 주신 사명을 받았다. 그러나 주님은 이로써 그치지 않고 저희들은 주님께 받은 권위를 가지고 대리자로서 업적을 계속하여 서로 교제하며 떡을 메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써왔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아 천주의 의자된 자가 형제자매가 되고 천주의 가족으로 친히 교제들 하고 서로 도와주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한 가족은 여러집으로 나뉘어 아무 교류가 없었으나 이제는 분리된 가족을 합하려는 것은 천주께 감사한 일이다. 가족이 분리된 것처럼 슬픔은 말할 수 없다. 교회가 분리된 것처럼 슬픔은 또 다시 말할 수 없다. 우리세대에 보천하의 교회가 하나가 된다면 얼마나 기꺼운 일이랴? 그렇다면 성 시메온 송가를 힘껏 부르련다.
① 구미에 있어 대화는 크게 전개되어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 있어서는 추기경 또는 주교님들이 성공회에 와서 집회에 참석 또는 설교까지 하고 있으며 성공회의 주교님이나 신부도 이와같이 하고 있다. 천주교 예수회 신부는 1월 교회 재일치주간에 영성체를 공개하자는 말까지 하였고, 천주교 수녀들과 성공회 수녀들의 교류 또는 성공회 성분도회 설립 제25주년 기념에는 천주교 성분도 대원장 세분이 성공회 미사에 참석함이라든지 천주교 주교님과 성공회 주교님의 협의 아래 성분도회를 내년 봄에 설립하는데 여기에는 「루터」교에서도 가입한다 하며 다른 신교와 형제의 입회도 환영하는데 성전례는 각 교파로 집전하나 수사들은 성분도회 측에 의하여 생활한다 하니 얼마나 기꺼운 일이랴!
외국에서는 이와같이 전개되고 있으나 한국에 있어서는 너무나 보수적으로 천주교인은 다른 교파 사람보고는 믿음이 정통이 아니라 하여 지옥불을 면치 못할 터이니 영혼이 불쌍하다 하고 신교 형제는 천주교인 보고 우상숭배한다고 한다. 우리는 이러한 장벽을 뚫고서 서로 만남에 교류가 있고 교류가 있음에 서로 이해가 있다. 한국에 있어서는 성공회 주최로 선교사들의 대화는 있었으나 우리들의 대화가 없었음은 유감으로 생각한다.
②우리들도 대화의 가능성이 있다. 대화가 시작되기 전에 각 교 파 지도자층과, 한자리에 모여서 준비 대화를 시작함이 어떠한가 한다. 구미에 있어서는 WCC나 NCC모임에 천주교에서 끊임없이 「옵서버」 를 참석케 함이 대화에 큰 길을 여는 것이 아닌가 한다.
③대화에 있어 먼저 자기교회의 신조를 발표하고 성사를 중심으로 하여 공개적 대화를 기대한다.
④공의회에 있어, 우리는 충분히 히애할 수 있다. 공의회는 각 교파에 대하여 관용으로 할 것이니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들도 서로 사랑하라』 하심을 실행하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 (聖公會 神父)
■ 蔡基恩
너무 오래 對話 안했다
敎皇 聯邦敎會 指導者로
①사도 요한은 제2서에 이렇게 이록하였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10절)
「이 교훈」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세상에 임하셨던 사실을 믿는 교리를 가리킴이다.
역사적 하나의 교회가 비록 많은 교파로 분열되어 있더라도 한 하나님, 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또 그 말씀 곧 성경에 기초한 교회 생활, 신앙 생활을 하는 크리스챤들끼리 대화하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는 너무 오래 대화를 잃었었다.
그러나 오늘은 주님의 기도대로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한 17장 11절 하반)하는 기도가 응하는 시대이다.
오늘날 세계교회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에베소 4장 3절)는 교훈대로 실천할 열의를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교회도 피차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②우리나라에서 대화가 가능하다고 본다. 이미 대화가 시작되었다. 지난 「렌트」주간을 전후하여 서울 성공회에 회집하였던 교회지도자의 기도회나 선교사들의 「에큐메니즘 심포지움」 집회는 그 시초였다.
나는 프로테스탄 교회의 일원으로 종래에 가톨릭교회의 형제들이 매우 완강한 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의 형제들이 고(故) 요안 23세, 그후 바오로 6세 교황의 폭넓은 신앙태도에 호응하여 크리스챤들과의 교회일치 또는 대화의 선봉이 되는데 크게 감명을 받고 있다.
더우기 가톨릭교회는 질서있는 교단으로서 훌륭한 교황들의 신앙 지도대로 실천에 옮기고 있으므로 대화는 가능하다고 본다.
③대화상대자에 따라 대화 내용과 방법이 달라질 수 있다.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해돠가 끊어져 있었더니만큼 서로 서로 이해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전개하여야 한다.
역사적 하나의 교회가 갈라진 원인은 이미 교회사를 통하여 피차 알고 있으므로 그것을 새삼스러이 들출 필요가 없다.
서로 서로가 크리스챤이란 위치에서 상대편을 이해하는데 힘써야 한다.
동시에 서로 서로가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 성경 말씀대로 살려는 진지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크리스챤의 참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④두차례에 걸친 공의회에 대한 보도에 접할 때마다 새로운 세대의 획기적인 결정이 쏟아져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
특히 제도와 예식에 있어서 현대화에 주목한다.
한편 교회일치에 관련시켜 볼 때 제1단계로 성공회, 헬라정교회와의 일치에 있어서는 교황의 수위권이 인정되도록 나아갈 것이며 다음단계로 프로테스탄 교회와의 일치에 있어서는 땅위에 있는 교회들이 하나가 되기 위한 전제아래 연방제(聯邦制)와 같은 정치제도 이래서 교황은 땅위의 교회의 대표자로 추대할 수 있도록 합의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관측해 보기도 한다.
교리상으로 가톨릭교회아 프로테스탄 교회와의 사이에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일일이 말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한마다 한다면 바울 사도가 「고린도」서에 기록한대로 형제에게 대할 수 있다면 분열과 분장은 해소될 것으로 안다.
」2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소심하라』고(고전 8장 9절)- 이것은 제물을 거리낌없이 먹는 신자에게 하신 말씀이다.
『만일 식물이 내 형제를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 8장 13절)- 이것은 신앙의 자유를 주장하는 자의 자율적인 제한 행동이다.
그러므로 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 교회와의 일치가 실현되려면 형식을 고조하는 것이나 자유하는 이들이 서로 서로 이해하고 각각 성경말씀에 의거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모든 크리스챤들이 양심과 신앙의 자유란 전제 아래서 다만 제도와 기구에 있어서의 하나의 교회의 일원으로 인정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일치가 실현될 것으로 본다.
이러한 기대를 공의회에 걸어본다. <필자 … 크리스찬 주필>
■ 載天德
忍耐와 祈求해야
홀로를 위한 敎會 홀로 죽어
①물론 대화가 필요하지요. 다른 어느나라 보다 더욱 필요하지요. 동료 기독교인을 모른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교회나 神學的 見地에서 뿐만 아니라 단순히 그리스도의 枝體라는 個人的인 見地에서도 반드시 알 필요가 있읍니다. 고린도전서 1장 12절에서 성 바오로께서 우리 모두는 서로 서로 속해있고 우리중 아무도 『나는 당신이 필요없다.』라고 말할 수 없다고 경고하셨읍니다. 교회가 分離된 지체를 무시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손이나 발 귀 또는 눈을 잃어버린 몸과 같읍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그것은 마치 아무 형제도 없이 버릇없고 이기적이고 망쳐버린 獨子와 같은 것입니다.
종교개혁 이래 우리 기독교는 우리 스스로 만든 울안에 죄수처럼 갇혀 왔읍니다. 현대 문화를 죽 둘러싼 이 장벽은 백림의 「시멘트」담 보다 한국의 삼팔선보다 더 지독한 것이었고 커다란 종교적인 「스캔달」이었읍니다.
아직도 우리는 이 장벽에 대해 불안을 느끼지 않습니까? 기독교의 分離된 상태는 우리시대의 가장 큰 궁경입니다. 이 냉혹한 현실을 무거운 짐처럼 우리는 느껴보지 않았읍니까? 이 궁경을 느낄 만큼 우리는 감수성이 없읍니까? 對話는 수세기에 걸친 이 궁경을 타개할 기틀을 마련한다는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現時代의 긴급한 요구에 직면한다는 의미에서도 역사적인 것입니다.
한국과 같이 국토가 양단된 나라에서는 기독교의 통일이 더욱 절실하며 이를 위한 對話는 더욱 의미있으며 필요한 것입니다.
② 저는 벌써 對話가 시작되었고 또 퍼질 것임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우리 동료 기독교인들중 일부는 「에큐메니칼」(ECUMENICAL)이라는 말을 싫어한다는 것과 또 어느 일부는 우리와 함께 말하기를 원하지 않으며 이러한 형제들을 對話의 자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많은 인내와 이해 그리고 끈기있는 기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③ 지난 여름 제가 카나다의 「토론도」에서 개최된 세계 聖公會 公議會에 참석했었는데 「켄터베리」 대주교께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을 들었읍니다. 『홀로를 위하여 사는 교회는 홀로 죽는다』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가 의미하는 바는 우리는 곧 서로 서로 대화를 시작해야하고 그 대화로부터 보다 의의있는 사귐의 형태로 옮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 1書 1장 3절의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도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하는 말씀이 대화의 내용이 무엇이 되어야 할지를 암시하고 있읍니다.
우리는 서로 서로 천주에 대해서 우리가 보고들은 바를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억측을 論해서도 안되고 現實際를 피해서도 안됩니다. 만약 우리가 이를 형제들에게 증거하기 위해서 『生命의 말씀에 대해서 무엇을 보고 듣고 손으로 만지고 어떻게 주목했는가?』를 우리 각자 자신에게 묻게된다면 그 자신 또한 그의 信仰의 조사에 依해 덕을 보게 될 것입니다.
④ 공의회에 대한 우리의 希望은 全的으로 聖神에 의해 공외희가 인도되고 시작했을 때처럼 「생명의 말씀」에 대해 우리와 그들이 보고 들은 바에 관해서 나눠진 형제들의 증언에 귀를 기울이고 증거하는 것을 계속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REV ARCHER TORREY=聖公會 神父 · 聖 미가엘 神學院 院長)
■ 姜信明
短點보다 長點 찾자
하나되어 共同敵 부셔야
1962년 6월 하순 영국 · 북 「아이랜드」에서 모인 기독교 교육 연구회 및 세계 기독교 교육협회 총회에 가는 길에 「로마」에 들러 「성베드루」사원을 찾았을 때 당시 교황 요안 23세가 소집한 「바티깐」 공의회를 위한 준비가 한창인 것을 보면서 느낀 것은 동서교회와 신구교회가 한자리에 모인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 가슴이 벅차왔던 것이다.
세계적인 교회관계회의에 참석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요 우리의 주시라』는 공통적인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그 광경 그 모습은 하나님의 하나의 광경이 아니겠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게서 최후의 기원이 그리스도인들이 다 하나되게 하여 달라고 하였더니 만큼 그리스도의 이러한 기원에 배반하고 있는 서로 갈려져 있는 형제들은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여야 하고 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하나가 되려고 애써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부르심을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바울 사도가 권면한 그대로 그리스도인들은 모름지기 하나되기 위하여 힘써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할 때 「바티깐」 공의회에 동 교회와 성공회와 대신교회 대표들이 「옵서버」로 참석하여 대화의 길을 터놓은 것이나 세계기독교협의회 제3회 총회에 「바티간」 대표들이 「옵서버」로 출석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좋은 현상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세계교회의 움직임을 바라보면서 우리나라에서도 대화가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서슴치 않고 대화가 필요하다고 대답하겠다. 그 이유는 두어가지 점을 들 수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형제로서 서로 갈려져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형제는 한 아버지의 자녀들이 아닌가? 그러고로 서로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둘째로는 오늘 한국이라는 특수한 사정을 생각하여야 겠다. 민주와 공산이 대결하고 있는 한국에 있어 모든 자유진영은 신앙을 초월하여 민족적인 견지에서 유물사관에 입각한 공산세력을 막아내기 위하여서라도 단연 모든 자유진영은 총력을 집중하여야 하리만큼 우리나라에서도 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대화가 필요한 현실에 직면하여 있는 이때에 대화가 가능하냐고 하면 여러가지 애로가 많이 있다. 그러나 다같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의식을 명확히 하고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애쓴다면 대화의 길을 찾을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사람들이 잘못함으로 갈라졌으니 만큼 사람들이 노력하면 방안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전 교황 요안 23세와 현 교황 바오로 6세가 보여준 관용성과 과감성은 신구교회와 동서교회 사이에 대화가 성립되고 진행시킴을 보아서 피차에 편협하고 고루한 생각을 버리고 모든 선입감을 버리고 대한다면 대화가 가능하다고 본다.
이제 다음으로 오는 문제는 대화가 성립된다면 대화의 내용을 무엇으로 할 것이냐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래도 이러한 대화는 신구교회가 가지고 있는 서로 갈려진 이후에 생겨진 의식니아 제도가 같은 것 보다 언제나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구속문제와 선교문제가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근자 신교 자체안에서 갈라지게 될 때에는 서로 상대방을 헐뜯게 되는데 우리의 대화도 이러한 면에서 서로 상대방의 결점을 들추어 내지 말고 먼저 공통점을 찾고 공통과제가 무엇인가 대화의 내용으로 하고 진지하게 검토하는 가운데 대동단결 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할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은 구속의 은총을 온세상 널리 알도록 힘써야 할 것이 공통과제가 아니겠는가. 따라서 이것이 대화의 중심의제가 되고 내용이 되어 교직자들의 선교운동과 평신도들의 사회참여가 강력하게 추진되어야 하리라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에서 교회일치를 위한 대화를 가능케 하는 동시에 이것을 세계적으로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역시 「바티깐」 공의회에 대하여 기대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우리는 곧 하나의 교회의 실현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피차의 복음의 본질이 아닌 것을 살펴서 비복음적이요 비성서적인 요소가 하나 둘씩 제거되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하기 까지에는 하나의 교회를 기대할 수도 없고 기대하여도 안될 것은 그것은 참된 의미에 있어서 교회가 아니요 결국 인간적인 조직체의 교회에 지나지 않겠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바티깐」 공의회에 대하여 많은 기대를 가진다. 그러나 그것은 겸손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서 서로 만나고 이야기함으로써 피차의 부족한 점을 시정하고 더 좋은 길을 함께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주관적인 때와 객관적인 때에 그 결과는 크게 다른 것을 알기 때문이다. (大韓예수敎 長老敎會 總會長)
■ 하나의 敎會로 돌아가야 - 李永獻
「로마」敎會 絶對觀 버리고
누가 머라든 오늘 우리의 비극은 하나여야 할 교회가 하나가 아니라는데 있다. 갈려진 어느 교회는 갈려질 때는 명분이 있고 이유가 있다.
그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이 말하는 이유를 들어 보면 그 어느 것도 그르다고 할 수 없는 정당성을 지니고 있다. 어디까지나 그들은 최선한 양심과 신앙으로 진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심령이 구원을 위하여 그러한 일을 아니 밟을 수 없어서 그렇게 되었음을 이해해야만 하겠다.
하나 어느누가 이 갈려진 교회를 옳다고 하겠느냐. 어느 누가 이 갈려진 교회에 만족하겠느냐 말이다. 다시 하나의 교회로 돌아가기 위하여 대화가 있어야 한다. 세계가 사상적인 대립, 주의의 싸움으로 무척 부대끼다가 이제는 이해와 협조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교회는 왜 하나에의 복귀에 외면해야 하느냐 말이다
교회가 하나여야 할 이유는 여러가지다. 다같은 하나님을 믿고 다 같은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다 같은 구원의 복음을 가지고 있고 다 같은 한 소망 하늘 나라를 기다리고 있다는 이 복음의 본질이 그 하나의 이유로 또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선교하는 종교다. 복음이 시작된 후 오늘까지 수많은 선교사들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한 것은 사실이지만은 오늘처럼 세계가 복음에서 멀어지고 이교화한 때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어느 한 교회가 세계를 복음화하는 이 벅찬 과업을 단독으로 감당할 수 있겠느냐 말이다. 오늘 우리는 양면에서 공동의 적을 상대해야 한다. 한편에는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무신론 공산주의가 있다.
공산주의는 가톨릭교회만 노리는 것도 아니요 프로테스탄교회만을 노리는 것도 아니다. 공산주의가 가톨릭교회를 칠 때 프로트스탄 교회가 우리는 가톨릭 교회가 아니니 상관없다고 구경만 한다든지, 반대로 공산주의가 프로테스탄 교회를 박멸할 때 가톨릭 교회 측에서 우리는 프로테스탄이 아니니 관계 없다고 옆에서 구경꾼 노릇만 한다든지 하면 뒤에 오는 결과는 불문가지가 아니냐 말이다.
가톨릭을 박멸한 공산주의는 반드시 프로테스탄을, 프로테스탄을 박멸한 공산주의는 가톨릭을 반드시 부수고야 말 것이다.
다른 한편 우리는 또한 무신론 반종교적인 과학에 직면하고 있다. 과학을 전부가 다 반 기독교적이라든지 반 종교적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말이겠지만 어느 의미에서 기독교가 학적으로 도전해 오는 과학 앞에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도 부인 못할 사실이다. 이러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서는 공동의 광장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또 대화는 가능하다. 생각해 보라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고 같은 성서를 가지고 있는 우리들이라면 차이점은 복음에 대한 사람들 입장과 견해의 차이에 있지 복음에 차이가 있거나 신앙의 대상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절대화 할 수 없다고 한다면 어느 누구의 사상이나 견해도 자기 것만이 절대적이라고 고집할 수는 없다. 서로 서로 자기를 반성하고 다른 사람이야기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교회 문제도 이렇게 보아야 하지 않느냐 물론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요 또 이런 의미에서 교회가 신앙의 대상이 되어 교회의 신성불가침을 우리가 인정해야 하겠지만은 교회는 또한 사람들의 모인 고싱고 보면 교회의 상대성을 부인할 수도 없지 않느냐 말이다.
내 교회만이 절대적이라고 고집한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이냐 말이다. 서로 이러한 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상대방의 교회가 무엇을 말하는 것을 들으려고만 한다면 교회의 재일치를 위한 길이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만약 교파들 간에 공동의 광장이 마련된다면 거기서 논의되고 대화되어야 할 내용은 무엇이어야 하느냐. 신교와 구교가 본질적인 신앙에서 동일하면서 다른 점이라면 구원을 얻는 방도에 있다.
신교는 믿음으로의 구원을 강조하고 구교에서는 믿음과 행위의 구원을 강조한다. 행위를 필수 조건으로 삼을 때 그것은 복음의 본질에 문제가 있고 행위를 무시하고서의 신앙이란 이름좋은 공론에 멎고 만다. 다시 우린느 신앙과 행위의 문제를 대화의 문제로 삼아야 한다. 거기에는 반드시 견해의 일치에의 길이 있을 것이요 또 있어야 한다.
신교와 구교가 다 동일한 성서를 가지고 있다. (권수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은) 그러나 해석에 대한 차이가 있다. 과거 가톨릭 교회에서는 성서의 원문에서의 개인의 자유 번역이 금지돼 있었고 또 교황만의 성서 해석의 권리를 보유하였다. 다행히 근자 가톨릭 교회에서는 원문 성서에 대한 관심이 깊어가고 원문으로부터의 직접 번역을 권장하고 있다.
신구교간에 공동으로 성서 번역을 한다고 하면 피차 많은 이해가 있을 줄 안다. 교황의 독점적 성서 해석이 권위란 재고해야 한다. 베드루는 어느 특정한 개인에게가 아니라 「비두니아」에 흩어진 모든 성도들에게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했다면 그리스도인은 누구나가 다 제사장이 될 수 있고 성서해석의 권리가 있다.
이외에도 대화가 돼야할 문제가 있겠지만 지면 관계로 생략하기로 하고 「바티깐」 공의회에 대해서 말하기로 하자. 루터의 종교개혁은 그 근본의도가 교회 분열에 있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교회 안에 있어서 잘못된 것을 고치려 한 것이었으나 「로마」주의자들이 그를 몰아내고 보니 교회는 분열되고 마랐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트렌트」 공의회는 여러가지 면에서 가톨릭교회의 부흥을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간의 장벽을 쌓은 불행을 가져왔다. 바티깐 공의회를 「트렌트」 공의회와 완전히 대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두고 보아야 하겠지만 교파간의 적대 의식을부수어 버리는데는 확실히 위대한 일을 해놓았다고 볼 수 있다. 분위기 조성만이 아니다. 교황의 독점적인 권위를 일부 주교회의에 양여했다는 사실이다.
서엇에 대한 재인식, 미사 의식을 단순화하여 평신도에게도 그 의미를 더 가지게 했다는 것은 교파간의 재일치를 위하여 매우 고무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만을 가지고 교파가 완전히 하나로 돌아가게 되리라고 한다면 지나친 낙관이요 속단이다. 로마교가 신교에 대한 새로운 부드러운 태도를 가지고 나옴에도 불구하고 로마교회의 교리가 전승을 절대시하고 단순히 용어와 어휘상이 오해가 종교개혁을 가져왔다고 보고 이에대한 재음미만 힘쓴다는 것은 종교개혁의 진의를 모르는 소치라 할 수 밖에 없다. 바라기는 「바티깐」 공의회는 이러한 점들을 반성하고 로마교 자체가 절대시하는 전승과 교리들에 대한 재검토를 하고 신교와의 대화를 한다면 교회는 다시 하나로 돌아갈 날이 온다고 본다. (基督公報 編輯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