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敎會(한국교회)와 平信徒(평신도) 그들은 어디에 서 있는가
主敎會議에 바란다
발행일1965-01-24 [제455호, 1면]
교회는 조합이나 협회가 아니다. 백성이 모여 제 우두머리를 묶는 사회구조와도 다르다. 교회의 백성은 교회의 창립자도 아니요, 그 권위도 아니다. 교회는 바로 신익(神益)의 사회이며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이루어진 신자 단체이다. 그 구성원은 오로지 천주께 봉사(奉仕)하는 백성이며 천주 친히 섭리(攝理)하시는 단체이다. 그 주재자(主宰者)가 하나이요 거룩하고 공변되기 때문에 그 교회도 또한 하나이요 거룩하고 공변되기 마련이다.
사람이 사는 사회는 어디서나 어느 시대에나 그 본질성에서 오는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이 공통성은 특히 교회 안에서 현저하다. 천주께로 향하는 인간의 자세(姿勢)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교회의 전부는 아니다. 적어도 지상(地上)의 교회(可見敎會)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역사 속에서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급격하게 흐르는 작금(昨今)의 역사는 교회에도 시대적인 지역적인 대응(對應)을 요구하게 되었다. 지금 계속 중인 제2차 「바티깐」 공의회의 주요 의제가 모두 이러한 새로운 요구에 대한 문제들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대응을 통하여 세계의 모든 인류가 하나인 교회로 모이게 하고 이 교회 안에서 천주를 찬미하고 자기를 완성하자는 것이다.
한국교회도 이러한 역사적 발전에서 제외될 수 없다. 그러나 본지(本紙)와 다른 교회 간행물과 사회 통신을 통하여 「바티깐」의 소리가 계속 전파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반응이 비교적 미약하다. 아직 교회의 역사가 얕은 전교지방이라는데도 그 이유가 있겠으나 교회 내 성직자층과, 지성인들의 각성이 부족한데 더 큰 원인이 있지 않는가 생각한다.
평신도의 사도직 문제는 교리상 하나도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필요성과 기대가 오늘과 같이 아쉬운 때는 없었다고 본다.
부족한 성직자의 전교활동을 돕는다는데도 그 의의가 적지 아니하나 그보다도 평신도가 아니면 효율적으로 그 사명을 완수할 수 없는 전교분야와 교회운영분야가 뚜렷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 하는 반(反)교회적 흐름을 배제하고 다가올 사악(邪惡)을 방지하기 위하여 평신자만이 할 수 있는 활동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 교회의 평신자들이 이 필요성을 얼마나 절실하게 느끼고 있으며 어느 정도 이에 대응하는 자세를 갖추어 활동하고 있는가? 특히 가톨릭 지성인들이 얼마만큼 각성하고 있는가? 또한 교정(敎政)을 직접 담당하고 계시는 성직자들이 어느 정도의 의욕과 수완으로 평신도들을 다루고 있는가?
나는 한국 교회의 평신도들의 사회심리를 진단(診斷)할만한 자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우리들의 일상 접촉을 통하여 느껴지는 것들 중에서 극히 중시(重視)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그 하나는 소위 중견신자층(?)에 소리 없이 흐르고 있는 「안띠 끌레리깔리즘」에 흡사한 생각들이다. 이와같은 잠류(潛流)가 어느 일부층에만 있다고 하더라도 평신도 사도직의 전망을 흐리게 하는 중대한 문제이며 큰 반성거리가 아니될 수 없다. 더구나 이와같은 불만이 좀 더 무엇을 해보고저 하는 층에서 나온다면 더욱 깊은 관심거리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런 층에서는 이번 공의회 석상에서 발언하신 여러 교부들의 말씀에서 많은 위로와 희망을 걸고 있다. 둘째는 일부층에 흐르고 있는 독자적 신앙태도와 신앙적 은거(隱居) 생활이다. 그 중에서도 이러한 태도가 어떤 반발(反撥)에서 온 것일 때에는 더욱 문제된다.
그들은 「까수이스띠끄」한 신앙생활 속에 박혀 신음(呻吟)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 신앙적 결함을 나무라기 전에 그 구제(救濟)가 더 급하다고 본다. 셋째는 평신도 사도직을 수행하기 위한 합리적 기구(機構)의 결핍이다. 공동활동의 그 합리적 기구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있다. 단체활동의 경험이 적거나 의욕 없는 단체를 만들어 별 재미를 보지 못하였거나 혹은 아집(我執)이 센 사람들은 흔히 기구(機構)를 무시한다. 그러나 한 말로 교회가 그 기구를 떠나 발전할 수 있는가 묻고 싶다. 평신도 사도직의 수행을 위한 기구의 분화(分化)와 그 종합에는 무엇보다도 교정자(敎政者)의 결정적 노력이 필요하다. 끝으로 나는 소위 가톨릭 지성인들의 많은 각성을 호소한다.
각자가 천주께로부터 받은 자기 소명(召命)의 발견과 그 수행(遂行)에 일층 적극적이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