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엘리옽과 「偉大(위대)한 社會(사회)」
現代人의 不幸은 靈魂의 喪失
발행일1965-01-24 [제455호, 4면]
T.S.엘리옽은 존슨 美國 大統領이 세계적인 인류 단합, 「偉大한 社會」를 詩的으로 표현한 享年 76세를 일기로 이승과 하직하였다. 엘리옽은 그가 받아들인 현대인과 현대사회에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그가 말한 것은 아뭏든 阿附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토마스.스틴스.엘리옽이 보는 현대인은 의미 깊은 뿌리에서부터 단절된 존재, 따라서 선택의 자유를 잃은 존재였다. 물론 문화의 모든 피상적인 면에 있어 활동하는 인간이다.
그러나 그 활동에 의미를 주는데 필요한 靈魂을 현대인은 잃고 있다. 인간은 그저 나고 살고 愛憎의 물결을 따라 流動하다가 사막에서 정신적 샘물이 매마른 文明의 황무地에서 죽어가는 것뿐이다. 이것이 詩聖 엘리옽이 가진 현대인에 대한 「비전」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세대, 따라서 이미 지난 세대의 「비젼」이다.
그러면 현대, 우리의 시대는 어떠한가? 아직도 이 세대는 사막을 헤매고 있는가? 晩年의 더욱 성숙된 엘리옽의 정신은 그의 現代人觀에 한 새로운 _面을 주었다. 그것은 인간을 聖灰水曜日 즉 뉘우침의 재(灰)를 받는 날로 이끌어간 것이었다. 그러나 그 人間像은 완전히 여기서 그치고 만다. 자신의 「딜렘마」를 어렴풋이 알게된 인간이 무엇을 해야할지 엘리옽은 해달을 주지 않고 있다. 하긴 그 자신의 예술에 충실한 詩人은 의사도 아니요 고해신부도 아니다.
엘리옽이 죽은 날, 존슨이 믿는 「偉大한 社會」가 탄생하는 나의 모든 현상은 어떻게 자체를 위대한 것으로 이룩할 것인지 아무런 이념도 가지지 못한 세대로 태어나있다. 엘리옽의 말에 의하면 인간은 단지 먼 장래를 내다보는 것만으로 자신을 알아낼 수는 없다. 앞에 놓인 길을 알아야하는 것과 같이 걸어온 과거의 길도 또한 아랑야 한다.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가는 것인지 전혀 모르는, 스스로가 무엇이며 그 先祖들이 어디있었던지조차 아는 것이 적은 세대는 사막을 헤매는 운명을 自_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천주의 選民인 이스라엘 민족이 40년간이나 광야를 彷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과거에 있어 그들에게 일어난 그 일들을 까마득하게 잊은데서 결과된 것이 아니었던가?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한 것을 비롯하여 많은 죄악을 그 당시의 유태인들은 저질렀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불행한 것은 눈을 딴 곳에 팔아 진리를 直視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엘리옽의 이같은 現代人觀은 「偉大한 社會」를 이룩할려는 오늘의 世代의 사람들을 위해 의미심장한 것이다.
엘리옽이 그려낸 人間 중에 가장 허무감에 사로잡힌 인간은 J.A 푸루프록이다(「J.A.푸르프록의 __」 참조) 푸르푸록은 소위 人生__에 싫증이 난 사람이다. 그는 有識하고 敎養 있으며 社交에 能하고 肉體를 享_했으며 性에서뿐 아니라 보다더는 社會的인 名望을 거두는데는 성공한 사람이다. 적당치 못한 것은 그 가능성까지도 피함으로 자신의 姿勢를 빈틈없이 다룰 줄 아는 인물이다. 그는 사실 不安定을 주는 것이면 모든 것을 내던졌다.
엘리옽의 이같은 現代人觀과 모든 것에 앞서 무사하고 안전하기만을 찾고있는 現代文明 사이에는 相互__이 없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 많은 나라들은 될 수 있는대로 세상의 不幸에서 멀리 눈을 돌리고 자신의 安全만을 추구하고 있다. 엘리옽은 나만의 安全만을 찾는 人間性보다 더 불행한 人間性은 없다고 보고 있다.… 오늘의 인간은 자신의 내일을 政治人들과 기타 專門家들에게 내맡기고 있다.… 조그마한 責任도 스스로는 지지 않으려고 한다. 엘리옽이 미리 내다본 것이 오늘 이루어져가고 있다. 創造의 神秘와의 생활한 紐帶를 잃고 似而非哲學者와 似而非哲學者들이 주장하는대로 인간은 그 자신이 마음대로 制_할 수 없는 __의 __ 속의 한 마디에 불과하다고 확신하는 현대인은 그 옛날의 빌라도와 같이 자기가 責任져야 할 일에서 손을 씻고 돌아선다.
現代人은 英魂이 되어보려는 것은 헛된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英魂的이 아닌 삶이 훨씬 나을 것이다. 사실 人生이라는게 그저 나서 살다가 죽는것 뿐이라면 英魂이 돼야할 무슨 건덕지가 있겠는가?
엘리옽의 詩__을 통해 現代人은 어디서나 神의 속삭임, 美와 神秘의 _動, 달리는 騎士들의 말굽소리, _女의 呪文, 하늘에 닿는 讚歌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엘리옽의 現代人은 찻잔이 부딪치는 _音에 묻혀 이 모든 소리를 듣지 못한다.
이 같은 소리가 「偉大한 社會」를 꿈꾸는 우리 세대에도 울려오고 있다. 다만 安慰만을 찾는 우리 귀에는 그것이 들리지 않을 뿐이다.
엘리옽이 그려내는 英雄的인 人間像은 「베켈」의 토마스대주교이다. (「大聖堂의 殺人」의 主人公) 토마스는 천주께 충실하기 위해 權力·安易·自尊心에 대한 誘惑과 싸우는 인물이다.
이제 엘리옽을 이을 現代의 偉大한 詩人이 이 時代의 英雄, 自身에게 충실할 수 있는 英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하나의 큰 숙제이다. (레지스터紙에서)
토마스 『주의 피는 목숨을 구원하기 위하여 바쳐졌고 내 피는 주의 죽음에 보답키 위하여 흘리는 것이다. 주의 죽음에 대한 보답으로 내 죽음을.』 (詩_ 「大聖堂의 殺人」 中 主人公 토마스대주교가 殺害되는 場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