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81) 虛實(허실) ④
발행일1965-01-24 [제455호, 4면]
진호는 눈을 크게 뜨고 나의 아래위 모습을 바라본다.
『어때요? 오늘부터 구두닦이 개업했어요.』
나는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진호는 자기 눈을 의심하는듯이 재삼 나의 누추한 꼴 위에 시선이 오락가락한다.
『구두닦이 같애요?』
나는 바지무릎의 기운자국과 허룸한 남방샤쓰를 스스로 훑어보며 물었다.
『설마… 농담이겠지?』
진호는 믿지 않는 얼굴이다.
『농담 아니야요.』
나는 구두약과 헝겊과 솔이 들은 목판을 열어 보였다.
『…생활 때문에?…』
진호는 나직히, 동정하는 표정으로 묻는다.
『아니요.…』
나는 여유 있게 고개를 저었다.
『……………』
진호는 내 얼굴을 말끔이 바라본다.
『…생활 때문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그런 꼴을 하고 나서는거야?』
진호는 성난듯이 말한다.
『당장 쌀 살 돈이 없는걸요. 아무거라도 해야지 헐 수 있어요.』
나는 아직도 입가에 웃음을 담고 말했다.
『그처럼 생활이 급해졌나요?』
『그러나 생활 때문은 아니야요. 구두닦이 말고라도 더 수입 많은 일자리가 얼마든지 있거든요. 가령 「빠」에 나간다면 한 달에 수만원의 수입은 되거든요.』
『………』
진호는 걷잡을 수 없다는 얼굴로 유심히 나를 바라볼 뿐이다.
『놀라실 것은 없어요. 구두닦이가 따로 있나요. 목판을 들고 나서면 누구나 구두닦이지요!』
『허구 많은 일 중에 하필이면 왜 구두닦이를 선택했지?』
『아버지가 구두닦이는 하지 말라고 하길래…』
나는 입문을 활짝 열고 웃음소리를 언덕 위의 맑은 대기 속으로 날렸다.
『…아버지는 돈 잘 버는 「빠」에 나가라지 않아요. 나가라는 「빠」는 나가기가 싫어서 구두닦이 하기로 결심했어요.…』
진호는 생각는 얼굴로 내 얼굴을 아직도 지긋이 바라본다.
『…진호씨의 구두닦아 드릴까요?』
나는 그의 발 밑에 목판을 놓고 그의 구두를 닦으려고 하니, 진호는 얼핏 뒤로 물러선다.
『왜 오원 없으세요? 그럼 거저 닦아 드릴깨…』
진호는 나의 농담에 웃지도 않았다.
나를 찾아왔던 길인양, 진호는 나와 함께 언덕길을 내리면서 한동안 잠잠하던 입을 열었다.
『「미스」양에게 그런 용기가 있을 줄은 몰랐어?』
진호의 눈은 다정스러웠다.
『이 언덕은 왜 올라 오셨어요. 어디로 가시는 길이었나요?』
『「미스」양한테…』
『나한태요?』
『그간 어떻게 지내는가 궁금해서…』
진호의 얼굴 위에 한줄기 광선이 스친듯 했다.
(진호는 지금도 나를 맘속에서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일까?)
나는 속으로 혼자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사랑을 받을만한 자세를 갖지 못했지…)
스스로 이렇게 대답했다.
『…「미스」양이 어떻게 사내도 아닌데 구두닦이를 하겠어? 내가 딴데 일자리를 구해 보겠어.』
『무슨 일자리?』
『과외공부 같은거 어때? 중학 일. 이학년 영어같은거 가르치면 좋지 않겠어?』
『그거 수입 얼마나 되어요?』
『몇 명을 모아서 가르치면 한 달에 몇 천원은 될거야요.』
『그거 언제쯤 될 수 있어요?』
『글쎄? 알아보아야겠어!』
『그런 자리가 생길 때까지는 구두닦이를 할테야요!』
『정말 할 수 있어?』
『…왜 못해요!』
나는 태연스럽게 말은 했으나, 마음 한 귀퉁이가 떨리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나순이에게는 결단성이 있거던』
진호는 감탄하는 눈으로 나를 돌아본다.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이지 아무 것도 아니야요』
나는 혀바닥을 내밀며 입을 비죽했다.
『「미스」양의 기분은 알겠어…』
진호는 혼자말 비슷이 입속에서 중얼거렸다.
『올바른 애정에 주려 있을거야』
진호의 이 말은 내 마음 속 오솔길을 깊이 가로질러가는 힘이 있었다.
언덕길을 내려서 한 길목에 이르자 나의 발걸음은 무거워진다.
오고가는 모든 시선이 나에게로 집중하는 것 같다. 가장 시시한 역(役)을 맡아 가지고 무대애 나온 허수룩한 배우같이 내 자신이 바라다보인다.
『언니 이리 와 내가 좋은 자리 가르쳐줄께….』
오빠되는 사내아이가 네거리 모퉁이로 앞질러 가면서 소리친다.
진호가 옆에 없었더면 나는 발걸음을 돌렸을지도 몰랐다.
진호는 내가 어떻게 하는가 하고 바라보고 있다.
나는 빙긋 웃으며 나의 무거운 몸둥아리를 낭떠러지로 내던지는 기분으로 남매가 자리잡은 구멍가게 앞으로 걸음을 내켰다. 뒷통수에는 진호의 시선을 느끼면서….
『야, 구두 닦아라!』
삼십 남짓한 신사복에 머리를 뺀질하게 기름칠한 남자가 남매 앞에 발을 내밀었다.
『언니 닦을래? 언니가 먼저 닦아…』
오빠 아이는 이렇게 말하며 그에게 온 최초의 손님을 나에게로 양보하는 것이었다. 어리둥절하면서도 「넥카치후」 속에 이마를 감추고 목판을 남자의 구두 앞에 내밀었다.
『인제 보니, 처녀구두닦일세?』
사나이는 빙긋이 웃으며 나를 내려다본다.
나는 아무말 않고 그의 구두를 닦았다. 구두닦는 모습은 늘 눈여겨보아 두었고, 안집 남매한테서 들은 예비지식도 있는지라,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는 제법 익숙하게 닦아댔다.
사나이가 주는 오원짜리 백동전을 손에 받을때 기분이 이상했다. 내 자신이 밑바닥에 푹빠진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무언지 따뜻한 감이 가슴에 울렁거렸다.
나는 이날 저녁 무렵까지 스무켤레의 구두를 닦았다.
둘이서 열다섯 켤레를 닦은 남매보다 더 많았던 것은 호기심으로 나한테 발을 내미는 손님이 더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는 길에 남매에게 오원짜리 캬라멜을 한갑씩 사주고 언덕길을 오르려하니, 진호가 그곳에 서 있었다.
『얼마 벌었어?』
진호가 웃으며 묻는다.
『백원!』
나도 웃어보였다.
진호는 새까맣게 구두약이 묻은 내 손을 바라보더니 손을 만져준다. 그가 손을 뗀 뒤에도 그의 체온은 오래오래 내 손에 남아있었다.
『나는 이 언덕에서 한 시간 전부터 「미스」양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어!』
거기서는 한길 네거리가 약 백「미터」 거리에 내려다 보였다.
나는 진호의 시선을 따라 내가 구두닦이 하던 네거리를 한동안 내려다 보았다. 서산에는 저녁 노을이 회색으로 변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 날의 이 새로운 경험은 나에게 귀중한 것이었다. 그날 즉시는 깊이 깨닫지 못했으나 허황한 벌판같은 내 마음에 한알의 씨가 뿌려졌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