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尹聖範
敎會一致 그리스도의 「뜻」
敎會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肢體로서 갈라질 수 없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敎訓과 使徒들의 證言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에 와서 구태여 敎會가 一致되겠다고 하는 것은 도리어 異常한 감이 날 정도입니다. 그러나 現實的으로 우리 敎會가 갈라져 있는 것만은 사실이며 이러한 不幸한 事態를 早速히 解決하려고 努力하는 것은 그리스도人으로서의 當然한 義務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와는 달리 敎會는 갈라질 수 없다고 해서 아무 融通性이나 自由없는 拘束 가운데 몰아넣는 것도 그리스도의 뜻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듯은 아무러한 多樣性도 發見할 수 없는 千篇一律的인 單一性 -예컨대 우리의 肉體만 보아도 여러 肢體가 있어서 한몸을 이룬 것과 같이-을 主張하시려는 것도 아닙니다. 머리 되시는 주님은 한분이시지만은 많은 肢體가 합해서 한몸을 이루는 것이 마치 여러 敎會가 그리스도의 肢體로서 各己의 特異性을 發揮하면서도 서로 關聯을 가질 수 있는 것과 경우는 매일 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敎會一致運動은 결코 모든 敎會를 때려부수어서 하나의 敎會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個性을 살리면서 相互關聯을 有機的으로 가져보자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우리 韓國 안에서도 各敎會와 相異한 敎派相互間에 對話가 있어야 될 것은 도리어 當然한 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러한 種類의 對話는 말하자면 우리의 肢體의 各部分을 連結시키는 神經系統과도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各肢體의 孤立을 메우기 위해서 먼저 着手해야 될 것은 이러한 對話를 통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對話를 통해서 서로의 靈과 靈이 通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對話가 끊어질 때에 우리는 孤立된 分裝된 肢體로 아무 힘도 發揮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敎會一致 문제는 全世界의 그리스도 敎會의 課題이며 同時에 우리 韓國敎會에 있어서도, 비록 규모는 적다 할지라도, 同一한 重要性을 띤 문제가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全世界的인 課題의 解決은 적은 敎會와 敎會, 敎派와 敎派 사이의 아름다운 調和와 一致에서 시작되는 것을 알 때에 韓國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種類의 有機的 關係는 곧 全世界의 課題의 解決의 第一步라고 생각해도 좋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對話形式과 內容을 必要로 해야되겠읍니까? 물론 여기는 根本的인 對話도 있을 것이고 또는 姑息的인 對話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世界的인 潮流라고 생각해서 덮어놓고 이러한 運動에 參與해서는 안되겠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적어도 根本的인 것, 곧 一時的인 潮流로서가 아니라, 敎會의 根本眞理의 實踐으로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안되겠읍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對話는 단순한 「말씨름」이 어서는 안되고, 靈과 靈이 통할 수 있는 對話가 아니어서는 안되겠읍니다. 이러한 對話形式과 內容은 우리가 各己 가지고 있는 어떠한 制度나 固定된 敎理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다시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敎訓과 使徒들의 가르침으로 올라가서 시작하지 아니해서는 안되겠읍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는 初代 그리스도敎會의 精神으로 溯及해 올라가서 이러한 對話를 發足시키지 아니하고는 아주 어려운 難關을 免할 길이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聖經말씀으로 돌아가서 그 말씀의 靈的 能力에 부딛쳐서 비로소 우리의 對話는 成立되어야만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마음과 마음이 合하는 곳에 모든 制度와 敎理의 相異도 해결될 날이 오리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이러한 聖經말씀에의 復歸와 同時에 敎派間의 間隔을 메우는 가장 빠른 方法으로는, 우리가 피차 敎理는 多少 다를망정, 같은 目標를 向해서 어떠한 事業을 共同으로 해나가보자는 것입니다. 예컨대 社會事業, 學生運動 같은 경우입니다. 물론 단번에 하기는 어렵겟지만은 조그만큼씩 그리고 文書運動 같은 것을 통해서도 서로 對話를 實現해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基督敎同人誌 같은 것은 하나 나올만 한 것이며, 超敎派的인 合唱團 같은 것을 結成해 보는 것도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바티깐 公議會에 期待하는 것은 물론 여러가지 사소한 문제들이 많이 있겠지만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로서는 聖經말씀을 速히 公同的으로 번역해 보았으면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이 可能한 것은 벌써 여러 方面에서 시사되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번역을 통해서 敎理의 統一, 制度와 典禮의 統一과 같은 문제도 쉾게 處理되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가톨릭적이나 프로테스탄 高位層의 人士들의 문제이기도 하며 同時에 번역문제는 各 地域別로 다루지 아니하면 안될 문제로서 우리 個體國家나 地方單位의 문제도 되는 지극히 重要한 문제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牧師 · 監理敎神學大學 敎授)
■ 兪虎溶
初代敎會 「信仰」에 돌아가자
「그리스도 唯一하신 主」
①敎會一致 問題에 대한 新舊敎會間의 對話는 우리나라에서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 理由로는 우리나라 基督者들은 누구도 그 信仰의 出發當時부터 敎派敎會를 自意識으로 選擇한 것이 아니고 처음 宣敎師나 傳道人들을 通하여 福音을 받고 그리스도께 歸依할 때 그 傳道人이 어느 敎會에 屬하였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敎會가 決定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信仰生活을 통하여 더우기 敎會生活의 訓練을 쌓고나서 敎會의 本質을 알게되더라도 特殊한 __이나 決斷없이는 좀처럼 敎會를 옮기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또 自身이 屬한 敎會만이 敎會로서의 本質的인 敎會性을 缺如한 것이 아니고 나뉘어 있는 地上의 歷史的敎會는 그 規模의 大小와 또 그 歷史的인 傳統의 長短의 差異는 있다하더라도 꼭같이 缺点을 가지고 있는 것은 否定할 수 없기 때문에 現實狀態에서 敎會를 옮긴다는 것은 아무런 意義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敎會는 歷史의 過程에서 잃어버린 本然의 모습을 回復하여 「하나」의 形態를 形成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께서 約束하신대로 再臨하실 때 그리스도께 金_臺를 옮김받아 敎會의 名分을 喪失케 될것을 豫感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敎會는 宣敎를 한 歐美의 敎會들이나 宣敎를 받은 地域의 敎會(勿論 우리 韓國敎會도)가 하나님 앞에서는 꼭같은 位置에 서있고 또 꼭같이 歷史的으로 共同使命을 띠고있다.
그러므로 敎會再一致에 關한 問題를 歷史的으로 論하려면 世界各地域에서 同時的으로 나뉘어 있는 敎會끼리 피차 對話해야 할 것은 定理일 것이다.
② 勿論 可能하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三位一體神의 第二位인 聖子이시라는 事實과 全體敎會의 머리되신다는 것과 우리 모든 믿는者들의 救援의 唯一하신 主이신 事實을 確信하는 사람이라면 人爲的인 方法으로 그리고 人間들의 罪過로 因하여 扮裝되어 굳어진 障壁은 이를 除去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聖靈의 從事하심을 힘입어 누구나가 마주않아 敎會問題나 심지어는 個人의 信仰問題까지라도 피차 對話한다는 것을 自然스러운 일이고 또 絶對必要한 일이라고 본다.
③對話의 內容은 무엇이어야 할지?
敎會는 本來 예수 그리스도의 十字架의 贖罪愛로 救贖된 聖徒들의 그리스도를 中心으로 한 信仰의 共同生活體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어떠한 한 사람의 信仰의 經驗에 立脚한 單一的인 恩惠나 祝福의 膳物에만 依存되고 左右될 수는 없다. 그 敎會를 形成한 모든 信者들의 恩惠의 體驗을 複合하고 啓示된 聖經말씀을 土台로 한 生活의 聯合體制인 것이다. 이것은 어떠한 個體敎會나 單一敎會에만 限定된 것이 아니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또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고 우리 罪人間들의 救主로 信仰하고 告白하는 地上의 모든 敎會에 適應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聖徒들의 交際가 끊기고 막힐 곳에는 그리스도의 몸된 敎會는 形成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 말한 聖徒의 交際가라는 것은 甲이 乙이 되고 乙이 丙이 되어 이제까지의 自我의 存在의 位置와 生存의 使命을 變質한 後에 單一體를 構成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바울 使徒는 그리스도의 몸의 肢體된 聖徒들의 生活體가 어떠한 것이라는 것을 分明히 解明하였다. (고린도 前書 12장 12 以下 參照) 어떠한 理由로도 聖徒들 間의 恩惠의 競爭이나 生活의 紛爭分裝은 許容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見地에서 歷史的으로 形成되어 今日에 이른 地上의 모든 敎會들은 이제까지의 信仰과 敎會生活을 通하여 거두어 온 傳統과 制度와 生活樣式을 내어노고 新舊約聖書의 啓示에 비추어 淡淡한 心情과 態度로 對話하여 最大公約數側만의 것을 우선的으로 取하고 小異를 묻어두고 漸次的으로 解決짓는 方法을 取해야겠다.
人間的인 固執을 彼此 버릴수만 있다면 우리들은 이제까지의 東西敎會라는 또 新舊敎會라는 모든 腸壁은 이를 撤廢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兄弟姉妹를 定罪하는 態度를 무엇보다도 먼저 버려야 할 것이고 다음은 아무리 責하고 價値있어 보인다 할지라도 敎會制度나 生活의 傳統에 사로잡힌 意識이나 固執은 抛棄해야한다. 그리고 聖書로 歸一하고 初代敎會로 遡及하여 再出發하겠다는 意識的인 大勇斷을 가져야 한다.
萬一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中間歷史의 過程에서 歷代의 聖徒들과 敎會들이 各己自我의 立場에서 體驗한 恩惠의 事實들을 되살려 처음보다는 自信있는 敎會生活을 强力하게 推進할 수 있고 또 確實한 成果를 거둘 수도 있을 것이다.
④ 이제까지의 排他的인 態度를 變하고 로마 天主敎會 아닌 다른 敎會의 代表者들과 敎會一致問題로 對話하겠다는 意思 表明과 더불어 그동안 2·3次會合을 가졌다는 것은 確實히 바티깐 指導者들이 오늘에 敎會 안에서 活動하시는 聖靈의 從事에 加擔하고 있다는 證據로 이는 敎會歷史上에 一大劃期線을 그은 것으로 認定되어 저들에게 敬賀한다.
그러나 한가지 바랄 것은 어떠한 角度에서도 優位的인 意識이나 態度는 있어서 안될 것이고 또 一方的인 確定된 計劃을 表明하면서 同調하려면 하라는 高踏的인 態度이어서도 아니될 것이다. 이제까지의 나타난 바티깐 공의회에서 주는 印象은 로마敎 會 會議에 다른 敎會代表者들을 「옵서버」 格으로 參觀하라는式에 不過한 것을 느끼게 하고 있다.
앞으로는 보다 더 平民的인 相互友好的인 會議體制로 그 規模나, 雰圍氣를 돌려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앞으로 招請받은 다른 敎會代表들도 이 問題를 좀더 眞摯하게 硏究하고, 또 이 會議에도 臨하여야겠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如何튼 間에 하나님께서 오늘 世代와 人間歷史를 爲하여 始作하신 이 새로운 敎會運動이 今後에 敎會指導者들을 通하여 어떠한 方向으로 展開될 것이며 또 얼마나한 效果를 거둘 것인가는 두고보아야 할 줄 안다. (大韓예수회敎 長老會 總務)
■ 金大寶
敎會一致는 至上 命令
그러나 和平과 挑戰의 二面性이 있다
① 사람은 누구나 이웃과의 관계를 갖고 살아간다. 이웃과의 관계는 또한 「대화」를 통해서 깊어진다. 인격과 인격의 깊은 사귀임은 대화를 매개로 하지않고는 성립될 수는 없다. 그러기 때문에 진지하게 대화할줄 모르는 사람은 失格者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도록』(롬 5장1절) 하자는데 있었다. 이 화평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사람과의 화평을 말하고 있지만, 동시에 인간 상호간의 화평도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평안(화평)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지키라』(앰 4장4절)고 성경은 가르친 것이다.
근년에 와서 교회내에 새로운 연합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이상과 같은 성서적 근거에서 이룩되는 줄로 안다. 그러나 또한 과학문명의 발달로 인한 인간의 기계화라든지 세기말적인 윤리의 파괴에서 오는 세속주의의 강한 挑戰에 대한 그리스도 교회의 對應이 그리스도교의 연합과 통일을 불가피하게 요구하고 있다. 교회가 분열할 때마다 일어나는 부작용은 교회의 선교활동을 멈추게 하고, 교회의 기능을 마비시키고 있다. 이와같은 견지에서 보면 교회는 이제 대내적인 문제에 執念하기 보다 대외적인 전투장에 隊列을 정비하고 나서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 있어서의 교회의 일치 문제는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우리나라에 그리스도교회가 들어온지 가톨릭의 경우 200년이나 되었고 프로테스탄의 경우 80년이 되었다. 그러나 분열된 교파의 直輸入이 그리스챤의 신령한 교제와 화평의 길을 막고 異敎地帶에서의 복음전파에 적지않은 장애를 가져온 것은 말할 나위없이 명백하다. 최근에 와서 교회설립과 교인흡수 경쟁은 복음전파사업과 사회 봉사사업의 난맥상을 드러내어 세상의 지탄을 받고 있을 뿐이다. 또한 정치 경제 문화 윤리 등 온갖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교회의 관여에 있어서도 예언자적인 처지에서 통일된 강력한 의사표시를 하지 못하고 여러갈래의 상이한 소리가 나타나고 있다. 이와같은 여러 문제를 생각하면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교회 연합과 통일을 위한 진지한 연구와 대화가 필요한 것이다.
② 그러나 한국에 있어서는 교회 연합화 통일을 위한 대화를 이룩하기에는 몇가지 장애물이 있다. 그것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 교회간에 쌓여진 높은 장벽 때문에 아직까지 별로 접촉해오지 않았다는 점이요 다른 하나는 가톨릭 내에 있는 보수주의적인 自尊意識과 프로테스탄교회의 계속적인 분파작용이 그것이다. 이와같은 장벽의 철폐도, 자존의식의 拂拭이나 분파의 지양도 물론 하루 아침에 될 수는 없다. 가능한한 상호 이해를 위한 꾸준한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교회 일치를 위한 대화는 이미 진행되고 있다. 지난 1월 이후 성공회가 교량적인 역할을 해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 선교사들이 교회일치를 위한 진지한 연구와 공동대화를 계속하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청주에서도 교역자들이 함께 이 문제를 논의한 바 있고, 또한 7월 27일부터 열리는 제10차 전국가톨릭대학생 대의원대회에서 교회 재일치 문제를 연구협의하기 위하여 신교 신학자를 초청하고 있다. 그밖에 비공식적이긴 하나 성서번역에 있어서 용어의 통일을 위하여 실무자들이 접촉하고 있다는 점 등, 일련의 재일치 운동이 무슨 「붐」처럼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애무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한국에 있어서이 재일치 문제에 대한 대화는 逆說的으로 말해서 아직도 수많은 난관들이 있으므로 해서 오히려 더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③ 그러면 교회 일치에 대한 대화의 내용은 무엇일까? 첫째로 성서연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증진시키는 일이다. 교회 존재의 근거가 성서에 있으며 모든 그리스챤들이 성서에서 생활규범을 찾을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신구교 간에 성서이해에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물론 한결같이 성서를 들고 나왔으나 지금까지의 거리를 단축시키지는 못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 일치의 첩경은 성서 이해의 거리 등 단축시키기 위한 공동연구가 필요하다. 둘재로는 복음전파와 사회봉사사업에 있어서의 공동책임의식을 절감하고 공동사역의 가능성이 있는가를 연구해야 한다. 세속주의와 유물주의에의 도전은 강력한 힘의 결속이 필요하며, 기아와 빈곤에 대한 바른 해석과 그 대책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공동전선이 있어야 하겠기 때문이다. 분산된 힘은 결속된 힘을 감당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밖에 교회제도와 의식문제라든가, 각 교파이 신경, 신조의 통일문제라든가, 교황권의 無誤說, 首位權 등, 수많은 문제들이 있을 것이나 근본문제에 대한 이해와 접근이 선행되어야 한다.
④ 금년 9월에 제2차 바티깐 공의회 제3회기가 열릴 것이라고 한다.
공의회의 의제들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내용은 무엇이든간에 크게는 교회재일치를 위하여 가톨릭교회의 일대 변혁과 혁신을 가져올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져본다. 그것은 1962년 10월에 요안 23세가 개회한 이후 그를 계승한 바오로 6세도 한결같이 교회혁신을 위한 대담한 시도를 해왔다는 것으로 입증된다. 이번 공의회에서는 교회 재일치를 연구하기 위한 신 · 구교 간의 새로운 연구기관의 창설 등을 희망해오는 것도 무익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필자 크리스챤신문사 사장)
■ 張河源
敎會一致 문제 宗敎革命이다
貴紙가 마련한 敎會의 一致문제에 對한 紙上對話에 招請되어 4個項目의 물음에 있어 우선 아래와 같이 대답한다.
① 對話가 必要하냐? 勿論 必要하다.
② 對話가 可能하냐? 可能하기도 하고 또한 不可能하리라고 본다.
③ 對話의 內容은? 主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信仰告白 우에 서서 可能? 不可能?을 판가름 지어야 한다.
④ 공의회의 기대? 宗敎革命이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오늘 20世紀末葉에 이르러서 敎會의 一致를 論함은 당연한 時代의 要請이며 하나님의 命令하심으로 생각한다. 당연히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믿고 예숫를 구주로 믿는 기독敎 信者는 新舊敎를 勿論하고 當然히 一致해야 할 義務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가 神中心을 떠나서 人間中心으로 轉落되고 번거오룬 지_的인 儀式과 敎理에 편중하다가 기독교 本領을 이탈하여 分派作用으로 기울어졌다. 勿論 宗派의 分派 作用이 全部가 惡으로 단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늘이라고 하는 20世紀末葉인 時点에서 볼 때는 이제는 다시 一致의 敎會로 되돌아가야 된다고 하는 持論을 거부할 수 없다.
敎會一致論은 敎會의 안과 밖에서 同時에 要請되는 重大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敎會가 一致되지 못함은 과거에도 그러했고 오늘에도 그렇고 잘못하면 앞으로도 그러하리라고 본다. 그러하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敎會의 一致를 成就하려면 宗敎改革이 아니고 宗敎革命이 일어나야만 一致의 敎會가 이룩할 수 있다고 본다.
이 宗敎革命은 舊敎나 改革敎가 오늘의 時代에 와서는 똑같이 必要로 한다. 新舊敎會가 똑같이 對話의 必要와 敎會로서의 一致의 必要를 오늘에만 느낀바 아니고 요한 23세나 바오로 6세만이 제창한 문제는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여러 진정한 그리스도의 兄弟들은 祈願해온 바이지마는 新舊敎會의 똑같이 닫친 무리의 傳統固執과 敎權至上主義 때문에 말살되어져 버리고 만 것이다.
새삼스레 오늘의 課題와 같이 登場되어지는 것은 새싹이 움돋는 不可抗力의 勢力의 밀리움에 말라 떨어지려는 落葉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歷史의 子息들은 歷史의 흐름을 타고 歷史의 수레바퀴뢰 되돌아갈 때 그들의 信仰의 本質課題가 傳統이거나 敎權이거나 儀式第一主義가 아니고 「갈릴니」湖伴에서의 직접 저들의 信仰對象이셨던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을 發見했기 때문에 一致하려고 하고있고 一致할 수 있다고 하고 또한 이미 一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新舊敎會를 勿論하고 오늘의 時点에서 敎會一致를 論하려 할 때는 과감한 혁명이 요청된다. 왜냐?하면 이미 수명이 다해 말라떨어져버릴 傳統과 敎權과 形體만 남은 儀式主義들은 오늘의 時点으로 끝을 막고서 기독교 本質課題로 되돌아가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一致를 이루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나는 對決의 可能 여부의 물음에 있어서 不可能 혹은 可能을 저제로 한 것은 정전의 고집불통의 指導者들의 根本的인 改革이 없는 恨에는 不可能하다고 본다. 帝國主義的인 敎權을 앞세우고 고자세의 태도로 傳統을 고집하고 나오면 누가 對話의 대상을 삼겠는가? 그러므로 新舊敎의 指導者 自身들은 겸허한 섬기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되돌아가서 兄弟를 대하는 진실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오늘의 닫친 마음의 태도가 열려지지 않는 恨 對話는 不可能하다고 보고 萬一 가능하다면 이것은 정말로 오늘의 宗敎革命이다.
元來 革命이란 과거의 잘못된 惡의 뿌리를 끊고 다시 새싹이 자라 뻗어나가는 운동이다. 對話의 內容은 勿論 交會의 一致문제인데 敎會가 왜 一致해야 되느냐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안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에의 신앙에 대하 一致점과 밖에서 요청되는 문제 즉 기독교가 똑같이 오늘의 時点에서 책임을 져야만 重大 문제인데 唯物共産主義와 實存世俗主義를 어떻게 우리가 對決해야 할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萬一 對話의 內容이 數百年前 되풀이하여 온 技葉問題에다 重点을 둔다면 천당가는 治道軍 노릇이나 지옥의 온도를 재는 어리석은 敎理論爭을 벌리고 싸우다가 끝내지 못하고 말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예수를 우리의 구주로 믿는 일에 一致했다면 그것으로 끝맺고 一致했다는 具體的인 行動으로 옮겨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舊敎의 敎皇自身부터 평범한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되돌아와서 對話에서의 兄弟적 倫理를 되살려야 될 것이고 改革敎會의 派間意識의 독선을 버리고 겸허한 자세로 서로의 理解를 發見할 때에 조경과 혐동으로 나가야 될 것이다.
그러면 오늘의 韓國敎會指導者들에게 이러한 革命的인 勇氣와 信仰의 진실한 태도가 마련되어졌는가? 이것이 의문점이다.
이런 태도가 없다면 공의회가 百番 모인대도 아무 기대할 것 없고 다만 가증한 지도자들의 기만적인 악행 위의 歷史의 되풀이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新舊敎가 마련하려고 노력하는 敎會一致문제는 新舊敎가 똑같이 노력하는 時代의 요청문제인데 이 운동의 아름다운 결실을 거두는 길은 오직 오늘의 宗敎革命으로 본다. 革命에는 理由가 있다. 그러나 理由가 없다. 썩고 부패했기 때문에 革命의 理由가 있다. 그러므로 썩고 부패한 것의 革命이기 때문에 理由가 없다.
기독교 本質課題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 十字架와 復活 이외에 다른 技葉들이 너무 자랐기 때문에 기독교는 新舊敎會를 勿論하고 부패했고 그러므로 기독교의 使命을 다하지 못하고 있고 맛잃은 소금과 같이 되어서 밖에 버려져서 오늘의 歷史의 子息들에게 짓밟힘을 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감한 태도로 敎會一致 운동에 매진해야 할 것이고 新舊敎會는 마음의 門과 敎會의 門과 神學의 門을 서로 활짝 열어놓고 兄弟的 位置에서 서로 對話하여 敎會의 一致문제에 協力해야 할 것이다. 오늘의 敎會 임무는 이 문제가 우선적인 것이어야 한다. (한국기독교장로회 회장 목포 양동교회 목사)
■ 韓哲河
때, 場所, 境遇 가릴 것 없이 成就돼야할 問題
主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의 信仰의 中心으로 삼고, 그리스도 안에서 事實 한 兄弟인 우리 그리스도人들이 하나됨을 지키기 위한 運動이 옛 敎會로부터 천천히 그러나 확고한 발걸음을 가지고 믿음직한 움직임을 시작한 것은 한편 기쁘기도 하며 한편 도전을 느낀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것을 지키기 위한 敎會들 사이의 對話는 언제나 어디서나 必要한 줄 안다. 이것은 때와 場所와 境遇의 구애를 받을 必要가 없는 問題인 줄 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救援하신 것은 聖父와 聖子가 하나되신 것과 같이 우리가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기 위한 것이고, 우리는 하나 됨으로써 사랑과 和平과 희락과 義로움을 이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도 모든 그리스도의 敎會들은 對話의 길을 찾아야 할 줄 안다.
對話가 必要한가의 問題와 對話가 可能한가의 問題와 사이에는 큰 差異가 있다. 對話가 必要는 파지만 不可能한 때가 많이 있다. 어떤 때 對話가 可能하며 어떤때 不可能한가.
對話하고자 하는 兩當事者 사이에 共通點이 하나도 없을 때는 對話가 不可能하다. 또한 共通點이 있다 하더라도 마음을 닫고 立場이 다른 点을 고집할 때에는 또한 不可能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敎派들 사이에 하나가 된 것을 지키고 表現할 木積으로 對話가 進行되어본 일이 없다. 그러나 오늘날 20世紀中盤期의 世界敎會의 움직임에 영향받아 우리 韓國에도 점차로 敎派間에 聯合運動이 進行되어왔다. 그러나 이 움직임도 지금까지는 主로 新敎 世界에 局限되어왔다.
그런데 이 「에꾸메니칼」운동은 우리 韓國에서는 自由主義神學運動과 同一視되어왓다. 그 結果 이 敎派聯合運動은 우리 韓國에서는 極히 경계되어왔고, 基督敎의 正統的 信仰의 混亂을 우려하는 大敎派들이 이에 積極的으로 參與하지 못하고 오늘날까지도 韓國에 있어서의 敎會聯合運動은 監理敎會와 基督敎長老會의 獨占物로 되고 있ㄷ. 이와같이 外來品으로서의 敎會聯合運動은 우리 韓國內의 敎會들의 호응을 받아오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敎會分裂의 原因이 되어왔다. 또한 이 運動의 性格도 極히 淺薄한 水準에 머물러 있어 『하나가 된 것을 지키기 위한』 또는 『하나가 된 것을 表現하기 위한』 運動이 되지 못하고 聯合하여 事業을 하는 運動으로 理解되어 왔다.
그런데 近者에 이르러서 舊敎側에서 過去에 堅持하여 오던 消極的態度를 버리고 가장 오랜 傳統과 權威를 지니고 있는 옛 敎會다웁게 이 方面에 있어서도 先導的으로 나오게됨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우리 韓國에 있어서의 이제까지의 「에꾸메니칼」運動의 樣相을 全國으로 改編해야할 必要性을 일으킨다.
이것은 過去에 極히 制限된 範圍에서 進行되어온 이 外來品的인 그리고 神學의 自由化運動과 結付된 敎會聯合運動을 止揚하고 이제 우리 韓國敎會의 信仰으로부터 우러나오는 運動으로 改編되어야 할 줄 안다. 이와같은 운동은 돈과 함께 들어오는 外國의 組織의 우리 韓國 안에로의 침투를 意味하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우리 敎會들의 혹은 個人들의 自發的 信仰運動으로 主로 敎派間의 對話의 운동으로서 展開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對話는 오히려 「共同硏究」의 형성으로 되어야 할 줄 안다.
分裂되어 있는 敎會들 사이의 對話의 內容은 信仰과 制度, 生活과 사업
의 모든 分野에 걸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中에도 가장 重要한 것은 「信仰」이 같은 가의 問題이다. 하나님도 하나요 그리스도도 하나요 聖靈도 하나요 한 몸을 이룬 이 敎會가 같은 것을 바라고 있는가, 같은 信仰을 가지는가를 밝히는 일은 우리의 하나됨을 成就하는 基本이 될 것이다.
더우기 敎會에 있어서 「傳統」이 차지하는 意味에 대한 硏究에 있어서 더욱 진지한 努力이 기울어져야 할 것이다. 이것은 곧 「敎會가 무엇인가」하는 問題와 直結될 것이다. 筆者가 보기에는 가톨릭敎會와 改新敎會가 差異를 나타내고 있는 要点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둘째로, 禮拜儀式에 大한 共同硏究도 必要할 것이다. 禮拜儀式에 對한 硏究는 아직 未開拓 分野에 속한다 할 수 있으며 이 分野는 現在 世界神學界의 또한 各 敎會의 非常한 關心을 끌고있다. 基督敎會는 엣날부터 오늘날까지 이 部門에 있어서 큰 遺産을 물려받고 있는 것이다. 셋째로, 現代文明 및 社會에 對한 우리 基督敎會의 共同課題에 對한 「共同硏究」가 또한 必要한줄 안다. 그리고 이 모든 課題의 遂行의 基礎로서 무엇보다도 時急한 것은 「聖經의 共同飜譯」인줄 안다 이것은 基督敎에 있어서의 가장 基本的인 用語의 統一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以上에 記述한 바 「對話」 乃至 「共同硏究」는 「바티깐 공의회」에서 이를 推進할 때 더욱 큰 效果를 거둘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大韓예수敎 神學大學 敎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