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62) 백금반지 ②
발행일1964-08-16 [제435호, 4면]
그 근방은 밝지 못한 골목 어구이기는 하였으나 초저녁이라 행인의 발걸음이 잦지 않다. 진호가 나의 뺨을 치는 장면은 행인들에게 좋은 구경거리였다. 그들은 발들을 멈추고 진호와 나 사이에 장차 이러날 일을 흥미로운 관심으로 지켜보고 있다. 진호의 눈은 젖은 빛을 발사하고 있다. 그의 눈에 무엇인가 위엄과 진실이 있어보였다. 일분간의 침묵을 깨뜰고 나는 발작적으로 담벼락으로 그를 힘껏 떠다밀었다.
『제가끔 자기 할 일이 바쁜데 왜 남의 일에 참견이야?』
진호는 갑작스런 공격에 비틀거리며 벽돌담벼락에 쾅하고 부딛쳣다.
『또 한번 참견했단 봐라!』
뱉듯이 한마디를 던지고는 다방층계로 급히 올라갔다. 층계 아래는 조용했다. 그길로 진호는 발걸음을 돌린 것 같았다. 아는 아무 일도 없었던 양 태연한 태도로 한시가전과 다름없는 싹싹한 「레지」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진호에게 얻어 맞은 뺨의 아픔이 가슴속에 남아있는 듯하다.
마치 그것은 호심에 깊이 빠진 무거운 돌과 같았다.
이튿날 오전에 아버지가 홀연 다방에 나타났다. 그는 다른 다방으로 나를 끌고갔다.
이틀동안 바당을 ㅊ자느라고 수십개의 다방을 헤맸다고 하면서 기색이 매우 좋지 않았다. 체면보다는 맘이 비겁한 그는 여러사람 있는데서는 고분 고분히 말을 하였으나 가끔 은행 껍질 같이 모가 나는 그의 눈에는 나에게 대한 노여움이 숨겨져 있었다.
『너 별일 없느냐?』
의심 많은 눈으로 나의 의복과 「악세사리」 하나하나를 훑어보며 묻는다.
그가 묻는 뜻을 알았지만 시침을 떼고 반문했다.
『별일이라니요? 건강 말이야요? 한번도 병앓지 않았에요!』
『너 다방에 오는 놈팽이들과 같이 다니지?』
나지막하나마 날카로운 음성이었다.
『이년, 거짓말 말아, 내 아는 사람이 보았댄다. 한번은 백화점, 한번은 음식점에서.』
『아버지 같은 손님이 저녁 사주겠다고 해서 얻어먹은 것 뿐이야요. 백화점은 우연히 다방 손님을 거기서 만난거야요….』
『잘못하다가 버리겠다. 「레지」 그만두고 집으로 가자.』
『…………』
나는 생각했다. 다녀간의 경험으로 양부의 심리상태를 점지해 보았다.
그는 나를 야단칠 적에 갑자기 심해지는 순간이 있는데 그것은 나의 잘못을 교정하려는 것 보다 그 자신이 무슨 일이 잘 안되거나, 외부에서 모욕을 받았거나 하였을 때다.
『아버지 요새 일 잘되세요?』
『일이 잘 되면 너를 다방에 있게 내버려 두겠냐?』
『아버지 돈 좀 드릴까요?』
『웬돈이냐?』
『「마담」한테서 꾸면 돼요…』
『…………』
양부의 표정이 누그러지는 듯 하기에 기다리게 하고 다방으로 돌아왔다. 「마담」에게 돈 이천원을 꾸어달라니 두말않고 선뜻 내준다. 미스 박은 불평스런 눈으로
『…난 꾸어달라면 없다고 하더니 미스양은 잘만 꾸어주네.』
이렇게 중얼거린다.
「마담」은 전부터 돈이 아쉬우면 갖다 쓰라고 하였다. 「마담」은 그걸로서 나를 붙들어 두는 방편으로 삼는 듯했다.
이천원을 종이에 싸서 양부 앞에 놔 주었더니, 그의 눈까풀은 금시에 풀어졌다. 그만 그는 궁한 모양이었다.
『아버지 일이 잘 될 때까지는 내가 「레지」라도 해서 아버지 용돈이라도 해드릴께요!』
『…………』
그는 눈을 아래로 깔고 고개를 메뚜기 콩밭 찧듯 두어번 끄덕거린다.
돈 이천원에 순하게 누그러지는 양부의 뒷모습을 보고 나는 돈이 좋구나 하고 생각했다. 돈이 무언지 위대한 요술쟁이었다. 금시 어쩌구 저쩌구 하던 양부의 입이 몇푼의 돈에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린다.
진호가 내 가슴 복판에 던진 표도 이 순간 녹아버린듯 했다. 나는 나의 생각과 생활태도가 가장 현실적이라는 신념을 가졌다. 전에는 어쩐지 꺼림칙한데도 없지 않았으나, 진호의 충고따위는 탁 차버릴만큼, 생각이 굳어진 나를 발견했다.
나는 다시 백금 반지의 꿈을 쫓았다.
(저놈의 바가지의 주머니에서 어떻게 하면 백금반지값을 짜내나?)
그 궁리만 했다. 나에게는 이미 인생은 연극이라는 신조가 있었으므로, 그의 맘을 끌고 그의 호감의 감정선이 나에게로 쏠리도록 기술껏 하리라고 맘 먹었다. 다방에서 일을 하여 보니, 남자들이란 나이를 먹거나 젊거나 모두 자기 본위의 「에고이스트」였다. 가령 물수건 같은 것도 갑에세 주고 을에게 안갖다 주면 을은, 기분 나쁜 표정을 했다. 차도 나중에 와도 빨리 갖다 주면 좋아하고 조금 늦으면 불쾌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다방에서의 주고 받는 말을 들어도 남보다 자기가 잘난척 하기에 필요한 화제를 끄집어 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바가지 신사가 오면 먼저 온 손님을 일부러 제쳐놓고 그에게 먼저 갖다주었다. 물수건도 두번씩이나 갖다주고 딴 손님에게는 많이 탈가바 놓지 않는 설탕 그릇도 그 앞에 갖다 놓았다.
갈적에는 그의 절굿통 같은 뒷모양을 향하여
『안녕하가십시요!』
깍듯이 인사를 보고 올 적에는 재빨리 나가서 다른 손님을 제치고라도 창가의 좋은 자리를 그에게 제공해 주었다.
상당히 구두쇠인듯한 바가지 신사도 자기에게 대한 특별한 대우는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하루는 손님이 뜸한 저녁 무렵 외진 구석 자리에 앉았던 그가
『반지 아직 못해끼었군?』
하고 웃으며 뭇는다.
『죽도록 끼고는 싶은데… 지금 월급으로는 어림도 없거든!』
이렇게 대답하며 나는 약간 고개를 숙였다가 이마 너머로 그를 지긋이 바라보앗다. 말 대신 눈으로 청한 셈이다.
『사줄까?」
그는 나직히 말한다.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네에!』
나는 흠뻑 기대에 찬 표정을 했다.
그날 저녁, 바가지 신사를 따라가서 두어돈 가량 되는 백금반지를 하나 얻어 끼었다.
막상 바아던 것을 얻어끼고 보니 기끄비도 하였으나 정신적인 부담을 느낀다. 그것은 무언지 위험한 선이 내 앞으로 가로질린듯 하다. 그러나 나는 내일 일을 생각하고 싶지 않앗다.
고독한 내 인생쯤, 아무데고 흐르는 골수로 떠내려가라는 자폭적인 생각도 있었다. 아뭏든 나는 그날 유쾌했다.
이튿날 오전, 진호한테서 편지가 왔다. 어쩐지 인화물질에 불을 켜 대는 것 같이 그의 편지가 내 마음에 폭발을 줄것만 같아서 보지않고 찢어버릴까 하다가 펴 보았다. 사연은 의외로 간단했다. 일전에 자기가 빰을 친 일을 사과하며, 일간 한번 찾아갈테니종요히 예기할 기회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삼사일후 저녁에 진호가 나타났다. 이때 나는 끼고 있던 백금반지를 뽑아 벌려고 했더니 손에 물기가 있어 빠지지가 않았다.
『어때!』
나는 오히려 그에 대한 전투태세를 갖추고 그의 앞으로 갔다.
그의 시선은 내 얼굴에서, 손으로 흘렀다.
『딴 다방에서 만났으면 좋겠는데…』
진호의 말은 조용했으나 커다란 검은 눈동자 속에는 무엇인가 빛나고 있었다.
『그러세요.』
나는 그에게 근방의 한 다방을 일러주자 그는 곧 그 다방으로 먼저 갔다. 나는 일부러 삼십분쯤 지체를 하다가 가고 없기를 은근히 바라면서 약속한 다방으로 갔다.
가는 도중 한편으로는 그에게 대항할 태세를 여미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