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大(대) 宗敎社會學會(종교사회학회) 記(기)
甚했던 「푸대접」에도 出發姿勢 갖춘 學生運動
焦點, 왜 學生 自身이 無關心한가
問題解決은 本堂 中心 活動 與否
발행일1965-01-31 [제456호, 4면]
현재의 학생회 운영에 대한 발전상이나 평가척도를 이같은 여론조사를 통해 빈틈없이 살펴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허술한 통계숫자가 설명 못하는 점을 보충하는 힘을 가진 것이 여론조사의 반응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학생운동이 여하히 발전해 왔느냐 하는 문제보다 현시점에서 학생회가 처하고 있는 사회적 조건을 일부나마 측면에서 관찰함으로 문제를 제기시키고 해결점의 방향도 암시해 보고자 하는데 본 조사의 목적이 있다.
한국 가톨릭학생회가 지나치리만큼 이해와 평가를 못 받아왔고 또 자체 내의 운영 「시스템」이나 「액션」의 지표가 선명치 못하므로 여러 어려운 성장을 하여 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전국 학생연합회가 몇 교구를 제외하고는 각 교구 학생회와 연락이 되어있으며 각교(各校) 단위로 「셀」 운동도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만족할만한 발전을 위해서도 아직도 허다한 해결해야할 문제들이 남아있다. 프로테스탄 학생운동과 비교할 때 그리고 「룸비니」 불교학생 운동도 활발히 개척되어 가고 있는 현 단계에선 발전의 박차가 더욱 빨라져야 하겠다.
학생운동도 일반 가톨릭 「액션」의 일부이긴 하지만 십대의 범죄지수가 늘어나 이대 사회문제가 되고 대학생들의 종교에 대한 관심도가 저열한 현 시점에선 보다 더 새로운 목표를 지향하는 「시츄에이션」을 가져야 할 줄 믿는다.
또한 「에꾸메니칼」 운동에도 선봉에 나선 것이 오늘의 학생운동이라면 이 점에 현안의 지표가 나와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학생운동 지도문제를 종전과 같이 대안의 불로 바라보고 일부 국한된 지도신부에게만 의뢰하는 소극성에서 탈피해야 하겠다. 왜냐하면 가톨릭의 모든 「액션」은 본당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적 특수성에서… 후에 詳論한다)
■ 學生代表의 姿勢
적어도 학생대표이면 자기 행위의 목적 의식만은 뚜렷이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소수이긴 하나 「가톨릭 액션」의 현대적 사명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학생이 2명, 모르겠다는 응답이 7.2%나 나왔다는 것은 만족스런 현상이 아니다. 그러나 90% 이상이 사명감을 느낀다고 응답하고는 있다.
또 81.9%의 학생이 자기 주변의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 학생에게 「가톨릭액션」에 참가하고 있는 것이 알려져 있다하며 18%는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하였다. 반드시 자기 행위가 남에게 알려져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9%라는 학생이 사명감도 느끼지 못하면서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디인가 맹점이 있는듯하며 이로 미루어보아 18%라는 지수도 어떤 회의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을듯 하다. 학생대표들의 정신에서 이런 맹점이 발견된다면 일반 회원이나 비회원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어떠할까?
■ 學生運動 發展이 遲延된 理由
학생회가 소기의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는 가설을 두고 응답하는 학생의 비판을 살펴보자. 그 원인 중 학생들의 무관심이 47.7%로 수위이고 교회당국의 무관심이 21.6% 운영면의 결함 14.4% 지도신부의 부족 9% 조직의 빈곤 3.6%의 순위다. 우선 학생 자신들의 무관심에 큰 책임을 돌리고 있다. 그리고 학생들의 무관심에 42.8%의 원인을 돌리고 있는 집아학생에 비해 서울학생은 54.2%로 훨씬 높은 반응 빈도를 나타낸다.
그리고 학생들의 학생운동에 대한 태도가 적극적이라고 응답한 학생이 불과 15.3%로 나머지 45.9%는 소극적이다. 21.6%는 무관심하다고 응답함으로써 전술한 문제를 뒷받침해준다.
문제는 학생들이 어찌해서 자신들의 「악쇼·까똘리까」(가톨릭운동)에의 참여에 그렇게 관심이 없느냐가 아니고 어찌해서 관심이나 이해를 못 갖게 되었을까 하는 점 일게다.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싶은 문제이다. 학생회 편에서는 운영면의 결함으로 모처럼 학생운동에 참여한 학생이 만족을 얻지 못하고 탈락하며 기대를 걸지 않게되거나 학생회측의 PR이 부족한데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것도 타당하다. 그러나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학생을 계몽하고 선도하는 책임이 어느 편에 있느냐 하는 점이리라.
이와같은 문제점의 해결은 보다 근본적인 면에서부터 착수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아무리 교구에, 도시에 몇몇 전문 지도신부가 있다하여도 운동의 핵심은 학교나 본당이 되어야 하므로 지도신부가 부족한 한국의 현실에선 본당을 중심한 지도 육성이 현실적인 문제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지극히 벅찬 일이긴하나 학생지도문제가 여타 문제에 못지 않은 중대성을 띤다면 본당 신부들의 책임은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게 마련이다. 이제까지의 학생회 운영이 실패했다거나 혹은 기대할만한 활동을 못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 지도를 포기하는 일이 있다면 중대한 과오가 되겠다. 이같은 관점에서 학생운동과 본당신부와의 유대가 어느 정도 맺어지고 있는지 살펴보자.
■ 本堂神父와 學生會
58.6%의 학생만이 종교문제에 대하여 본당신부의 지도를 받는다고 응답하였다. 나머지 41.4%라는 학생은 본당신부의 지도를 받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학생회 지도급 인물이다. 이와같은 반응이 뜻하는 내용은 무엇일까? 물론 부정의 응답을 한 학생들은 학생지도 신부와의 연락관계가 긴밀히 되고 있다는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맹점의 인상은 쉽사리 가시지 않는다. 이와같은 절단된 지도관계는 학생들의 기피나 경원하는 책임으로만 돌리기엔 다음 질문 즉 본당 신부에게 학생대표로 무엇을 기대하거나 이바지할 뜻을 갖고 있느냐는 문제에 댛나 응답을 보면 석연치 못한 여운을 남긴다.
적어도 76.5%라는 학생이 이 질문에 긍정의 날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23.5%라는 학생이 이 질문에 있어서 부정의 응답을 하게 된 원인도 심상치 않은 문제를 제기해준다고 보아야 한다.
한국 학생의 발전 근간이 어디 있는지는 보다 더 깊은 고찰의 여지를 남긴다. 물론 지역적 사회환경에 따라 본당 신부와의 연락 없이도 학생회가 발전해나갈 수 있는 지역도 있다. 그러나 넉넉한 학생 전문 지도신부를 모시지 못하는 우리의 실정에서는 문제가 달라진다.
그리고 전기 본당신부의 지도 의뢰가 특수분야의 문제가 아니고 일반 종교문제, 더 넓은 의미로는 신심문제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평가가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실의 타개로 이상적 기대는 전문 지도신부의 지도에 있겠지만 본당신부들의 적극적인 협조 없이는 발전의 전도가 그리 밝지 못하다 하겠다.
■ 學生運動의 展望
여러 많은 난제를 남겨놓으면서도 학생운동은 발전하고 있다. 그 실정으로 학생운동의 참여에 있어서 점차 능동적 경향으로 활기를 띠고 있다고 희망적인 응답을 한 학생이 62.1%나 되기 때문이다. 퇴보한다고 답변한 학생은 10% 미만이었다.
발전해야 될 것이 발전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모든 것은 스스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섭리도 여건을 요구하기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제기된 문제에 대한 현명하고 성실한 준비가 요구되는 것이다.
■ 結論
학생운동의 보편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어느 편이고 다 책임이 있다. 일반적으로 인상지워주는 가톨릭 신자들의 소극적인 사도직 참여의 자세에 대한 비판이 레지오 마리에나 JOC 등의 발전으로 고식적인 평가를 떨어버리게 했다는 것은 학생운동의 발전에 대한 가능성도 여실히 증명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 예로서 지난번 부신 학생대회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참다운 반성과 지도층의 끈기 있는 계몽, 젊은 학도들이 새로운 매력을 끌 수 있는 참신한 목표의 제시, 젊은 이들의 현실적 「딜렘마」를 같이 다루고 해결도 해 주는 성실한 「무드」를 자체 안에 준비함으로 일부 정력과잉 분자들의 정력발산 기구라는 고약한 인상을 씻어주는데 있다. 결코 학생들의 무관심이나 소극성을 타샣서는 아니된다. 그리고 흔히 「가톨릭액션」의 공통점이긴 하나 학생회도 상부조직은 강하나 하부조직이 극히 약하다. 「셀」 운동의 시급성이 여기서 요구될 것이다. 이런 점은 JOC 등의 조직과 훈련을 본받아야 마땅할 줄 믿는다.
다음은 학교나 본당을 중심으로 움직일 핵심운동체를 여하히 운영해 나가야하느냐 하는 점이다. 흔히 지도신부가 있는 도시에서는 이와같은 말단 조직운동은 양편의(본당신부와 그리고 지도신부측의) 소홀한 대접을 받아왔던 것이 사실이다. 분주한 본당에선 흔히 특정 지도신부에게 미루기 쉬운 일이며 소수의 지도신부는 본부나 특수학교의 지도 외에 시간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다. 본당과 학교의 조직은 이중적인 조직상 혼란을 가져올 염려가 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학교단위의 조직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 학교에 지도신부 일명은 배치해야 되는 난점이 있다. 이를 실현시킬 수 없는 한국의 입장은 조직의 일원화와 본당신부의 협조인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적 현실은 본당을 중심한 가톨릭운동의 참여가 보다 더 실제적인 여건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당과 학생 지도신부의 협조는 학생운동 발전의 「키·포인트」가 된다. 이 점이 한국 학생운동의 발전을 지연시킨 원인도 되었으며 또 발전시킬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는 점인 것이다.
학생들의 응답 내용의 촛점은 바로 이 점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만약에 이 협조에 불협화음이 일어난다면 반세기 후로의 퇴보도 오히려 당연한 일일게다.
예전, 복음 「매스·콤」 및 사회문제에 대한 비판은 본 학회가 실시한 평신자 생활실태 조사의 내용과 중복되므로 그 때 동시에 발표하기로 하겠다. (끝)
(文責任 李鉉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