對話(대화) 必要(필요)하다 (4)
발행일1964-09-06 [제437호, 4면]
■ 李桓信
對話 두말할 것 없이 必要하다
세상에 말못할 사정을 갖고있는 사람이 제일 가엾어 보인다. 그보다도 말못할 사정을 서로 이야기 할 수 있을 만한 대화자가 없다는 사실이 더욱 안타깝게 생각된다. 천주교도나 개신교도 사이에는 말못할 사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만 피차가 한 하나님의 자녀인 동시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은혜로서의 형제 자매임을 시인만 하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공적으로 담이 막혀왔던 사실은 슬픈 일이요 또 부끄러운 일이며 죄스러운 일이라 생각한다.
양교간에 대화운운하는 문제가 대두된 것만 하더라도 내외 모든 사정이 우리로 하여금 형제의 분위기를 다시 회복하도록 재촉하는 피할 수 없는 좋은 기틀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형제의 의가 단절되어 일종의 낙원을 상실한 가장 비참한 처지에서 우선 흉금을 터놓고 서로 서로이 이야기를 주고 받아 상실되었던 형제의 낙원을 다시 회복하기 바란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한국에서 천주교도와 개신교도간에 대화가 성립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재삼 숙고를 요하는 것이다.
국토가 양단되고 군소 정당이 난립하고 같은 교파에서도 풍파가 심하여지고 따라서 전체적인 견해에서 매사를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느니 보다는 개별적인 이애관계를 내세우는 경향뿐 아니라 사실적인 결과가 여러 방면에서 빚어지기 때문에 연합이나 일치에 대하여서는 심한 변론에 빠지는 지도자 내지 일반인이 많다고 본다. 결코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 그것은 우리의 자연적 또는 사회적 여건의 필연적 산물이라고 단정을 내릴 수도 없고 전연 부인할 수도 없다. 한국사람들은 관습적으로 자기외에 다른 사람이나 또는 다른 단체와 함해서 지낼 수 없는 특이한 민족이라고 결정을 내릴 수도 없고 또 아니라고 부인할 수도 없다. 다만 신앙적인 견지에서 어떠한 환경적 여건이든지 또는 개인적 조건이든지 하나님의 크신 뜻에 우리를 복종시키는 유일한 조건으로 이 모든 분리한 여건과 조건을 넉넉히 추월할 수 있다고 본 바, 얼핏 생각하면 불가능하게 보이는 우리 두 교파 간에 대화문제도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겟세마네」동산에서 최후의 결정을 지으시던 순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하시던 살아계신 주님이 울이ㅘ 같이 하시던 그의 태도로 성령의 움직임에 그대로 순종하면 가능 불가능이란 문제가 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텍사스」주 「에모렐로」 제일감리교회 목사관에서 지난 6월에 오찬회가 열렸는데 그 지역 천주교회 감독 한 분이 참예하였었다가 식탁에서도 환담을 하고 또 그 주인 목사말에 의하면 목사 자신이 그 가독의 초대에 가끔 나가서 서로 서로의 형제적 우애가 자못 두터운 사이란 것을 들었다.
지도자나 평신도 간에 인간적으로 서로 교류가 진번하여지는 것이 공적으로 일으키는 일치운동에 좋은 첩경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사적인 대화운동과 아울러서 공의회와 같은 공적인 기관에서 일치점을 모색하여 가능한 것부터 우선 시작해 가면서 피차에 은인자중한 태도로 늘 광명한 앞날을 바라보고 성경의 지도를 따라 조급하지 말고 또는 낙심하지 말고 힘써 나가노라면 주게서 허락하신 좋은 결과를 맺으리라고 생각한다. (기독교 대한감리회 감독 · 박사)
■ 洪東根
적은 偏見 誤解克服하고 數多한 共通點 찾자
① 對話의 必要는 勿論이다. 다만 가톨릭敎會와 非가톨릭敎會와의 對話를 위한 신중하고도 과감한 具體的 行動의 決斷이 문제인 줄로 안다.
애냐하면 우리의 分裂과 對立은 누구도 원치 아니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본래는 레오 10세의 破門狀도 改革者 루터의 過激도 이처럼 기나긴 公敎會의 分裂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확실히 그리스도人 世界共同體의 分裂과 反目은 敎會自體의 道德的誤謬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人類全體의 큰 不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大戰後 敎會의 革命的 胎動이라할 WCC(世界基督敎協議會) 運動과 第2 「바티깐」 公議會의 召集은 現代敎會史의 큰 革命이라고 할 것이다.
4백년의 긴 沈默을 깨뜨리고 지금 우리는 兄弟의 對話에로 人類의 注視 가운에 발을 내어놓았다.
어째서 우리 韓國만이 이 巨大한 敎會史의 흐름에서 疎外돼야 할 것인가? 그 理由가 없다. 하물며 敎會의 一致가 우리 主 예수 그리스도의 祈禱이며 民族의 所願일진대 그 要請은 더욱 切實하다고 하겠다. 다만 이 큰 歷史的 前進에 後退가 있어서는 안되겠다.
②對話의 可能性을 위해서는 몇가지 先決條件이 서로 整理되어야 한다고 본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의 反目과 定罪의 태도에서부터 진정한 兄弟愛와 理解에로 마음의 姿勢를 시정하는 것이 重要하다.
이번 「바티깐」 公議會를 계기로 하여 소위 「裂敎人)이라는 定罪標를 「갈라져 있는 형제들」이라는 親善의 호칭으로 바꾸어 놓은 것은 그 좋은 實例라 할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의 한 형제, 한 가족이면서도 지난 4世紀간을 異敎徒처럼 서로 반목질시하는 가운데서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은 그 어느때보다도 그리스로 단의 하나인 형제의 사랑과 이웃사랑하기를 네몸같이 하라는 계명의 실천에 가장 성숙한 時代에 도달했다. 이 형제애와 理解가 없이 對話는 전혀 不可能하다.
다음으로는 相互간의 內的改革이다. 한스 큉 神父의 主張처럼 敎會는 영원한 혁신의 必要 아래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 가톨릭 敎會와 非가톨릭敎會의 差別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敎會의 革新을 허락하지 않는 絶對主義가 왕왕히 對話의 門을 가로막는 것은 現代의 우상으로서 打碎되어야만 한다.
敎會史는 끊임없는 革新의 歷史다. 우리사이에는 아직 改革의 餘地를 인정하는 수다한 人間的 요소들이 敎理와 制度 其他에서 진정한 對話의 거침돌이 되어있다.
이러한 거침돌의 整理를 인정함으로써만 對話는 可能하다.
세째로 實際的인 對話의 行動이 있어야 한다. 本來 韓國에서는 소위, 新舊敎會 간의 論爭과 迫害가 없었다.ㄱ ㅡ러므로 對話의 行動에 西歐敎會에서와 같은 큰 因難은 없다고 본다.
이 對話의 行動으로써 로버트 막카비 牧師와 구스타브 와이겔 神父 사이의 所謂 『美國의 對話』(AMERICAN DIALOGUE 1961)式의 韓國의 對話가 있을 수 있으며 그것은 좋은 出發이 될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이러한 率直한 對話를 통해서 상호간의 적은 偏見과 誤解를 극복하고 절대 多數의 共通点들을 갈견하는 참 對話에 이를 것이다.
이같이 서로를 바로 아는 것만이 對話를 可能케 한다. 이러한 行動은 「매스콤」이나 또는 出版 · 集會 · 硏究 등의 公同적이면서 교환적인 行動으로써 可能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 對話의 行動은 막연하지 않고 아주 계획적일수록 더욱 效果的이라고 생각한다.
③對話의 內容은 이중에 가장 基本的이면서 重要한 문제로 본다. 왜냐하면 分裂의 原因도 再一致의 可能性도 여기에 起因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對話內容에 있어서 비록 책임있고 長久한 것이기는 하나 나로서 아래의 몇가지 對話內容을 暗示하고자 한다.
첫째로 聖書硏究의 强調다. 이미 歐美敎會에 있어서 이 聖書硏究는 敎會對話의 唯一한 資源(SOURCE)이 되어있다.
특별히 聖書를 唯一한 敎會의 權威로 인정하는 「프로테스탄티즘」과의 對話에서 이것은 가톨릭敎會에게 요청하는 가장 기본적인 內容이다. 실제로 최근에 있어서의 가톨릭敎會의 聖書의 再發見은 現代敎會의 對話에 큰 發展을 가져왔다.
그 한 例로서 로날드 녹스 번역 盛暑(가톨릭번역성서) 같은 새 성서는 이미 歐美에서 新舊兩敎會의 환영을 받고있다. 이러한 聖書硏究의 强調는 敎理와 敎會法에 더 많이 置重해온 가톨릭敎會의 프로테스탄 理解에는 크게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聖書註釋과 聖書 번역의 共同硏究는 오늘 韓國과 같은 異敎國의 效果에 있어서도 그 의미가 클 것으로 믿는다.
우리는 聖書에서 하나님의 音聲을 듣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난다. 그러므로 聖書 外에 더 기본적인 對話의 內容은 없다고 본다.
둘째로 宗敎改革에 대한 再理解이다. 한때 가톨릭 兄弟들은 宗敎改革을 단순히 루터의 非道와 改革者들의 惡意의 反亂으로서 定罪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時代는 지나갓다. 죠지 타바드(GEORGE TAVARD) 神父의 저서 『「프로테스탄티즘」』(1959)은 가톨릭의 宗敎改革에 대한 새 理解와 동시에 改革者들의 純粹한 動機에 대한 진실한 同情을 서술하고 있다.
이같이 辯證이나 옛 論爭을 目的하지 않는 순수한 의미의 理解와 對話를 위한 宗敎改革의 再理解가 双方에 필요하다.
셋째로 權威와 두가지 難敎理의 問題가 對話의 가장 어려운 골목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이야말로 참 再一致의 열쇠로서 決定的인 對話의 要素들이다. 프로테스탄은 權威를 神의 말씀에 둘 때에 가톨릭 兄弟들은 敎會에 둔다. 前者에 있어서 敎會는 『보화를 질그릇에』가지고 있는 까닭에 改革돼야 하며 그것도 항시 改革돼야만 한다.
그러나 後者에게 있어서 敎會안의 改革은 可能하나 敎會自體의 改革은 있을 수 없다. 이 距難를 무엇으로 메울 수 있을 것인가?
또한 가톨릭敎會의 代表的인 두 敎理 『敎皇의 無謬權』과 「마리아 崇拜』는 가장 진지한 對話의 內容으로서 決코 피할 수가 없다.
실제로 프로테스탄에게 있어서 이 두 敎理는 마지막 對話의 고개가 될 것이다.
敎皇의 無謬權은 우리에게 人間의 絶對化 같은 印象을 줄 때에 마리아의 無후解胎와 蒙召昇天으로 인한 崇拜는 福音書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聖寵에 대한 우리의 全的信仰을 흐리게 하는 不安을 준다. 이러한 難題는 오직 神學的 對話로서만 해결에 접근할 수 있다. 우리는 이 敎理들에 대한 가톨릭 兄弟들의 信仰을 분명히 알고 싶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지금까지의 辯證과 啓宗을 目的으로 했던 神學보다는 現代敎會의 相互이해와 對話를 위한 새로운 「에큐메니칼」神學 같은 것이 期待된다.
④ 끝으로 「바티깐」 公議會에 대한 期待에 있어서 우리는 率直히 두가지 感情을 느낀다. 즉 처음의 希望과 오늘의 不安感이다 무엇보다도 世界敎會의 對話에 行動으로 나선 그 용단에 대하여서 지금가지의 排他的이며 獨善的(?)이엇던 가톨릭敎會의 一大革新으로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期待였던 『宗敎的 自由』에 대하여서는 第3會期를 앞둔 오늘까지 아무런 發表를 듣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가톨릭國家들에서 조속히 非가톨릭敎會들의 완전한 自由가 인정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우리의 가장 큰 期待이며 對話의 基本內容인 難敎理들에 대한 과감한 討論과 修正이 있기를 바란다. 이러한 對話의 바탕이 마련됨으로써 大가톨릭敎會는 分裂된 人類와 범람하는 無神論共産主義와 世俗主義哲學 앞에서 世界그리스도人共同體의 그리스도 안에 하나되는 힘과 希望을 증거할 수 있을 것이다. 삼가 「트렌트」公議會(1545-1565)의 失望을 되풀이 하지 않기를 마음으로부터 期待한다. 그러기 위하여서 나는 個人的으로 公議會內의 소위 進步的勢力의 決意와 獻身에 하나님의 特別하신 도우심이 같이 하시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필자=서울 英樂敎會 牧師)
■ 池元溶
基督敎一致의 共通基盤
이 원고는 집필자 지 목사님이 금년 1월 25일 성공회 주최 「대화」 강연회서 강연한 원고이다 지목사님은 이 원고를 다시 본지초청 「대화」난에 실어주길 희망했다.
인간은 모두 상호 교제와 대화 관계에 있으며 이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동시에 오늘날 우리의 생활과 사상계는 점점 개개인을 주시하는 반면에 「나와 너」 사이에서 이루어 지는 상호 관계와 협조면에 관심을 가지고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은 일이 있다. 『인간은 다른 동료 인가과의 대화관계에 있어서 참 인간이 될 수 있다. 진지한 대화가 없는데서 인격이 위축되고 쇠퇴된다. 그리고 독자적 인간은 인간 실격자이다.』
이와같은 인간의 사회성과 친교적 교제는 오늘날 기독교 내에서 되어가는 이른다 연합운동과도 대조가 되지 않을가 생각된다.
같이 믿고, 같이 생각하고, 같이 예배드리고, 같이 전진하는 일을 크리스챤의 임무로 생각하는 것이 크리스챤들의 관삼사일 것이다. 그리고 근년에 여러 국가간에서 활발히 움직이고 있는 국제연합기구인 UN의 활동이라든지, 또는 교회내에서의 연합운동과 개개 교파내에서의 동일운동 등을 관찰할 수 있다.
기독교연합운동에 있어서 그것이 신학적으로 보수적이건 진보적이건 믿는 자들이 같이 힘을 합하여 크리스챤의 공통과제를 수행해야 한다는데에 있어서는 동일한 뜻을 가지고 있는 줄 안다.
템풀 대주교가 20여년전에 말한 것이 생각된다. 『만일 우리가 통일성을 이미 소유하고 있지 않다고 하면 우리는 연합하려고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어떤 공통된 것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의 격리 상태를 개탄하지도 않는 것이다.』
우리가 연합을 말하게 될 때 자연적으로 느끼게 될 때 자연적으로 느끼게 되는 사실은 우리 사이에 놓은 어떤 거리감이다. 사실 현실적으로 존재한 어떤 「거리」를 두고 두 진영 혹은 여러 진영이 서로 만날 수 있는 걸 곧 쌍방 사이에 공통기반 혹은 같이 설 수 있고 같이 출발할 수 있는 공통 시발점 그리고 서로 만날 수 있는 시점이 무엇인가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두가지 면에서 이 공통 기반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서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성서의 진지한 탐구, 이 두 가지라고 본다.
□ 그리스도에게 충성
그리스도교일치에 관한 견해는 어떤 사회학적인 성질의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그와 뗄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행9‥4이하 고전12‥2 요15‥-2). 예수님께서 유일하신 구세주로서 많은 사람들을 친히 불러 모으사 한 교회의 지체로 만드시고 사귐을 가질 수 있도록 하셨다. (에11‥10, 22, 고12‥12, 고전6‥16이하).
구세주와 인류이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전인격과 업적 가운데서 교회의 통일을 찾을 수 있다.그러므로 진실한 연합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는 연합이라고 보겠다. (엡 2‥11이하) 모든 분야에 있어서의 진실한 「유니티」=일치의 반향이 역시 요한복음 17장 18-23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도 가운데도 나타나 있다.
그리스도께서 그가 친히 받으신 고통과 죽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을 분리시키고 (이사야 59‥2) 인간과 인간 사이를 분리시키는(엘2‥14) 이른바 죄를 말살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속죄사업은 우리를 하나님과 합하며, 동료 인간과 화복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뜻과 사랑의 완전한 조화이며,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성령과 하나가 되시는 것과 같다고 보겠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루어진 사죄의 은총을 신앙으로 받을 때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며,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주와 머리가 되신다. 또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합한 모든 사람과 우리가 역시 하나가 될 수 있다. 한몸의 지체로서 하나가 된 우리는 유일한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으며 그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엘 4‥4-6)
교회의 통일문제는 보통 말하는 인간사이의 통일과는 근본적으로 다른다. 어디까지나 신앙의 문제이며, 한 분이신 선한 목자에 대한 우리의 신앙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통일성과 보편성은 어떤 복종 관념에서가 아니라 신앙안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라고 보겠다. 독자가 그의 양들을 부르시며 한 무리가 되게 하는 것 같은 방법으로 우리에게도 임하신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엡 4‥4-5). 이 말씀은 개신교나 가톨릭교 성서에 다같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가 한분이시기 때문에 교회도 하나이다. 교회의 통일에 대한 궁극적인 기반은 인간이 행한 것이나 인간이 스스로 행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위하여 행하신 일이라는 점을 한결같이 인정한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라고 이구동성으로 주장하며 그리스도는 『우리의 왕이시고 주님』이시라고도 말한다. 이와같은 견해와 외침의 배후에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회의 통일이라는 것은 하나의 「슬로간」만은 아니라는 점을 제시하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동의점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낙관할 것은 못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행하신 일이 무엇이냐에 대한 각기 다른 많은 논의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연구과제가 있다고 하겠다.
□ 성서 연구
그리스도 안에서 가질 수 있는 그리스챤의 연합은 성서의 진지한 연구에서부터 실천화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테스탄과 가톨릭 사이의 논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반의 하나가 바로 성서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과거 신구교의 논쟁에 있어서의 성서의 역할은 오늘날 통일을 이룰만한 매우 중요한 것으로서 충분한 역할을 아직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성서를 다같이 들고 나올지는 모르지만 그 성서 이해에 있어서의 의견에 현저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점에 관련된 연구 과제로서 성서 연구와 아울러 역시 성서해석학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성서의 증언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프로테스탄과 가톨릭교도들이 서로 상대방에게 증거하는 방법이나 내용에 있어서 달리 할 수 있는 어떤 엯사적 교리적 신학적인 근거가 있을 것이라는 점까지를 이해할 수 있는 아량과 이해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근간에 가톨릭과 프로테스탄을 모두 포함한 세계 기독교계에서 공통적으로 성서 신학, 성서 해석학, 성서 번역 등에 관심을 가지며 성서 연구에 깊은 관심과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는 점은 한 하나님과 한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세계 기독교신자들의 「연합」을 위한 실제적이며 현실적인 노력이고 접근을 위한 희소식이라고 볼 수 있다.
조직화된 교회의 통합, 교리의 일치, 그밖에 구체적인 여러가지 분야의 연합과 일치를 논하고 실현하려고 힘쓰는데 앞서 연합의 근본 체제가 되며 공통 기반이 되는 성서에 대한 진지한 태도와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요리상 혹은 교의학적인 면의 통합과 일치에 앞서 성서신학 부문의 꾸준한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다. 성서가 진지하게 취급될 때 신학의 모든 분야에 걸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고 거기서부터 어떤 결정적인 경향을 얻게될 것이다. 신앙과 교회에 관한 우리의 이해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일반 크리스챤들과 신학자들 마음 가운데 일어날 수 있는 변화와 혁신이라고 볼 수 있는 신앙의 행동도 역시 성서연구에 그 근거를 두었다고 보겠다.
이상은 극히 원리적인 면을 한두가지 정도 언급한데 불과하다. 더욱더 세밀하고 구체적인 면들을 깊이 그리고 지지하게 취급하여야 할 것이다. 좋은 뜻 밑에 있게된 이번 이 「대화」를 계기로 하여 한국내에 있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의 많은 선배신학자들 사이에서 진지한 대화가 있게되어 크리스챤들에게 공통으로 맡겨진 시대적 사명완수와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는데 크게 이바지하게 되기를 바란다. (필자=루터敎 牧師)
(編輯者 註) 이상으로 프로테스탄 指導者 招請 紙上對話를 마칩니다. 「가톨릭시보」는 지금까진의 프로테스탄 指導者 「對話」에 答하는 가톨릭 側 「對話」를 다음 1回 揭載할 豫定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