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84) 虛實(허실) ⑦
발행일1965-02-14 [제458호, 4면]
그날 밤 나는, 갑자기 진호가 보고싶어, 저녁 밥숟갈을 놓자 설거지도 않고 구두닦이 하던 옷도 갈아입지 않은채 집을 나섰다.
『어디 가니?』
양부는 묻는다.
『구두약 사러가요』
『……』
양부는 아무 말도 못했다.
가는 도중에서, 내 꼴이 좀 추해 보였으나 「어때…」하는 기분으로 김새는 휘파람을 불며 언덕길을 내렸다.
진호네 집에 가니 마침 어딜 나가고 없어서 슬슬 골목에서 한길로 나오자 그와 마주쳤다.
진호는 처음에 난줄 모르고 그냥 지나치려고 하였다.
『아저씨, 구두 안 닦으세요?』하고 농담삼아 소리치자, 그가 돌아다보았다.
그는 내 모양을 아래위 훑어보며 싱긋이 웃었다.
『「미스」양 그리구 어디로 가는거야?』
『진호씨네 집에 갔더랬어요?』
『우리 집에?…』
진호의 얼굴은 반가운 빛이 돌았다.
『갑시다…』
그는 내 등허리에 정답게 손을 댔다.
『그러지 않아도 내가 지금 「미스」양네 집에 찾아가려던 참이었어! 아버지가 나를 꺼려하시는 기색이기에 망서렸어…』
『요새는 우리 아버지 기가 죽었어요. 내가 구두닦이 해서 번 돈으로 사니깐…』
나는 웃었다.
『「미스」양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전보다 퍽 명랑한 것 같애…』
『명동에서 구두닦이 하면서 인생 공부를 많이 했어요.』
『지금도 구두닦이를 계속하고 있어?』
『그러믄요. 내 꼴 보시면 알 거 아니야요.』
『하루 이틀 해 보다가는 그만 둘 줄 알았는데?… 「미스」양은 괴짜야!.』
진호는 신기한듯이 내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진호네 집 근처 구멍가게에서 과일을 오십원어치 사서 진호에게 안겨 주었다.
『애써 번 돈으로 이런거 안 사면 어때?』
진호는 상을 찡그렸다.
『나 돈 잘 벌어요.…』
집에 들어가서 밝은 불빛에 구두약 기름이 까마작하니 절은 내 손을 본 진호는
『모를 일이야?.』하고 혼자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모를 일이라니요?』
『「미스」양은 누구보다도 사치를 좋아하던 여자가 아니야?.』
『지금도 좋은 옷 입고 싶고 맛있는 음식 먹구 싶지요.』
『집에 와서도 왜 그 옷을 그대로 입고 있어?.』
『이 꼴 싫으세요?』
『「미스」양에게는, 하나의 혁명이야!』
『이런 꼴을 하고 나온 것은 혁명이 아니라 심술이야요.』
『심술?』
『좋은 옷 입을 수 없는 심술로 이왕이면 아뭏게나 하고 다니는거야요. 호호호….』
나는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웃었다.
『그러나, 「미스」양 걱정 말어. 구두닦이는 내가 해방시켜주지. 과외선생 자리가 하나 생겼어!. 부잣집 딸이야!. 중학 일학년인데, 영, 수 가르치면 돼! 모래, 저녁 일곱시부터 할 수 있겠지?』
『그것땜에 우리 집에 올려고 하셨군? 그런 일 없이 올 수는 없어요? 나는 아무 일 없이도 찾아왔는데….』
『……………』
진호는 내 시선이 부신듯이 눈을 아래로 깔았다.
『가고 싶은 마음은 태산 같은데….』
진호는 엷은 웃음을 한참 입가에 담았다.
『이제 구두닦이는 그만 둬요.』
『싫어요. 낮에는 구두닦이 그대로 할테야요.』
『혹시 그 집에서 안다면 좀 꺼려할거야…』
『잘 가르치나 못 가르치나가 문제지, 내가 구두닦이 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야요.』
『…하여튼, 구두닦이 한단 말은 하지 말어.』
이튿날 저녁 나는 옷을 갈아입고 손도 깨끗이 씻고 진호를 따라 과외공부 가르칠 집을 찾아 갔다.
내가 사는 산동리 움막같으면 수십채가 들어갈만한 정원이 있고, 집 지키는 「포인타」와 「세파트」가 세 마리 눈알을 번득이고 있는 큰 저택이었다.
집에 비하여 식구는 부모와 아들 딸 남매, 단출한 네식구였다.
아들은 대학을 갓 졸업하고 그의 아버지 회사의 전무노릇을 한다는데, 스물 너덧살 되는 귀공자같이 얼굴이 하얀 청년이었다.
식구들에게 첫 인사를 나누고 차를 마실 때, 아들의 시선이 나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다. 『내 이름은 승우입니다.』 그는 이렇게 거듭 자기 소개를 하면서 바라다 주겠다고 우리를 따라나왔다.
『오빠되는 남자, 나한테 지나친 친절을 베푸는데요?』
헤어져서 진호와 둘이 오면서 진호의 기색을 엿보기 위해서 나는 우정 이렇게 말해보았다.
『「미스」양의 얼굴은 아름다우니까, 대개의 남성의 시선을 끌 수 있지.』
진호는 조금 우울한 기색이었다.
산동리까지 나를 바라다주고 돌아서는 진호의 모습은 좀 쓸쓸해보였다.
쫓아가서 『난 진호씨가 제일 좋아.』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만 두었다. 그것은 나의 진심이었다. 요즘 나는 진호가 내 마음 깊이 안겨지는 것을 느꼈다.
밑바닥 인생, 구두닦이로 몸을 던진 뒤부터 나의 마음은 진호에게로 다가갔다. 모든 것을 이해하고 내 모양 그대로를 받아줄것만 같았다.
그에 비하면 승우라는 청년은 먼거리에 있는 존재였다.
한 때, 양키들과 교재하고, 다방의 「레지」가 되고, 또 「미스터」강이라는 가짜사장의 자가용에 눈이 팔리어 따라다니던 나다. 「비어홀」에서 술도 따랐고, 지금은 명동에서 구두닦이!
나는 스스로 내 경로를 돌아다보았다. 이 모든 것을 그가 안다면 질색하고 달아날 것만 같았다.
과외 공부를 가르친지 한 열흘되던 날이었다. 승우는 바래다 준다면서 나를 따라 움막까지 왔다.
『저 돼지우리 같은게 우리 집이야요. 그나마 전체가 아니고, 그 이분지 일은 세들어 살고 있어요.』
나는 거리낌 없이 말했다.
『난 「미스」양을 행복되게 해주고 싶어!. 양친도 거의 승락하고 계셔』
그는 나직히 말한다.
『나는 낮에 구두닦이를 해요.』
『누가요?』
『제가요.』
『설마?』
『명동 XX양장점 앞으로 와 보세요. 거짓말인가?』
나는 어쩐지 그의 앞에서 내 먼지를 탁탁 털어보이고 싶어졌었다.
『나는 진실을 애기하는데 왜, 그런 농담을…』
그는 나를 꾸짖었다.
『농담인가 사실인가 와 보세요.』
나는 웃으며 움막으로 들어가버렸다.
이튿날 저녁무렵 돌아가려 구두닦이 목판을 챙기려고 할 때 승우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이상한 거나 보듯이 나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