平信徒(평신도) 눈에 비친 美國(미국) 겉 핥기錄(록) - 美國(미국) 가톨릭 안팎 (27) 한국유학생
계산과 실제가 다른 「유학」길
지친 고학생활 「내일」이 위로
발행일1964-09-13 [제438호, 3면]
「뉴욕」의 아침은 청소차의 「모타」 소리로 시작된다.
상자곽 모양으로 생긴 추럭. 냄새도 풍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뒷꽁무니만 문이 열린 철판 상자 같은 차다. 각 집에서 제집문 앞에 내가 놓은 「알미늄」제의 쓰레기통을 청소부들이 이 쓰레기차 뒷잔등에다 퍼넣는다.
그 철판문안에는 커다란 톱니바뀌가 빙글 빙글 돌고 있다. 이 톱니바퀴의 갈퀴가 들어오는 갖기지 쓰레기를 잘게 썰어 안쪽으로 치켜올리고 차곡차곡 쌓놓게 되어있다. 대부분의 쓰레기는 신문지 포장지 등이며 구멍탄 재 같은 것은 물론 없다.
새벽 5시경서부터 청소차의 「모타」소리로 「뉴욕」시가는 요란하다.
처음엔 이 청소차 소리가 새벽 잠자리 속까지 스며들어와 번번히 아침잠을 설쳐놓군 했었다.
나중엔 만성이 되어 아무리 「웽웽」 소리가 들려와도 아침잠을 계속해서 잘 수 있을 정도로 「뉴욕」 소음에 익숙해졌다.
전화의 「벨」이 요란하게 귀밑에서 울고 있었다. 아침 잠에서 깨났다.
『네, 접니다. 네? 한국에서 갖 온 분과 오시겠어요? 네! 그럼 기다리겠읍니다.』
「마운트 버나」(뉴욕 교외)에 계신 김 갸롤로 신부님이었다.
두어시간 지나서 한국에서 오늘 새벽에 「뉴욕」에 도착했다는 「미스터」 손이란 분과 함께 김신부님이 오셨다.
첫눈에도 그의 성실성을 캐낼 수 있었고 미국에서 유학하려는 「프로그람」 속에서도 그의 진지한 태도가 엿보이는 청년이었다.
그는 수중에 20불밖에 돈이 없다고 했다.
김신부님은 친동생처럼 돌봐주고 싶은 청년이라고 했다.
내방에서 이 「미스터」손은 한방을 쓰면서 며칠동안 미국의 유학생활을 진단하고 있었다.
『먼저 돈을 벌어야겟어요. 그리고 난뒤 공부를 할 셈입니다.』
그의 결의는 대단했다.
한국에 있으면서 미국을 그리던 때와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 유학생들 대부분의 생각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어쨌든 미국땅에만 떨어지면 어떻게 되겠지!』 이렇게 『어떻게 되겠지』하는 막연한 꿈을 걸어보는 데서 계산 착오가 생기기가 쉽다.
『다른 사람도 사는데 난들 고학 하면서 못사랴』 『아무개는 고학 끝에 공학박사가 돼가지고 취직을 해서 첫 월급을 8백 「달라」나(우리돈으로 20만4천원) 받았데!』 화려한 결과만 갖고 미국의 유학생지원을 하는 이가 있다.
막연한 계획만 갖고 미국에 오면 미국땅에 발을 디디기 시작하는 날서부터 고생은 각오해야 한다.
하기야 일만 하면 먹고 살 수 있는 나라이긴 하지만 본시 여행자나 유학생에겐 취직 할 수 있게 되어 있질 않다.
「미스터」 손은 김신부님의 주선으로 병원에 나가 일을 보게 되었다.
밤에는 몇번씩이나 불자동차의 「사이렌」 소릴 듣게되고 아침에는 청소자동차의 「모타」 소리에 신경쇠약이 될 지경으로 잠을 못이룬다고 하던 「미스터」 손은 아무리 요란한 불자동차 소리가 나도 고단한 잠을 자게되었다.
새벽 4시에는 일어나 청소차 소리가 나기 전에 출근을 하겠금 됐기 때문이다.
이웃 「아파트」에 있는 박선생도 한국에서는 모대학의 영어강사였었다.
그도 「타이피스트」로 취직이 되어 밤11시에 출근해서 아침에 퇴근했다. 낮에는 학교에 다니고, 수면부족이 돼 그런지 얼굴조차 싯누렇다.
「뉴욕」대학에 교육행정을 공부하고 있는 옆방의 김씨는 음식점에 가서 접시닦기를 하고있다.
시간이 꽉째인 생활들을 하고 있다. 이같은 생활이 고학하는 성실한 유학생들의 생활실태였다.
그래도 8시간 노동제가 철저하고(어떤 학생은 「파트타임」이라해서 틈틈이 시간제로 일을하는 이도 있지만) 한국서 보다는 고기를 잘 먹고(미국사람에 비해선 평편없이 낮은 「메뉴」지만) 마음걱정이 비교적 없으니 이 역경을 견디어 낼 수 있다.
지방에 흩어져 있는 유학생도 여름이면 직장을 구하느라고 「뉴욕」에로 몰려든다.
돈을 벌어가며 공부를 한다는게 얼마나 힘드는지는 아는 이만이 아는 일이다. 주말에는 내방에 여러명의 유학생들이 몰려들었다.
맥주를 마시면서 한주일 동안의 고된 피곤을 웃음으로 날리고 조국의 앞날들을 걱정하는 그들이었다.
내일의 희망이 있기에 그들은 이렇게 오늘의 역경을 웃음으로 넘길 수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