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성지를 찾아서] 절두산
숱한이 순교한 것 보고도 모르는체 한강수 유유히 흘러만 가
천주학쟁이 목자른 곳 切頭山(절두산)으로 이름짓고
발행일1964-09-13 [제438호, 3면]
9월은 우리 순교선열을 추앙하는 달, 몸서리치는 칼, 창, 매질을 받으면서도 곤욕과 절박감을 이기고 그리스도 증거자가 된 선열을 추앙하는 달이다.
성로 14처를 묵상순례하듯, 가슴 속에 핏방울을 맺으며 사모하고 감사하려는 것이 애당초의 우리 정성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입으로만 천주님」을 외우듯 해온 것이 지난 날이 아닌지?
장하신 복자, 주님이 용사들을 그분들이 흘리신 피와 땀방울이 젖은 「형장」(刑場) 거기서 이달의 한시간이나마 보내고자 「순교성지를 찾아보기」로 했다.
「절두산」(切頭山) 이름마저 처절한 곳, 지금도 한강수는 그날을 아는듯, 잊은 듯 유유히 흐르기만 한다.
서울교외에 위치하는 절두산은 「버스」로 「신촌」엘 나가면 「서교동」행 10번 차를 타고 종점에서 내린다. 여기서 도보로 약10분을 가면 잡초만 우거진 한강변 절벽 위에 「가톨릭순교성지」의 기념탑이 홀로 서있다.
■ 절두산의 유래
병인양요(丙寅洋擾)의 보복수단으로 불란서 해군함대가 다녀간 양화진(楊花津)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낸 이유는 서양 오랑캐들에 의해 더럽혀진 땅은 그들을 이곳에까지 오게한 사학도의 피로써 씻어야 함에 있었다.
10년 위계(爲計)로 부녀자 어린이까지 선참후계(先斬後啓)로 참살하게 되니 당시 이 박해를 위해 5백명의 군졸이 양화진에 주둔하게 되었다.
순교자를 위한 기념탑이 서 있는 절두산(切頭山)은 굽이쳐 흐르는 한강수를 내려다 보는 양화진의 일부이고 「딸레」 교회사에 실린 순교자는 황해도 출신 박 요왕 회장 외 5명뿐 더 많은 순교자들의 피어린 내용은 오늘까지도 그전모를 밝히지 못한다.
이 성지에 기념탑을 세우고자 1957년 1월에 대지를 순교자 현양회에서 구입하였고 1962년 9월 1일에 이르러서야 신당동본당 백 회장에 의해 건립, 노 대주교 집전 제막식이 열렸다.
절두산이란 머리를 짜르던 산이란 뜻에서 이곳 주민들이 부르게 되었고 화기의 풍운아 김옥균이 육시(六屍)에 처해진 곳도 절두산 기슭이다.
지금도 늙은 할머니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천주학쟁이들을 목자르던 곳』이라 하여 어린이들도 놀지 못하게 하는 곳이 절두산 근처로 여겨지며, 아릿다운 아가씨가 갖은 감언이설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위주치명할 때 그의 목에서 콩나 물이 나왔다 하여 서울 사람은 제사상에 콩나물을 쓰지 않는다는 이담마저 전해준다.
아! 만고불변 물굽이치는 한강수여 길이길이 순교자들의 넋을 노래하고 전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