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려져 나간 형제들과 대화를 하는 것만이 재일치에로의 가장 빠른 길이라고 공의회의 어떤 교부들은 주장하였다. 그리고 어떤 교부들은 프로테스탄과의 대화는 삼가해야 한다고 경고한 바 있다. 사실인즉 자신이 그리스도의 추종자임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모든이가 참된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그안에 하나이 되기 위하여 그들간의 대화는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반면에 성가스러운 부산물들을 낳을 수 있는 복잡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순수한 애덕의 의미에서 대화를 시작하더라도 거기에 오고가는 표현들이 제삼자에 의하여 신학적 의미로 잘못 인용될 가능성이 없지 않으며 교리상의 대화에 있어서는 그것이 깊숙하게 그리고 친절하게 진전되기 전에 어느 한편의 선입관이나 감정으로 말미암아 결렬되기 쉬울 뿐 아니라 흔히는 그러한 대화가 그리스도의 신비의 계시를 중심으로 진행되기 보다는 피상적인 추리론에 그치게 되어서 결국은 초자연적인 것을 부인하는 유리주의(唯理主義)식의 대화로 변할 위험까지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성실한 대화는 비록 그것이 빠른 시일내에 통일을 가져오지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위에 말한 애덕과 진리를 위해서라도 퍽 유익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지난번 가톨릭시보 제246호에 실렸던 『교회와 제교회』에 관한 대화를 좀 더 연장시키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우리는 1964년 6월 14일자의 「가톨릭시보」의 대화난에서 WCC의 신앙과 교회헌법위원회의 비서이며 제2차 「바티깐」 공의회에 「옵서버」로 파견되어 있는 루카스 피셔 목사가 기난 봄에 「후리부르그」대학에서 가졌던 강연의 요지를 들었다.
이에 대하여 적어도 「가톨릭시보」의 독자들을 위해서라도 다음의 몇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① 제교회가 통일의 근거를 그리스도에 두고있는 만큼 대화의 중심도 그리스도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대화 성립의 조건으로 각자의 현재의 입장을 인정해 주기를 강요하기 전에 자연화(自然化) 하지 않은 참된 그리고 더욱 그리스도적인 것을 찾는데 중심을 두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적인 것에는 초자연적 부면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으면 대화의 진행은 곤란하게 될 것이다.
② 피셔 박사는 『모든 프로테스탄들도 하나이요 종도로 조차 오는 교회를 믿는다』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믿는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란 가톨릭교회에서 믿는 「교회」와는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될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신앙도 가톨릭자(者)의 그것과는 아주 다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로마교회에서 떨어져 나갈 때 성서에 기록된 대부분의 글을 갖고 나갔다고는 할지라도 교회를 갖고 나간 것은 아니며 또 그들 각자가 자기 교회가 유일한 교회인 줄로 믿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해서 가톨릭교회에서 믿는 모든 교리를 다 믿는 비가톨릭자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비가톨릭 그리스도자에게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가톨릭교리일 것이다. 가톨릭이 믿는 「교회」란 교리들의 모음만도 아니요 교리를 연구하거나 믿는 자들의 모임만도 아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주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부르심을 따라 성부의 계시자(啓示者)시요 하나이신 목자 그리스도의 한 우리에 모인 자들이 차세(次世)에서 결정적으로 성부의 잔치에 들어가기 위하여 예복을 준비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의 천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정, 즉 그리스도의 계시사업 구속사업 및 성화사업을 계속하는 천주적이요 인간적인 생활단체인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지체적 완성도중(完成道中)의 부면인 소위 투쟁하는 교회 즉 영원하고 천주적이고 영신적인 것을 위하고 포함하는 현세적이고 인간적이고 볼 수 있는 이 교회로 알아듣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불안전하고 추상적인 교회의 정의를 시도하기 보다는 구체적으로 유일한 실물을 가리켜 주는 것이 더욱 정확한 정의가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로마가톨릭 교회이다. 적어도 그의 본질적인 요소를 빠짐없이 관찰하고 묵상하고 생활하지 않고서는 「교회」의 정의를 파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톨릭 신앙자들은 자모(慈母)이시고 교사(敎師)이신 「거룩한 교회」로부터 전해받는 그리스도의 모든 가르치심을 자녀적으로 받아들이며 교회의 위촉된 그리스도의 방법과 지도에 의거한 삶을 통해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 안에서 「교회」를 믿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안에서의 그리고 교회를 통한 천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그들의 신앙은 천주의 의사됨 즉 천주께 대한 초자연적인 자녀적 태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신덕 생활이 바로 현세에서 시작되고 차세에서 완성될 천주 성사생활에 참여함인 천주의 선물인 것이다. 이 초자연적 자녀됨으 모든 이가 그것을 현저히 느낄 필요는 없이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가르치는 모든 교리를 믿고 그의 윤리원칙에 순종하고 성사들을 받는 것으로써 입증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프로테스탄의 신학은 아주 다르게 말하고 있지 않는가? 특히 이 문제에 있어서 많은 대화와 묵상과 희생과 기도가 요구되는 것이다.
③ WCC는 통일을 위한 한개의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제교회의 상호접근을 더욱 쉽게 함으로써 우선 사회적 통일 즉 연합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요 나아가서는 만일 그들을 그리스도 중심에로의 자발적 변질에까지 이끌 수 있다면 내면적 즉 신앙의 통일을 위해서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 보아서는 가톨릭 교회가 그 「멤버」가 될 필요성은 보이지 않는다. 설혹 된다하더라도 그것은 사회적 입장에서일 것이다.
④ 공의회의 의안중 분열에는 가톨릭교회에서도 잘못이 있었다고 말했다는 것은 주로 애덕의 의믜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교회의 천주적인 부면을 덜 보거나 못 본채 인간적인 측면만을 생각하고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는 형제들을 붙잡아 둘 만한 덕망이 그 당시의 교직자들에게 없엇다면 그것도 하나의 큰 잘못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가톨리교회의 역사상 본질적 문제에 있어서 신학적 잘못이 있었다고는 아무도 지적하지 못한다.
⑤ 비가톨릭 그리스도자들에게도 어떤 본래의 그리스도교적 요소가 있었다는 것은 성세와 성서를 들 수 있으며 어떤 주교들은 그러한 요소가 로마교회 밖에서 더 잘 발전하였다고 한 것은 성서의 신비적이 아닌 고고학적(考古學的) 연구 따위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부분적 요소들이 초자연적인 그리스도의 교회가 가져야 할 요소로서 충분하다고 결론짓기 전에 많은 것을 고찰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예를 들면 씨심으는 자의 비유, 포도나무의 가지의 비유 특히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제각기 다르게 해석하고 다르게 적용하게 된 것은 결코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진리의 성신의 작용으로는 볼 수 없다는 점 따위일 것이다.
⑥ 『로마 가톨릭교회는 그가 유일한 그리스도의 교회임을 확신한다.』는 선언은 유일한 길이요 유일한 진리요 유일한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친히 세우시고 운영하시는 하나이요 거룩하고 공번되고 조도로 조차 오는 「교회」안에 계신다는 것을 그리고 그 교회가 로마에 본부를 두고있는 바로 이 교회임을 확신한다는 것을 거듭 고백하고 선언하는 의미일 것이다.
⑦ 그리스도께서는 로마 교회 아닌 재교회에는 현존 하시지 않는다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는 아직도 정밀히 표현하고 구별하고 또 고찰해야 할 많은 관심들이 남아있다.
그리스도와 그의 성신은 천주 제2위시고 제3위이신 만큼 아니계시는데가 없으시다. 그러니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본질적으로 손상됨이 없이 존속하기 위하여 필요한 성질의, 그리고 필요한 모양의 현존과 도우심을 지적해 놓고 논의해야 할 것이다.
사람이시요 천주이신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현존하심은 두가지 모양으로 하신다고 할 수 있다. 즉 이미 부활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인간적 현존은 당신의 인간적 활동의 존속인 교회를 통해서 하시고 천주적 현존은 당신이 보내신 「빠라클또」 성신을 통해서 교회가 교회로서 패망됨이 없이 존속할 수 있도록 도우시고 밝히심으로써 하시는 것이다.
문제는 다른 기회로 미루고 여기서 그칠까 한다.
⑧ 끝으로 또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베아 추기경이 거듭 설명한 바와 같이 일치운동에 있어서 새것의 느낌을 주는 발언이 있었다면 그것은 애덕에서 말한 것이지 교리상 새로운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앞으로도 어떠한 기본적 교리의 수정이나 변경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다만 문제는 모든 문제에 대해 그리고 모든 관점에서 마음놓고 솔직하게 대화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데 있다 할 수 있겠다.
아무쪼록 많은 희망을 걸고 시작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 간의 대화가 사회적인 그리고 우애적인 단계를 거쳐서 초자연적이고 신비적인 대화에까지 발전하기를 기원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尹良碩 神父(광주 대건대신학교 교수신부, 예수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