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성지를 찾아서] 미리네 · 양지
김대건 신부 묘소 있고 살던 곳
발행일1964-09-27 [제440호, 3면]
■ 미리네 경당
이 경당(경기도 안성군 양서면 미산리)은 미리네(안성본당공소)성당서 약4백 「미터」 지점인 성당 북방 산기슭에 위치한다.
1846년 9월 16일 서울 「새남터」서 치명한 후 당시 젊은 신자들에 의해 40일만인 그해 10월 6일 지금 경당자리에 유해가 이장되었다.
김신부님의 유해를 모셔온 이 원선시오 회장의 손자인 이 회장이 이곳 공소회장을 지내며 유덕을 추모하고 순례객을 안내한다.
김신부님의 유해는 1901년 5월 18일 1839-1846년 사이의 치명자 열복조사위원장 대리이던 위돌 박신부와 비세관 안신부(후에 대구주교)에 의해 용산전소신학교로 이장되었다. 1960년 7월 5일 다시 김신부의 유해는 현 서울대신학교 성당제대 앞으로 옮겨졌다.
이 경당에는 「빠리」외방전교회원인 고주교, 강신부 및 최신부님의 무덤이 있다. 동경당 묘소에는 김신부의 아래척만이 보존되어 있고 경당 밖에는 김대건 신부의 자당이신 고 우술라 여사이 무덤이 있다.
미리네경당에 가는 길들은 ▲경안-용인-천리-미리네(1백리) ▲이천-양지-미리네(85리) ▲수원-용인-천리-미리네(90리) ▲안성-장서리-노곡리-미리네(80리) ▲수원-오산-송정-장서리-노곡리-미리네(1백20리)의 길들이 있다. 그런데 미리네까지 찻길이 있으나 정기 「버스」는 천리와 노곡리까지 각각 다닌다.
■ 양지
1821년 8월 21일 충남 내포서 출생한 김대건 신부가 정해년교난으로 증조부의 치명 후 재산을 탈취 당하고 가족들이 분산당하는 통에 피난해온 곳이 이곳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 497번지의 양지본당서 남서쪽 산길 약7백 「미터」 지점에 위치한다.
여섯살의 어린 몸으로 김신부는 조부와 양친을 따라 「골배마실」로 불리우는 이곳 산중에 우거하며 한학을 했었다.
그는 1836년 6월경 모방 나신부에 의해 영세하고 신학생으로 선출되어 동년 7월 8일 정든 피난처를 떠나 중국 「마카오」로 갔던 것이다.
1845년 8월 17일 중국 상해 「김가항」서 수선탁덕으로 서품되어 같은해 10월 귀국하여 눈물어린 상봉을 하고 11월 12일 이곳에(30여세대가 거주했다함) 본당을 설립, 서울과 은이공소 등을 사목했다.
1846년 4월 8일 이곳서 최후이 미사를 봉헌 한뒤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 성지에는 가설제대와 김신부의 동상이 김신부가 살던 집터에 세워져 있다.
「양지」본당은 ▲수원-용인-양지-이천 ▲경안(廣州)-용인-양지 ▲안성-백암-양지 ▲장호원-주천-백암-양지 등의 국도 옆에 위치하여 「버스」, 기차편(수원-양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