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공NC】 반정부 소요(騷擾)가 한창이던 1월23일 불교회관 근처에서 당년 20세의 한 청년이 체포되었다. 당국이 밝힌 바에 의하면 그는 두 개의 지뢰와 수류탄과 상부 공산주의자의 지령서와 「비라」를 날랐다고 한다.
1월28일 그는 군법회에서 정부전복활동죄로 사형언도를 받았다. 그 다음날 새벽 4시에 형무소장은 베드루.트란.반.통신부와 불교승인 전화로 초청했으며 군법회의 서기, 관선변호사 및 다른 관리들도 모두 형무소에 모였다.
새벽 5시 침묵 가운데 이들은 그 청년의 감방으로 갔다. 갑자기 전기불이 켜지자 그는 이들이 방문한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의 재심 청구는 기각되었으며 사형집행은 이날 아침으로 확정되었었다. 그때 형무소장은 그에게 감정이 격한 어조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저의 어머니에게 이별의 인사를 전해주십시요』라고 간단히 대답했다. 다음 불교승이 앞으로 나와 불경을 염할 때 소장은 그에게 불교의 기도를 원하느냐고 물었으나 그는 잠잠한채 대답을 안 했다.
다시 소장이 『지금 여기에 불교 스님과 가톨릭의 신부님이 계시니 어느 분을 택하겠느냐』고 했을 때 그 청년은 『나는 신부님을 택합니다』고 말했다. 이 소리를 들은 트란.반.통신부는 마음 속으로 천주님께 감사를 드렸다. 왜냐하면 전날 오후부터 그는 동 형무소의 레지오 마리에 회원들과 함께 동 사형수의 회개를 천주님께 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 청년은 재판정에서 자기는 무종교가라고 밝혔었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그래서 동 신부는 그에게 간단히 영세준비를 시키고 그의 감방에서 베드루라는 영명(靈名)으로 세를 주었다.
새벽 5시20분 「사이공」 중앙시장 근처의 사형집행장으로 헌병들은 그를 호송했으며 동 신부는 그와 함께 가면서 천주님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죽음을 준비하도록 하고 가족에게 전해달라는 그의 마지막 부탁을 들었다.
청년의 눈은 가리워졌고 그는 형태(刑台)에 묶였다. 사형집행분대는 그 앞에 늘어섰다. 마지막으로 그의 곁을 떠났다가 그가 쓸어진 후 제일 먼저 달려간 이는 물론 트란.반.통신부인데 동 신부는 『그 청년은 조용히 죽음을 맞이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사이공」 인근 남부 출신으로 그곳 중학교 2학년에 재학했었다. 동 중학교는 비그리스도교계 학교로 교장은 불교도였다.
학생으로서의 그는 신중한 편이었으나, 교사들 중 아무도 그가 어떤 정치활동에 관여하고 있다고 생각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이 청년은 오늘날 월남에 있어 불교에서는 어떠한 생활한 의미도 발견 못하여 인생 문제의 해답을 끝없이 추구하고 있는, 특히 공산주의자들의 세심한 관심을 모으고 있는 수많은 청년들 중의 하나이다. 새벽 최후의 순간에 이 청년은 그 궁극적 해답을 얻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