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紙上聖路巡禮(지상성로순례)] 십자가의 길은 생명의 길
주여 여기 실의에 찬 형제들을 보소서…
일어나소서 당신과 함게 나도 또한 일으켜 주소서
발행일1965-02-28 [제460호, 3면]
■ 제3처 예수 기진하여 제1차 엎더지시다
주여 어찌된 일입니까 왜 이리 비틀거리십니까? 앗… 당신은… 드디어…
주께서 기진하여 넘어지셨다. 천주께서 땅바닥에 엎더지셨다.
주여 누가 감히 그처럼 모진 편태와 갈증과 허기에다 채찍에 터진 쓰라린 어깨로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탱해낼 수 있겠읍니까?
저는 그런 고초를 당하기도 전에 벌써 수없이 넘어졌읍니다.
나를 온전히 당신께 바치겠다고 약속했읍니다. 또 그것을 확신했읍니다. 그러나 마음의 작은 파동과 역경에도 저는 그만 땅바닥에 주저앉아 버렸읍니다. 십자가의 길이 생명의 길이라는 것이 거짓으로만 보였읍니다.
무엇 때문에 이것을 참고 바칠 것인가 거듭 원망하였읍니다. 당신 종 바오로의 말같이 암만해도 다른 법칙에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이 나약한 육신과 지조 없는 마음은 당신을 떠나고, 걸음을 막는 저의 십자가를 그만 내던졌읍니다. 이제 방황하는 이 영혼에 남은 것이 무엇이겠읍니까? 좀먹듯이 파고드는 공허(空虛)뿐입니다. 주여 일어나소서. 당신 종의 고독을 지고 다시 일어나소서. 당신과 함께 저도 또한 일으켜주소서.
주여 또 여기 가난하고 병들고 굶주린 당신 형제들을 보소서.
모두가 실의(失意)에 차 있읍니다.
그들은 삶의 보람 때문이 아니고 모진 목숨 때문에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당신은, 이 현실사회에서 추방되어 인생 종착역같은 행려자(行旅者) 수용소에 가 있는 당신 형제들을 아시겠지요. 그들 중에 어떤 이는 정녕 죽는 날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당신은 또 P를 아시겠지요.
거듭한 실패와 타락으로 집에서도 쫓겨난 그 불쌍한 P말입니다.
어제 그를 만났읍니다. 사흘을 굶었답니다. 그도 당신처럼 그렇게 휘청거리더군요. 마치 술취한 사람처럼. 그렇습니다. P는 취해있읍니다. 세상의 비정(非情)과 현기증에 취해있읍
그 30원짜리 하숙서도 알몸으로 쫓겨날 판국이랍니다.
당신은 굶주림의 색갈이 무엇인가를 아시겠지요. 그 배고픈 샛노란 빛깔을, P에게는 하늘도 땅돠 온천지가 샛노랄 뿐입니다. 지금 그에게는 전진(前進)을 가능케하는 푸른 신호가 없읍니다.
결국 그도 쓸어질 수밖에 없었읍니다.
다시 떨어질 수밖에 없었읍니다.
『주여 일어나소서. 우리 육신이 땅에 불사오니 우리를 도와주시고 구원하소서』(성영 43) 버려두고 온 저의 십자가를 다시 지게끔 저의 마음과 정신에 힘을 주소서.
주여 저와 실의찬 당신 형제들의 신덕을 굳세게 하여주소서!
■ 제4처 예수 길에서 성모를 만나시다
주여 당신 어머니가 너무나 가련하십니다. 어머니는 뒤따르십니다. 당신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온 인류의 뒤를 따르십니다. 아우성치는 잡다한 군중 속에 끼어 이리 미리고 저리 밀리십니다.
그러나 성모님의 눈은 당신만을 응시하십니다.
당신의 기진하신 모습, 온몸의 상처, 한숨, 진땀, 휘청거리는 걸음, 당신의 어느 것 하나도 성모의 눈은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어머니는 당신의 고통을 아십니다.
당신과 꼭같이 괴로워하십니다.
비수가 그 심장을 오려내듯 죽기까지 애통하십니다.
성모님은 당신께 근접도, 당신 피땀을 씻어주시지도 못합니다.
어머니로서의 한 마디의 위로의 말도 당신께 건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여 당신은 아십니다.
이 통고의 어머니께서 당신과 함께 온 세상을 구해가심을!
주여 저도 이 어머니의 사랑을 본받게 하여주소서.
가끔 사람들 틈에 끼어 그들의 불행, 그들의 십자가의 길을 뒤따라도 봅니다. 그러나 너무나 거듭 밀려닥치는 새로운 불행, 새로운 불의와 죄악의 가중(加重)에 그만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립니다.
내게는 형제도, 친척도, 부모도, 처자도 아는 사람도 없기를 얼마나 자주 바랐는지요. 그들의 수없는 불행에 지쳐서입니다.
그러나 당신 어머니는 인간의 눈에는 너무나 보잘 것 없고 무기력한 한 여인으로만 보일테지요. 하지만 천주님의 눈에는 당신과 같이 뭇 인간의 고통과 절망을 함께 받으시면서 세상을 구해가시는 위대한 어머니십니다.
주여 저에게도 이렇게 묵묵히 모든 형제들과 고생을 같이하고 같이 괴로워할 수 있는 사랑을 주소서. 그리하여 당신 어머니와 같이 당신과 함께 이 세상을 구하는 작은 제물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