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人間(인간)] 천주님의 성명
발행일1964-09-27 [제440호, 4면]
우리 사진은 얼마나 둔감한지를 알 수 있다. 깊은 뜻을 간직하며 섬세한 것은 어지간해서는 우리 정신에 걸려들지 않는다. 보통 말마디도 우리가 그의 참뜻과 내용을 깨닫기에는 힘든 것이며 거의 모든 이가 말마디들을 피상적으로만 사용하고 있다. 말마디들이 간직하는 힘을 우리가 모르고 있기 때문에 보통 말마디는 시시하고 고작해야 격한 말마디들 만이 이따금씩 우리 신경을 자극할 뿐이다. 거의 모든 말마디들은 음악이나 잡음처럼 우리 귀를 스칠 뿐이며 남의 말에 유의한다는 것은 보통으로 남을 흠잡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참으로 애인덕을 갖는 이는 소수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좀 깊게 생각할 때 언어처럼 우리 정신을 충실하게 섬기는 거소 이 세상에는 있지 않음을 깨닫는다. 언어는 사물의 본질을 표상하며 말하는 주관의 색채와 더불어 우리 귀에 울려올때 우리는 그 영혼과 객관을 연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만난다.
성경 초두에 천주님께서는 아담 앞으로 온갖 짐승이 지나가게 하시며 그로하여금 이름을 짓게 하셨음이 기록되어 있다. 아담은 한번 봄으로 모든 동물의 속까지 파고 들어가 각 짐승에 알맞는 이름을 발견함과 동시에 마음에 드는 이름을 지어 줌으로 동물들과 즉시 친근해 질 수 있었다. 아담은 마음에서 울어나는 것과 사물 속에서 발하는 객관을 한데 뭉쳐놓는 정신적인 힘을 갖고 있었다. 한마디로 아담이 지은 이름은 그와 우주와의 결합 같은 것이었다. 아담이 한마디를 발음하는 것은 바로 그 정신 안에 사물의 본질이 생겨나는 것을 보는 것이며 동시에 사물의 본질을 맞아들이면서 환호성을 지르는 것이었다.
아담이 죄를 짓고나서 영혼과 사물의 이런 긴밀성은 깨지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아담이 천주께 불순하고 고립상태에 돌입하자 사물은 인간에게 침입불허의 태세를 갖추고 대적관계를 갖게되었다.
그의 눈은 창시적 순결성을 빼앗기고 흐려졌으며 이세상은 그의 탐욕과 이심의 대상으로 밖엔 있지 않게 되었다. 자연은 그의 진심을 인간에게 열어놓지 않게되었으며 사람은 자신도 똑바로 들여다 보지 못하게 되었다.
맑은 투시력도 잃었으며 말마디도 천주님과의 친밀감 속에 살 때처럼 사물과 인간의 공생(共生)같은 것은 벌써 아니며 모든 연결선과 평화가 무너진 이세상에 한낱 잿덩이로 남게 되었다. 아담은 아직도 유(有)로 부푸는 이세상을 느끼는 하지만 뚫고 들 수 없음을 인식하고 한탄할 뿐이다. 세상은 그에게 잡히지 않을 뿐더러 본색을 감추어 버렸고 아담에게는 잃어버린 지상낙원에 대한 쓰라린 추억만을 남겨놓았다. 그런데 이런 추억마저 사라지게 되자, 우리들은 피해 도망치는 말마디 앞에 서서 괴로와 하지도 못하는 겁데기 인간들로 변했다. 사람들은 말마디의 깊은 뜻이나 내용을 점차로 망각하기에 이르렀고 항상 너무 빨리 입에서 배앝아 버리게 되었다. 어렇게 해서 말마디들은 너무 빨리 다음질쳐 돌아다니게 되었고 돈 모양 손에서 손으로 입에서 입으로 건너다니며 점점 더럽혀지고만 있다.
아무도 그의 아름다움과 내적 가치를 영혼 없는 말마디가 어찌 영혼을 건드릴 수 있을손가? 고작 사물을 지적할 뿐 사물을 뚫고 들지는 못한다. 주관적으로는 한사람의 원의를 타인에게 알리는 표지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어떤 때 말 한마디가 우리 마음속 깊이 박히며 우리 정신과 마음을 사로잡기도 한다. 이런 때 우리는 그 깊이가 얼마나 한 것인지를 체험하기에 이른다. 이는 바로 사물 자체가 우리에게 호소하는 것이며 이 말마디를 종이에 써놓으면 갑자기 종이에서 튀어 나오면서까지 사물의 깊은 본질을 우리에게 일깨워놓는다. 나와 조물을 종합하는 말마디는 아담 자신이 이 세상과 얼마나 밀접히 결합해 있었다는 것을 알린다.
이때 우리는 순간적으로나마 사물을 뚫고 들며 대화할 수 있었던 첫 인간의 영혼 상태를 얼마간이라도 체험하게 된다. 또 이때 우리의 시야는 형언할 수 없이 넓어지며 천주님이 인간정신에게 하사하신 시초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특히 영신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은 천주님의 이름에 대해 이상과 같은 경험을 한두번은 갖게도 된다. 이제 우리는 구약시대의 신자들이 왜 천주님의 성명을 입밖에 내놓기를 두려워 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들은 「천주님」의 이름 대신에 「주님」이란 말마디를 쓰고 있었다. 남달리 천주님의 현존과 진정성을 잘 깨닫고 있던 헤브레아 백성들은 「천주님」이란 말마디에 크나큰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천주 당신은 모이서를 통해 당신의 이름을 「있는 그이」라고 가르쳐 주셨다. 있기만 하는 그 분에게는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으며 그분은 자신만을 통해서 자신 안에 존재하시며 모든 유(有)와 힘을 다 점유하신다. 다른 모든 유(有)는 그분의 조물이며 그 힘에 의존한다.
천주님의 이런 이름은 그 본질의 표현이며 유데아인들에게는 천주님의 이름이 천주님과 같은 것이었고 그들은 「시내」 산에서 천주님을 두려워한 것처럼 천주님의 이름도 두려워했다.
천주님은 또 당신 이름을 통해 당신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계신다. 성전을 지적하시면서 『내 이름은 여기 있을 것이다.』하신다. 「묵시록」안에서는 충실한 제자들을 골라서 당신 성전의 기둥을 삼으시며 그 위에 당신 이름을 새겨 놓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즉 충신한 제자들을 충성하고 그 안에 당신은 영원히 머물으시겠다는 말씀이다. 이제 우리는 『네 주 천주이 이름을 헛되이 불러 맹서하지 말라.』는 계명도 알아듣게 되었다.
또 그리스도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네 이름의 거룩하심이 나타나며』도 얼마나 정성되이 외쳐야 하는지를 알게되면서부터 우리 일상생활의 모든 일을 삼위일체의 성명으로 시작하는 것이 얼마나 중차대한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겠금 되었다.
천주님의 이름은 신비에 차 잇고 무한과 유(有)의 충만과 있기만 하는 그분의 힘으로 빛을 발한다. 이 이름 앞에서는 믿는 모든 이의 가슴이 활기를 띠우고 용약하며 우리 영혼의 가장 내밀한 곳이 뛰놀고 응답한다.
천주님만을 위해서 천주께로부터 조성된 영혼은 그와 결합되지 않고서는 휴식할 줄 모르며 그와 사랑으로 연결되징 ㅏㄶ는한 무의미한 것이다.
우리의 시작과 끝, 목적과 사명, 숭고함과 비천함, 흠숭과 원의, 통회와 보속 등이 천주님의 성명과 항시 연결되어 있으며 『천주 내 천주』의 말마디에 달려있다. 따라서 천주님의 이름은 헛되이 부르지 말지며 항시 경건한 몸과 맘으로 존경해야 한다. 경솔하게 입에 올라 내리는 것으로 만들지 말고 가장 귀중하고 새번 거룩한 지보(至寶)로 우리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어햐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