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톨릭을 이렇게 본다
발행일1965-02-28 [제460호, 4면]
오늘날은 대화(對話)의 시대이다. 누구보다도 교황성부께서(특히 회칙 「그의 교회」를 통하여) 또한 공의회가 우리에게 모든 사람과의 대화를 촉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이 교회가 그 지상광버인 인류구원사업을 수행해가는데 필수불가결의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와의 대화에 들어가야함은 말할 것도 없다. 여기에 본지는 작년에 있었던 갈라진 형제들과의 대화에 이어 올해에는 일반 사회와의 대화의 바탕을 닦아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번 호부터 격주(隔週)로 4·5차에 걸쳐 한국의 사상계, 정계(政界), 언론계, 기타 일반 문화계를 망라한 저명인사들로부터 먼저 그분들이 가진 가톨릭 교회관을 묻기로 하였다. 우리는 이 분들을 통해 교회가 어떻게 사회에 반영되어 있는가를 비롯하여 우리에게 대한 그분들의 솔직한 견해를 듣게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종교관, 세계관, 혹은 사상체계를 바탕으로한 논지(論旨)에 대할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물론 우리의 신앙교리에 위배되는 견해나 주장에 동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유물주의적 공산주의자의 주장일지라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 구원의 사명에서 제외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요, 만인에게 먼저 손을 뻗쳐야 할 것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揭載 到着順 (編輯室)
■ 包容의 幅을 넓게… / 朴鍾鴻(哲博·서울大 大學院長)
어떤 종교를 밖에서만 보고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은 삼가야 할 일인줄 안다. 더구나 그 신앙의 내용에 관하여서는 깊이 들어가 스스로 체험하기 전에는 알기 힘든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러기에 여기서 나는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꼭 쓰라는 부탁이기에 문외한의 소감이나마 적기로 한다.
①신앙의 자세가 매우 경건하고도 굳건하여 보인다. 수도하는 분들의 태도가 옆에서도 믿음의 생활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 많은 거룩한 순교자들이 이를 증명하는 것이지만, 미사 드리는 광경만 하더라도 성스럽고 장엄한 감이 들어 좋다.
나의 전통을 존중하는 것도 짐작은 되나, 그렇다고 이를테면 십오륙세기에는 성당이 「르네쌍스」의 미술로 꾸며졌듯이 오늘에는 좀 더 새로운 현대적인 감각을 좋은 면에 있어서 그에 맞도록 살릴 여지는 없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②지혜를 타락의 단추라고 하여 간단히 무시해버림이 없이 오히려 이론적인 사색에 있어서도 오랜 연구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만큼 심오하고 정밀한데까지 밝혀져 있는줄 안다. 이 점에 지식인들을 끌 수 있는 방침인 것도 같다.
그러나 신자가 아닌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고집부터 가끔 앞세우는 경우가 없지 않다. 신앙이란 자기와 다른 이단에 대하여 냉혹하여야 하는 것임즉도 하나 위대할수록 그 깊은 믿음의 힘에 의하여 원수도 사랑하듯이 널리 상대방을 살리면서 진리로 이끄는 보다 큰 포용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니 본래가 그러한 천주교인데 나의 좁은 경험이 오히려 당치 않은 그런 견해를 가지게 하고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
③민족적 내지 동양적인 정신 생활의 전통을 살리어 거기에 천주교와의 일치점을 발견하려는 노력은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거리에 나와 전도하는 일이 없으면서도 백성의 고통을 잘 살핀다고 하겠다. 하나의 예로서 임종시에 수녀가 돌보아 주며 신도들이 희생적으로 같이 일을 거들어 장지까지 주선하여줌은 세상을 떠나는 사람에게는 물론이요 유가족들에게 다시 없는 고마운 위안이 될 것이다.
이 점이 천주교가 일반 민중에 침투해가는 무언의 설교요 힘이다.
이에 관해서도 문외한의 욕심으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생산적인 생활 속에까지 깊이 파고들 필요가 있지 않을까. 수도원의 생활이 자급자족을 위주한다는 말도 듣기는 하였으나 그것이 더욱 현대화하면서 신도들의 직장생활과 직결될 때 교세가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올 수 있지나 않을까 생각한다.
■ 信仰의 個性化를 / 柳達永(再建國民運動中央會長)
나는 나 자신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로 믿고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한 평신도이다.
그런데 나는 가톨릭과는 거의 극단적으로 다르다고도 할 수 있는 방향에서 신앙에 들어가게 된 사람이다.
그러므로 가톨릭의 교인들과 나의 생각이 일치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가톨릭 교인들 중에 인간적으로 친근하게 지내고 또 그 신앙에 대해서 존경하는 사람들이 있을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찬란한 순교사를 무엇보다도 큰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는 한 사람이다. 우리 선인들이 가톨릭적인 신앙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찬란한 순교의 역사를 우리가 영광스럽게 가질 수가 있었을가 나는 의심한다.
나는 소위 무교회(姆敎會) 계통의 스승에게서 복음의 진리를 배워서 신교계통의 제도와 의식조차 대견스럽게 여기지 않고 오늘까지 세례도 받지 않았으며 성경을 내 마음으로 자유로이 해석하고 믿고, 또 친구들과 자유로 모여서 성경을 공부하면서 오늘까지 살아왔다.
1956년경에 나는 영국의 성공회의 교회, 프랑스 이태리의 여러 가톨릭 교회를 참관하고 옛날의 교권과 기독교의 흐름을 교회사를 책상 위에서 읽을 때보다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가톨릭적이 아닌 극히 자유주의자이므로 엄정한 교권 밑에서는 견디어 날 것 같지 않다. 그런데 최근 수년동안 현명한 교황들의 개혁적인 용단있는 선언을 보고 마음속에 크게 감사하였었다.
그리스도의 근본 정신은 영원토록 변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의식이라는 것은 결국 시대적 산물인 시대의 의상(衣裳)이라고 믿음으로 철을 따라 옷을 갈아입듯이 종교의식도 필연적으로 변해가야 할 것으로 믿는다. 외식을 위한 기독교가 아니라 신앙을 위한 의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마치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며,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그리스도의 주장과 같다.
기독교의 복잡한 의식은 결국 오랜 세월에 인간들에 의해 생긴 부산물들이다. 우리가 항상 초대교회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 소박 단순한 속에 정금(正金)같은 신앙이 살아 움직이던 것을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어느 시대이고 기독교인들은 교파 여하를 물론하고 초대교회로 거슬러 올라가서 신앙의 바른 자세와 그 청순(淸純)을 되찾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믿는다.
가톨릭이 파란 없이 세계적 단결을 굳게 유지하고 있는 것은 확실이 큰 장점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의식이 자유화는 앞으로 더욱 대담하게 개선되어 가고 신교와도 굳은 담벼락을 주저없이 허물어서 다함께 그리스도의 진리를 온 인류에게 전파하는 시대가 와야할 것이다. 신앙은 결코 군대가 행진하듯이 통일될 수 없는 다채로운 개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천지 만물이 모두 서로 다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각각 제 개성대로 드러내는 것과 같이 각각 제 개성대로 믿음의 꽃을 피워야 할 것 같다.
■ 現代適應을 歡迎 / 咸錫憲(評論家)
종교, 더구나 제가 믿지 않는 종교에 대하여 이렇구 저렇구 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제가 믿고있노라는 종교도 참으로 알기는 어려운데, 거기 대하여 듣는 사람에게 유익이 되도록 말하려면 상당히 깊은 체험을 한 후가 아니면 아니될 것인데 하물며 제가 믿지도 않는 종교를 감히 그 좋고 나쁜 점을 말할 수가 없읍니다. 어느 개인이나 혹 단체의 종교적 의견이나 행동에 대하여 비평을 할 수 있을 것이고, 또 될수록 진실히 해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을 곧 그 종교 자체라고 말해서는 아니된다고 봅니다.
통털어놓고 어느 종교나 그 좋은 점이 곧 나쁜 점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눈은 보는데서 못 쓰게 되고 귀는 듣는데서 병나게 됩니다. 어떤 종교에 제도가 있고 의식이 있고 교리가 있는 것은 모두 그럴 필요가 있어서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다 사람의 어떤 요구를 만족시켜 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그렇게 하면 좋기 때문에, 그것으로 꼭 잘못되고야 맙니다. 그 이유는 진리는 누구나 각각 제가 직접 체험하게 생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리나 의식이나 제도는 어느 정도의 지도나 편리는 될 수 있지만 진리 그 자체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느 종교에 있어서나 마침내는 그 교리나 의식에서 해방이 되는 자리에 가야만 구원된 것이지 거기 집착이 되어버리면 잘못된 것입니다. 가장 영양분 많고 가장 맛있는 음식이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이듯이 가장 세련된 의식과 교리와 가장 매력 있는 전통을 가진 종교일수록 해독이 많을 수 있읍니다. 있는 것인 다음에는 다 상대지 절대는 아닐 것입니다. 어떤 깊은 교리도 어떤 엄숙한 의식도 내가 곧 진리다 하면 절도요 강도일 것입니다. 다 진리의 어느 모습을 드러내는 뿐이요, 따라서 결국은 부정 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는 말해도 좋을줄 압니다. 근래에 가톨릭이 종래의 보수적인 태도를 버리고 많이 개방적이 되어 오는 것은 참 반가운 일이라고. 그러나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이왕 개방적이려면 아주 옛날의 봉건적인 제도는 활짝 벗어 버리고 교황이니 추기경이니 그런 따위는 없어졌으면 좋겠읍니다. 예수님은 억지로 임금을 삼으려 할 때 도망해 피하시고 자기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라 하셨는데.